5분 얼굴을 비치면 50분간 잊히지 않는다. 이른바 신스틸러, 좋은 영화의 필수 요소인 조연이다. 5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여 조연상 후보에는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강렬하게 스크린을 장악한 10명의 배우가 모두 모였다. 작품의 주연 배우보다 더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도 있었고, 무서운 파격 변신을 감행한 배우도 있었으며, 별다른 대사 없이도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진 조용한 강자도 있었다. 덕분에 남자조연상 후보 5명, 여자조연상 후보 5명은 무척이나 치열한 논의 끝에 탄생했다. 김영민·박명훈·원현준·이광수·이희준·김국희·김미경·김새벽·박소담·이정은이 노미네이트의 영광을 안았다. 56회 백상예술대상은 6월 5일 오후 5시부터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 7홀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 관중 없이 치러진다.
◇왜 이제야 빛 봤나…대기만성 신스틸러
충무로에 등장한 대기만성형 신스틸러들이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감독)'의 김영민은 2001년 '수취인불명(김기덕 감독)'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연기 경력 20년의 배우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하얀색 러닝셔츠 차림으로 등장해 장국영 역할을 소화했다. 잘생긴 외모에 능청스러운 연기로 주인공의 꿈속에 사는 듯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완성했다. 영화의 적재적소에 등장해 신스틸러다운 활약을 펼쳤다.
지난 한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대기만성 배우를 꼽자면 단연 박명훈이다. 2013년 SBS 단막극으로 데뷔해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전 세계의 '리스펙!'을 받았다. '기생충'의 지하실 남자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실제 같은 탈모 분장까지 감행했다. 기괴한 캐릭터를 빈틈 없이 완성, 1031만 명의 관객에게 '저 남자 대체 누구?'라는 물음표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송강호가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라면, 박명훈은 히든카드다.
강렬한 눈빛 한 방으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역할 이름부터 장성무당이다. '신의 한 수: 귀수편(리건 감독)'을 씹어먹은 배우 원현준이다. 그 또한 10년 넘게 연기를 해 온 경력자다. 2009년 KBS 2TV 드라마 '아이리스'를 시작으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장성무당 캐릭터에 오랜 경력으로 쌓은 연기 내공을 담았다. 꾹 참았다 한꺼번에 폭발하듯 쏟아낸 카리스마로 관객을 압도했다.
◇꿈엔들 잊힐 리야…파격 변신한 두 남자
이 배우에게 이런 얼굴이 있었나. 대중에게 익숙한 베테랑 배우들이 파격 변신을 통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광수는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육상효 감독)'에서 지적 장애를 가진 인물을 연기했다. 소화할 수 있는 연기의 스펙트럼을 무한대로 확장하며 '이광수의 또 다른 얼굴'을 선보였다. 시트콤 등에서 보여준 전매 특허 코미디 연기와 더불어 감동 코드가 담긴 절절한 연기까지 소화하며 관객을 울리고 웃겼다. '이광수를 다시 보게 됐다'는 극찬을 이끌어내며 한층 더 성장했다.
이희준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우민호 감독)'을 위해 무려 25kg을 찌웠다. 100kg의 거구가 되어 이희준 연기 인생에 정점을 찍었다. '남산의 부장들'은 이병헌·이성민·곽도원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며 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작품. 한 명의 부장이라도 밀리면 깨져버리는 살벌한 구도 속에서 이희준은 최고의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늘어난 몸무게 이상의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관객 모두를 보듬는 엄마·언니
지난 한해 스크린에서는 관객을 보듬는 여인들이 많았다. 누군가의 엄마와 언니로 등장해 모두의 엄마와 언니가 됐다. 이들이 전한 울림은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관객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았다.
김국희는 '유열의 음악앨범(정지우 감독)'에서 극 중 여자 주인공과 피가 아닌 정으로 맺어진 언니 캐릭터를 연기했다. 때론 남자 주인공을 누나처럼 보듬어 안았다. 사랑 이야기에 가족의 서사를 더해 더욱 풍성하고 따뜻하게 데워냈다. 18살 때부터 대학로를 누비며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 오른 그는 충무로에선 이제야 3편의 작품에 출연한 신인에 가깝다. 그럼에도 네모난 카메라 앵글 속 김국희는 능숙하고 또 편안하다. 조용히 빛을 내는 작은 별처럼, 밤하늘 같은 한 편의 영화를 아름답게 꾸몄다.
우리 사회를 뒤흔든 여성주의의 바람 가운데 '82년생 김지영(김도영 감독)'이 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그래서 찬성표도 반대표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절대 찬반이 엇갈릴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김미경이 연기한 주인공 지영의 어머니 캐릭터다. 관객 모두가 어머니의 자식이기에 '82년생 김지영'에서 김미경은 관객의 깊은 공감과 눈물을 끌어냈다. 언제나 열심히 연기하는 다작 배우임에도 김미경의 얼굴에서 우리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봐야 할 가치는 충분했다.
'기생충'과 함께 전 세계 영화제를 휩쓴 '벌새(김보라 감독)'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은 배우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 가운데 김새벽은 가장 차분하지만 아름답게 빛을 낸다. 주인공의 한자 선생님 캐릭터로 등장하는 김새벽은 세상 그리고 사람의 변화에 당황하고 방황하는 열네살 은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무심한 듯 시크한 것이 아니라, 무심한 듯 따스하다. 감정 변화가 잘 엿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이토록 큰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제는 믿고 보게 되는 김새벽의 얼굴이다.
◇'기생충' 지하 세계의 여인들
반지하에서 온 박소담, 지하와 지상을 오가는 이정은이 백상예술대상을 빛낸다. '기생충'의 여인들이 뜨거운 경합을 벌일 예정이다.
'기생충'에서 기정 역을 연기한 박소담은 종합연기선물세트를 선사했다. 능청스러운 기정의 모습부터 불안에 찬 기정의 모습까지 다양한 박소담의 얼굴을 보여줬다. 거장 봉준호 감독의 손을 잡고 세계 무대로 진출, 이제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박소담으로 자리매김했다. 전국구에서 세계구로뻗어 나간 그는 유행가를 가진 흔치 않은 배우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부른 '제시카 징글'로 본의 아니게 K-팝의 위엄을 자랑했다.
할리우드 배우 니콜 키드먼도 열광한 그 장면, 가정부 문광이 비 오는 날 기괴한 모습으로 현관문 벨을 누르던 그 장면. 그 장면을 만들어낸 이정은이다.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니콜 키드먼이 이정은을 향해 벨 누르는 시늉을 하며 "오! 딩동"이라고 외쳤을 정도로 '기생충' 하이라이트의 주인공이었다. 송강호는 '기생충'을 찍으며 "저게 사람이 할 연기인가!"라는 감탄 섞인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이정은은 이제 백상 트로피로 향하는 벨을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