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리그 역대 최다 연패 신기록을 눈앞에 뒀던 한화는 지난 13일 대전 두산전 도중 폭우로 서스펜디드게임이 선언되는 불운까지 겪었다. 14일 재개된 경기서 엎치락뒤치락 승리를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9회말 투아웃까지 스코어는 6-6. 이제 아웃카운트 하나만 올라가면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고 다음 경기에서 연패 탈출에 재도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지난해까지 1군 기록이 하나도 없는 7년차 내야수 노태형(25). 2014년 신인 2차 10라운드에서 가장 마지막 순번으로 지명된 무명 선수였다. 모두가 맥없는 경기 종료를 예감하던 순간, 그 유망주의 패기와 절박함이 섣부른 편견을 이겨 버렸다. 노태형은 2사 2·3루서 함덕주를 상대로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끝내기 좌전 적시타를 만들어 냈다. 3루주자 이용규가 홈인.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달려 나와 환호했다.
무명 노태형의 뜨거운 반란은 한화의 긴 연패로 야구계가 술렁였던 지난 주,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린 최고의 장면으로 꼽혔다. 일간스포츠와 조아제약이 노태형을 6월 둘째 주 주간 MVP로 선정한 이유다. 단숨에 '난세 영웅'으로 떠오른 노태형은 "야구선수로서 꿈꿔왔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활짝 웃었다.
-18연패를 끊는 끝내기 안타를 쳤다. 연락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경기 끝나고 나니 메시지가 200개 정도 와 있더라. 가족이나 친구들은 물론이고, 만난 지 오래 된 지인들에게도 연락이 왔다. 저녁 식사를 한 뒤에는 그 메시지에 답을 하다 시간이 다 간 것 같다.(웃음) 그래도 일일이 다 답장을 했다. 나에게 언제 또 이런 날이 올 지 모르지 않나. 모두 감사했다."
-부모님께는 언제 연락을 드렸나. "서스펜디드게임이 끝나고 잠깐 쉬는 타이밍에 어머니와 아버지께 모두 전화를 드렸다. 안 그래도 7년 만에 1군에 올라와서 데뷔 첫 안타를 친 지도 얼마 안 돼서 요즘 많이 좋아하고 계셨는데, 더 좋은 일이 생겨서 정말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경기를 보다 울컥하신 것 같더라. 모처럼 효도한 것 같아서 기뻤다. 경기 끝나고 집에 오니 엄마가 평소 내가 좋아하는 곱창볶음을 해주셔서 맛있게 먹었다.(웃음)"
-끝내기 기회를 앞둔 타석에 들어설 때 어떤 기분이었나. "생각한 것보다 엄청 긴장하거나 떨리진 않았다. 그냥 '내가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계속 자신감을 가지려고 했다. 상대 투수(함덕주)도 두산에서 가장 좋은 투수 중 한 명이니, 그냥 가볍게 배트 중심에 공을 맞추자는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다행히 좋은 결과가 나왔다."
-경기 뒤 '한화 팬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는 소감도 인상적이었다. "7년 동안 무명 선수로 2군에 머물면서 팬들에게도 전혀 이름을 알릴 기회가 없었다. 솔직히 프로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팬들의 응원을 받고 싶은 갈증이 있지 않나. 그런데 이런 기회가 와서 마침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좋다. 앞으로 더 잘해서 더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싶다."
-2군 경기 도중 콜업돼 KTX를 타고 1군에 합류했다. "지난 10일 2군 경기에 나갔다가 1회초 수비를 마치고 갑자기 교체됐다. 그 순간 '아, 1군에 가나' 싶었는데 진짜로 바로 짐을 싸서 (1군이 있는) 부산으로 가라고 하시더라. 얼떨떨했지만 기분이 정말 좋았다. 최원호 감독님께서 2군에 계실 때 나를 좋게 봐주시고, 좋은 기회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
-1군과 2군에서 최 감독대행에게 어떤 주문을 받았나. "항상 '부상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아무리 야구를 잘해도 아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늘 조심하라고 강조하셨다. 최 감독님은 선수들을 무척 편하게 해주시는 분이다. 경기할 때나 훈련할 때나 배려를 많이 해주신다. 1군에 와서도 '부담 갖지 말고 2군에서 하던 것처럼 자신있게 하라'는 말씀만 해주셔서 마음이 한결 편했다."
-모처럼 1군에서 기회를 잡았는데, 하필 팀이 긴 연패 중이라 마음이 무거웠을 듯하다.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팀 분위기가 침체돼 있진 않았다.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계속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하라'는 주문을 많이 하시면서 최대한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하셨다. 선수들도 계속 지다 보니 부담감이 있던 게 사실인데, 이용규 선배님과 김태균 선배님을 비롯한 고참 선배님들이 후배들을 잘 이끌어 주셔서 잘 버티고 연패 탈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연패 탈출 후 치른 경기는 이전과 좀 다르던가. "그 전에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연패를 끊고 나니 선수들도 플레이에 조금 더 여유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연패 부담감을 내려놓고 나니 몸이 경직되지 않고 경기력도 조금 더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또 기분 좋게 연승을 한 것 같다."
-1군에서 뛰지 못한 지난 7년은 어떻게 보냈나. "2014년에 입단한 뒤 3년간 2군과 육성군만 전전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빨리 군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박한결 형과 동반 입대를 결정했다. 팀에서 감사하게도 군 보류 선수로 처리를 해주셔서 현역으로 군복무를 했다. 하지만 지난해 복귀하고도 생각했던 것처럼 잘 되진 않았다. 1년간 육성군에만 있었다."
-그러다 어떻게 2군으로 올라오고 기회를 잡았나. "육성군에 계신 코치님들께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고,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면서 포기하지 않게 잡아 주셨다. 내 자리가 어디든 묵묵히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교육리그 때 이용규 선배님과 방을 같이 쓰게 됐다. 선배님을 옆에서 보면서 '톱 클래스 선수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현실에 안주했던 것 같다'는 반성을 하게 됐다. 그때 많은 것을 느꼈다."
-그 후로 이용규와 인연이 이어졌다. "올해 초 선배님께서 먼저 개인훈련을 같이 가자고 하시더라. 난 연봉이 적어서 해외 개인훈련은 금전적으로 부담이 됐는데, 선배님께서 숙식을 다 지원해주셔서 감사하게도 동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옆에 붙어서 훈련하고, 또 개막 전까지 2개월간 어떻게 운동해야 하는지 많이 배웠다. 정말 선배님 도움을 크게 받았다."
-끝내기 안타를 친 뒤 감사 인사는 전했나. "선배님이 야구장에서 '잘했다'면서 함께 기뻐해 주셨다. 그날 모든 경기가 끝나고 퇴근한 뒤 다시 따로 전화를 드려서 '정말 감사드린다. 선배님 덕분이다'라고 말씀 드렸다. 이용규 선배님도 좋아하시면서 '어머님, 아버님도 많이 좋아하시지?'라고 하시더라. '부모님과 맛있는 식사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말해주셨다."
-프로야구 선수 노태형의 커리어는 이제 시작인데. "그렇다. 아직은 나를 1군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서 1군에 계속 남아 있는 게 올해 목표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서 즐겁게, 재미있게 야구를 해서 결과로 보여드리고 싶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1군에 남아있는 것뿐만 아니라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고 좋은 성적도 내서 연봉도 많이 올리고 싶다."
-2군에서 함께 고생하던 선수들과 요즘 함께 뛰고 있다. "동반 입대 했던 박한결 형과 군대에서 '우리가 같이 1군에서 뛰는 날이 올까' 하면서 미래를 떠올려 보곤 했다. 2군에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이렇게 1군에서 같이 뛰고 있으니까 신기하고, 행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