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관중석이 텅 비었다. 코트와 취재석의 거리는 약 30m. 양 팀 총 12명의 선수 중 유독 한 선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네트 너머 상대 선수의 움직임을 예상하며 동료들에게 알려주는 소리였다. 주인공은 '배구 여제' 김연경(32·흥국생명)이었다.
'센 언니' 김연경이 '수다쟁이', '분위기 메이커'로 돌아왔다.
흥국생명은 30일 충북 제천체육관에서 열린 2020 제천·MG새마을금고컵 프로배구대회 A조 개막전에서 현대건설을 세트스코어 3-0(25-15, 25-13, 25-22)으로 완파했다.
이날 경기는 김연경의 국내 복귀 첫 공식경기로 관심을 모았다. 약 50여 명의 취재진이 찾았다. 무관중 경기로 진행된 상황에서도 '김연경 파워'를 입증했다. 김연경의 이름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연경이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고 공식경기에 나선 건 3647일 만이다. 가장 최근 출장은 2010년 9월 5일 KOVO컵 결승전 한국도로공사전이었다. 당시 김연경은 일본 JT 마블러스 임대선수 신분이었지만, 일본 정규시즌이 종료됨에 따라 국내로 돌아와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었다.
이날 흥국생명의 첫 득점 주인공도 그였다. 0-1에서 세터 이다영이 공을 띄우자 김연경이 높이 뛰어올라 상대 코트에 공을 내리꽂았다. 16-13에서는 블로킹 득점을 추가했다.
2세트에는 분위기 반전을 이끌었다. 6-10으로 뒤진 상황에서 서브 에이스를 올렸다. 1세트 3점에 그친 김연경의 표정이 이때부터 환해졌고, 목소리도 커졌다. 그는 코트를 크게 돌며 동료들의 파이팅을 이끌었다. 계속된 김연경의 서브 때 흥국생명은 10-10 동점까지 만들었고, 결국 25-13으로 이겼다. 김연경은 "(정규시즌 기준으로) 11년 만에 복귀전을 가져 부담감과 긴장감이 있었다. 여태껏 연락이 없었던 지인들도 '좋은 모습을 보여달라'고 말해 준비를 많이 했다. 팀이 이겨서 기분이 좋다"며 웃었다.
큰 액션과 큰 목소리. 그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김연경은 후배 이재영의 백어택 득점 때 두 팔을 벌려 가장 환호했다. 외국인 선수 프레스코 루시아(등록명 루시아)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며 응원했다. 2세트 10-10에서 자신의 서브가 범실로 판정 나자, 비디오 판독 때 네트를 두고 현대건설 양효진·이나연과 대화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예전에 흥국생명에서 함께 뛴 황연주, 대표팀 룸메이트였던 양효진이 상대 팀에 있더라. 세월이 지났음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10년 전 막내급이었던 그는 이제 고참이 됐다. '식빵 언니'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김연경은 "(후배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간다. 특히 밥 먹을 때 대화를 주도한다. 내가 없으면 허전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 정도로 친해지려 노력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김연경보다 다섯 살 적은 흥국생명 주장 김미연(27)은 "언니는 분위기 메이커다. 쉬지 않고 계속 말한다"고 했다. 김연경은 "내 역할이 대표팀에서와는 다른 것 같다. 특별히 무언가를 더 하려 하지 않고, 기존 흥국생명 시스템에 녹아들려고 한다. 경기 중간 동료들에게 조금씩 짚어주려 한다"고 말했다.
지난 6월 흥국생명과 계약한 김연경은 7월 중순 팀 훈련에 합류했다. 구단은 김연경에게 7월 말 혹은 8월 이후 합류를 권했지만, 부상에서 회복하느라 실전 감각이 떨어진 그가 서둘러 합류했다. 한 달 전에는 컵대회 출전 여부가 불투명했지만,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은 "이번 대회에 풀 타임으로 내보내겠다"고 했다.
김연경은 이날 7득점, 공격성공률 41.66%를 기록했다. 2~3세트 중후반에는 교체돼 웜업존을 지켰다. 아직 최상의 컨디션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해외 무대와 다른 공인구 적응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정규시즌은 아직 한 달 넘게 남아있다.
김연경은 "몸 상태가 빨리 올라와 대회 출전을 결정했다. 오늘 경기력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며 "관중이 없어 분위기가 떨어진 측면이 있다. 연습경기 하는 느낌이었는데, 적응해야 한다. 코로나19가 빨리 종식돼 팬들이 경기장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박미희 감독은 "지금 김연경이 100% 상태로 뛰면 무리가 올 수 있다. 차근차근 준비시킬 것"이라며 "김연경의 기록보다 리베로 도수빈과 라이트 루시아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한 요소"라고 평가했다.
이날 경기를 본 다른 사령탑은 김연경의 존재를 부러워했다. 이도희 현대건설 감독은 "김연경의 합류로 흥국생명의 공격과 수비, 블로킹 모두 훨씬 강해졌다"고 말했다. 이형택 KGC인삼공사 감독은 "좋은 선수들이 많아 부럽다"고 했다. 차상현 GS칼텍스 감독은 "지난해 1위 팀을 흥국생명이 갖고 놀았다"고 평가했다.
국가대표 김연경-이재영-이다영이 뭉친 '슈퍼 흥국생명'은 예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자랑했다. 이재영이 양 팀을 통틀어 가장 많은 19점, 성공률 43.58%를 기록했다. 흥국생명이 컵대회에서 우승한 건 김연경이 뛰었던 2010년 한 번뿐이다. 이재영은 우승 공약으로 "연경 언니와 댄스를 선보이겠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