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한국시리즈 우승 후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김택진 NC 구단주 김택진 NC 다이노스 구단주(엔씨소프트 대표)는 지난달 26일 고(故) 최동원의 유골이 안치된 일산 청아공원을 찾아 한국시리즈(KS) 트로피를 헌정했다. 그는 "영웅이신 최동원 선배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리고 고인의 모친 김정자 여사가 김택진 구단주에게 전한 편지를 읽었다.
이날은 NC가 첫 우승에 성공하고 이틀이 지난 뒤였다. NC 선수단과 팬들이 우승에 취해있을 때였다. 최동원은 1984년 KS에서 홀로 4승을 거두며 롯데의 첫 KS 우승을 이끈 레전드다. NC 구단주가 롯데의 전설적인 선수를 찾아가 추모하는 장면은 조금 의아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았다. 김택진 구단주가 최동원의 오랜 팬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는 초등학생 때 일본 만화 『거인의 별』을 보고 야구와 사랑에 빠졌다. 중학생 때는 빠른 공을 잘 던지려고 팔과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책으로 배운 커브를 던져보겠다고 담벼락 앞에서 밤새워 투구하기도 했다. 불같은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모두 잘 던졌던 최동원이 소년 김택진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트로피 헌정'은 어색하지 않았다.
NC가 KS 6차전에서 승리하며 통합우승을 확정하자 선수들은 마운드로 달려왔다. 그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환호하는 동안 특별한 우승 트로피가 도착했다. 주장이자 KS 최우수선수인 양의지가 들어 올린 건 공식 트로피가 아니라 '집행검'이었다.
이 트로피는 엔씨소프트의 게임 '리니지'의 최강 아이템 집행검의 실물모형이었다. NC 야구단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게임 아이템을 그라운드에서 홍보하는 건 과도하게 보일 수 있다. 이 세리머니의 아이디어는 박민우가 냈다고 한다. 김택진 구단주의 지시였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엔씨소프트가 야구단을 창단할 때 김택진 구단주가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혔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2020년 NC가 우승하는 과정에서 김택진 구단주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선수들이 마운드 위에서 집행검을 들어 올리거나, 그가 최동원 영전에 트로피를 올리는 의외의 모습을 보고도 팬들은 응원했다. KS가 열리는 날마다 응원 온 구단주여서, 혹은 정치권에서 이름이 거론되는 유명인이어서가 아니다. 야구를 향한 그의 진정성 때문 아닐까.
소년 김택진은 투수보다 수학·과학에 재능이 있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재학 시절 한글과컴퓨터를 공동 창립했다. 졸업 후 현대전자를 다니다 1997년 엔씨소프트를 창업, 이듬해 리니지를 출시했다.
2011년 초 엔씨소프트가 KBO리그 9구단 창단 의향서를 냈을 때 리그 구성원들은 깜짝 놀랐다. 롯데 구단을 비롯해 일부 KBO리그 관계자들은 "연 매출 1조원도 안 되는 회사가 어떻게 야구단을 운영하느냐"고 우려했다. 당시 성장이 정체돼 있던 엔씨소프트 내부에서도 "운영비가 많이 드는 야구단 운영은 비효율적이다. KBO리그 참여는 '재벌 놀음'에 끼어드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고 한다.
지난 2013년 홈 개막경기에서 개막 선언을 하고 있는 김택진 NC 구단주의 모습 김택진 구단주는 물러나지 않았다. "내 개인 재산만으로도 야구단을 100년은 운영할 수 있다"며 창단을 밀어붙였다. 그는 "야구단 운영은 희소성 있고, 훌륭한 기업 마케팅 수단"이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진중한 그가 이렇게까지 드라이브를 걸자 내부 분위기가 바뀌었다.
외부의 평가가 바뀌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NC는 2013년 1군에 진입하자마자 7위를 기록했고, 이듬해 포스트시즌 진출(3위)에 성공했다. 2016년 준우승에 이어 창단 10년, 1군 진입 8년 만에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모기업 엔씨소프트가 그랬듯, NC는 KBO리그에서 가장 빠르고 강하게 성장했다.
김택진 구단주에게 꿈을 심어준『거인의 별』의 주인공 호시 휴마는 근성과 투혼의 상징이다. 지옥훈련을 통해 성공하는 내용은 김택진 구단주의 자수성가 스토리와 닮았다.
20세기의 꿈을 그는 21세기 방식으로 이뤘다. NC는 효율적인 경영, 과학적인 훈련,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을 했다. 이런 팀 문화를 만든 건 김택진 구단주였다.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해서 직접 공을 던지거나, 구단주라고 해서 구단 돈을 쌈짓돈처럼 쓰지 않았다. 야구를 사랑하는 만큼, 정성을 들여 야구단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철저히 '비즈니스적'이었다.
NC가 야구단을 창단할 때 엔씨소프트 주식은 20만~30만원을 오르내렸다. NC가 1군에 진입해 선전하고 있을 때 주식은 10만원대로 내려갔다. 그래도 김택진 구단주는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음지에 있는 게임산업을 건전한 오프라인으로 끌어온 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최근 공개된 '리니지2M' 1주년 기념 광고에 대장장이로 등장한 김택진 구단주. NC 제공 엔씨소프트는 2017년 리니지M 출시로 제2의 성장기를 맞았다. 2018년 말 특급 포수이자 타자인 양의지를 4년 총액 125억원에 영입할 명분과 자금이 만들어졌다. 김택진 구단주는 양의지 영입을 SNS를 통해 직접 알리기도 했다.
지난 겨울에는 리니지2M가 출시됐다. 엔씨소프트가 북미 시장 공략을 앞둔 시점에 NC 야구단이 홍보의 첨병 역할을 맡았다.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 프로스포츠가 중단된 가운데, KBO리그가 5월 개막하면서 NC가 미국의 TV 중계 망을 탄 것이다. NC의 브랜드가 세계로 뻗어 나갔다. 특히 NC와 이니셜이 같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뜨거운 응원이 펼쳐졌다. "국내 대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만큼, 야구단 운영을 통해 얻을 홍보 효과가 더는 없다"는 통설을 보기좋게 뒤집었다.
엔씨소프트의 주식은 10년 전보다 3배 이상(2일 종가 85만9000원) 뛰었다. 엔씨소프트의 코스피 시가 총액은 18위(18조 8585억원)다. NC 야구단은 KS 정상에 올라 집행검을 꺼내 들었다. 외신은 "모든 스포츠 중 최고의 트로피"라고 극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