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연기한 영화를 보고 제가 우네요" 시사회가 끝난 직후 변요한이 전한 소감이다. '자산어보'가 선사한 깊은 여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건 배우 뿐만 아니라 영화를 관람한 현장의 모든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18일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에서는 영화 '자산어보(이준익 감독)' 언론시사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이준익 감독과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이 참석해 영화를 처음 공개한 소감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이준익 감독의 14번째 작품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에 이어 '자산어보'를 흑백 영화로 연출한데 대해 "같은 흑백이지만 '자산어보'는 어둠보다는 밝음, 흑보다는 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동주' 때나 '자산어보'나 모든 인간과 개인은 시대와의 불화를 겪고 있다. 이겨내는 방식은 훨씬 더 다양한데 '자산어보'에는 가거댁이 선물한 애정어린 미소도 있고, 조우진 씨의 그런 캐릭터는 어떻게 나왔나 몰라"라며 "삶을 재미지고 아름답게 이어가는 모습 안에서 흑보다는 백을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극 거장'으로 꼽히기도 하는 이준익 감독은 실화와 허구를 적절히 섞은 역사적 관점에 대해서도 "역사를 공부하거나 정리할 때 근대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긋지 못한다. 사극을 여러 번 찍으면서 궁극에는 '근대성이라는 것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고민했고, 과거의 동학, 서학 심지어 일제강점기도 있었지만 '큰 사건이나 정치, 전쟁사로 시대를 규정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럼 어디서 찾느냐. 개인이다. 개인을 하나씩 찾아내다 보면 집단이 갖고 있는 집단 근대성의 씨앗이 크게 보일 것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자산어보'는 실존인물 정약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대의 설정은 허구로 꾸몄다. "창대는 이름만 있고 행적이 없는 인물이다"고 언급한 이준익 감독은 "역사물을 찍을 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기록을 통해 진실에 도전하는 것이 학자의 길이라면 창작자는 사실과 진실을 통해 허구를 이끌어낼 수 있다. 다만 '합당한 허구를 붙였느냐, 날조를 했느냐'의 차이가 창작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것에 따라 개봉 이후 몇 년간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경우가 있고 찾지 못한 채 흩어져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난 두 가지 다 있다"며 웃더니 "'자산어보'는 10년 뒤쯤 자기 자리를 찾는 영화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다"고 덧붙였다.
이번 영화를 통해 생애 첫 사극 장르에 도전한 설경구는 유배지 흑산도에서 바다 생물에 눈을 뜬 호기심 많은 학자 정약전을 연기했다. 정약전은 성리학 사상을 고수하는 다른 양반들과 달리 열린 사상을 지닌 인물. 민중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어류학서를 집필하기 위해 글 공부를 좋아하는 청년 어부 창대에게 서로가 가진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는 정약전은 여타 사극에서 표현되는 학자 캐릭터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이에 설경구는 천하제일의 인재로 불리던 명망 높은 학자의 진중한 모습과 얼굴에 먹물을 묻힌 채 바다 생물을 탐구하는 소탈한 모습을 넘나들며 그 시대를 고스란히 옮긴 듯 싱크로율 높은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준다. 수염, 상투와 갓, 다양한 소재로 만든 한복 등 외적 비주얼은 물론, 내적 감정까지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배우 설경구의 새로운 매력을 확인하기에도 충분하다.
"정약전이라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연기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했다"고 말한 설경구는 "사극도 처음이라 초반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감독님이 '잘 어울린다'고 용기를 주셔서 그 말을 믿고 했다. 주어진 모든 것을 믿었던 것 같다"며 "섬에 들어갈 땐 '놀자'는 마음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첫 사극을 '자산어보'로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한 시상식에서 감독님을 만나게 됐는데 다짜고짜 '책을 달라'고 했다. 사극을 준비하신다기에 '사극은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했고 '아직 쓰고 있는 과정이라 답은 못 하겠다'고 하시면서 가셨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가 책을 보내주셨다"며 "이준익 감독님이라 선택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이어 "이전에도 사극 장르는 몇 번 제의가 있었을텐데, 사극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랬는지 겁이 나서 그랬는지 미루다 미루다 이제 하게 됐다"며 "나이를 좀 더 먹고 하니까 나름 더 괜찮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자산어보'는 다른 사극과 달리 섬 안에서 촬영을 해 모두가 똘똘 뭉칠 수도 있었다. 재미있고 즐거운 작업이었다. 한번 더 해도 될 것 같다"고 진심을 표했다.
'자산어보'로 인생작, 대표작의 한 획을 긋게 될 변요한은 바다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글 공부에 몰두하는 청년 어부 창대 역을 맡았다. 창대는 나라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 백성을 위한 길이라 믿으며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글 공부를 더욱 중시한다. 유배지 흑산도에 도착한 사학죄인인 정약전을 멀리하려는 고지식한 면모를 보이던 창대는 결국 서로가 가진 지식을 나누자는 ‘정약전’의 제안을 따르게 되면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성장해나간다.
변요한 역시 내외적으로 창대의 모든 것을 습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촬영내내 창대의 변화하는 감정선을 온전히 이해하고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변요한은 직접 전라도 사람들을 만나며 사투리 연습에 매진하고, 수영과 생선 손질 교육을 받는 등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으로 색 없는 흑백 영상 속 변요한만의 색이 빛나는 창대를 완성했다.
시사회가 끝난 후에도 작품에 푹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인 변요한은 "내가 연기를 한 작품인데, 내가 울었다"고 토로해 미소를 자아내는가 하면 "배를 타는 것은 수조 세트장에서 촬영했고 뒤가 CG라 멀미는 없었다. 홍어 해체 등 생선을 만지는 것도 (이)정은 선생님과 훈련, 교육을 미리 받아서 많이 어렵지는 않았다"고 촬영 전후 준비 과정을 담담히 회상하기도 했다.
다만 변요한은 "마을 사람들과 약전 선생님을 바라보는 시선, 그로 인해 변화하는 창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 촬영내내 숙제였다"며 "촬영 전 흑산도 유배지를 직접 다녀왔다. 공부하고 (정약전 선생님을) 뵈려고 미리 갔다 왔었는데, 거기 가는 배가 진짜 힘들다. 영화를 보니까 그 배에 탄 모습이 쓸쓸해 보이더라. 흑산도에 갈 때 내 마음도 진짜 그랬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설경구와 변요한은 이번 작품을 통해 첫 호흡을 맞춘 소감도 표했다. 설경구는 "정약전과 창대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었다. 창대도 나의 스승이자 벗이었고, 약전 역시 마찬가지다"며 "현장에서도 멘티 멘토 같은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섬에서 똘똘 뭉쳐 촬영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이정은 씨가 해주는 밥 얻어 먹으면서 잘 놀았던 것 같다"고 밝혔다.
이에 변요한은 "선배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지만 나는 정말 내가 사랑하는 선배이고, (이번 기회로) 더 사랑하게 됐다. 내가 빈말을 못한다. 진심이다"며 "여러가지로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다. 인생을 아직 덜 산 동생이자 후배로서 보고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많았다. 설명을 하려면 밤 샐 것 같다"고 귀띔해 또 한번 좌중을 폭소케 했다.
'자산어보'의 히든카드이자 분위기 메이커는 단연 믿고보는 일당백 이정은이다. 이정은은 유배 온 정약전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지낼 곳을 내어주는 가거댁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따뜻한 성품과 솔직한 면모는 실제 이정은과도 꼭 어울린다. 정약전 앞에서 수줍은 듯 하지만 해야 할 말은 참지 않고 하는 가거댁은 때때로 당시의 시대적 관점을 벗어난 일침을 던지며 정약전의 유배 생활을 심심할 틈 없게 만든다.
'자산어보'와 가거댁 캐릭터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던 이정은은 촬영 중 대본에 없던 대사까지 제안하며 열의를 보였다는 후문. 뿐만 아니라 이정은은 차진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기 위해 목포와 신안 지역을 자주 방문하고, 전문가에게 직접 어류 손질법까지 배우는 등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이정은이 아니면 상상이 안되는 흑산도 주민 가거댁으로 완벽히 녹아들었다.
이정은은 "역할이 주는 책임감을 알면 연기는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 같다. '자산어보'는 특히 흑백 영상이라 얼굴 표정이 더욱 정확하게 드러난다. 조금만 과하면 이야기를 지나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다"며 "이야기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맡고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워낙 좋은 영화라 더 마음이 쓰였고, 나는 나보다 정약전과 창대의 관계를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알렸다.
극중 정약전과 가거댁은 깜짝 로맨스 아닌 로맨스도 펼친다. 설경구와 이정은은 대학시절부터 절친한 사이로 인연이 남다르기도 하다. "설경구 씨가 군 제대하고 나와 같이 학교를 다녔다. 그땐 이런 관계로 발전할 줄 몰랐다"며 센스 넘치는 입담을 뽐낸 이정은은 "너무 친하니까 '연인 연기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는데, 오히려 친하니까 무엇이든 해보게 되더라. 오붓하게 앉아 기대는 신은 감독님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스스럼없이 여러 것을 해봐서 생각보다 좋은 장면을 얻었다"고 흡족해 했다. 설경구는 "담백하고 깔끔했던 것 같다"고 마무리 해 웃음을 더했다.
'자산어보'의 또 다른 자랑은 수도 없이 등장하는 역대급 우정출연이다. 류승룡을 비롯해 조우진 최원영 강기영 정진영 김의성 김준한 명계남 등 단 한 신도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익숙하고 또 익숙한 배우들이 끝도없이 줄줄이 등장한다. 이는 설경구의 요청이자 아이디어였다고. 이준익 감독은 "원래는 계획에 없었는데 우리 설경구 배우께서 '잠깐 나오는 역할이라도 관객들이 익숙하고 친숙한 배우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더라. 단순히 유명한 배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운을 뗐다.
이준익 감독은 "소재가 상업적이지도 않고, 자산어보 잘 모르겟고, 정약전은 더 모르겠고. 흑산도에서 뭐를 한다는데, 이야기는 좋은 것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조금 더 쉽게 이 영화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배우라는 것이었다. 연출자 입장에서는 '아니 한 신, 두 신 정도 나오고 1회, 2회차 정도 찍어야 하는데 어떤 배우를 써~'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근데 설경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누구 줘봐요. 누구 줘봐요' 하더라. 실제로 시나리오를 건넸더니 놀랍게도 거절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마음이 닿지 않겠느냐'는 마음이 진짜 통했다"며 "나는 대한민국 배우의 수준을 다시금 확인했다. 연기 실력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이 검증 됐는데 '선택의 수준도 증명된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배우들이 그런 작은 역할을 함께 해줬다. 말 그대로 우정출연이다. 조우진 같은 경우는 드문 드문 계속 나와서 조연처럼 보이지 4회 밖에 촬영을 안했다. 모든 배우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거듭 고마움을 어필했다.
마지막으로 이준익 감독은 "정약전과 정약용은 대립이 아닌 차이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창대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 200년 전 일이지만 지금이라고 다른가? 2000년 전이라고 달랐을까? 현대사회 개인주의까지도 자산어보라는 책과, 정약전이라는 인물을 통해 찾아가려고 했다"며 "흑백이지만 나에게는 컬러보다 더 많은 색이 보인다. 색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색을 담고 있는 '자색같은' 영화다"라고 '자산어보'의 정체성과 가치를 명확하게 전달했다.
섬, 사람, 정치, 경제, 산, 바다, 물고기 등 스승과 제자를 넘어 벗이 된 두 남자를 통해 이 시대에서도 관통될만한 이야기를 담아낸 '자산어보'는 31일 관객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