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된 난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령탑 없이 정규리그 우승에 도전하는 흥국생명 얘기다. 구단의 답답한 행정 탓에 피해를 보는 건 선수들이다.
지난 11일 여자 프로배구(V리그) 흥국생명-IBK기업은행전(기업은행)이 열린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엔 5800여명 만원 관중이 들어찼다. 홈팀 흥국생명은 전날(10일)까지 승점 60을 기록, 1위 현대건설에 1점 밀린 채 2위를 지키고 있었다. 이기면 올 시즌 처음으로 단독 1위가 될 수 있었다.
흥국생명은 세트 스코어 1-3으로 처참히 깨졌다. 팀 공격 성공률은 33.54%에 그쳤고, 블로킹도 15개나 허용했다. 에이스 김연경과 외국인 선수 옐레나, 주축 공격수들도 부진했다.
김대경 흥국생명 감독대행은 "바로 전 경기(7일 현대건설) 이후 휴식이 길지 않아서 체력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선수들의) 움직임도 느렸고, 적극성도 부족했다"고 패인을 전했다.
현장에서 이 말을 들은 기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체력 문제를 운운하기엔 흥국생명보다 하루 덜 쉬고 이 경기를 치른 기업은행의 조건이 더 좋지 않았다.
이어진 '승장' 김호철 기업은행 감독의 총평을 들어보자. 김 감독은 "이전과 달리 레프트(아포짓 스파이커)를 고정하지 않은 채 여러 선수에게 번갈아 맡겼고, 상대 공격수에 맞춰 블로커 조합에 변화를 준 게 통했다. 흥국생명 맞춤형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사령탑 지략 대결로 보였다. 김대경 대행은 몇 차례 세터를 바꿨을 뿐 이렇다 할 대처를 하지 못한 것 같다. 뭔가를 했어도 효과가 없었다.
대행의 역량을 탓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는 1988년생 김연경보다 한 살 많은, 초보 지도자다. 한 달 전까지 코치였다.
이런 상황을 자초한 건 구단이다. 흥국생명은 지난달 2일 팀을 잘 이끌던 권순찬 전 감독을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았다"며 경질했다. 권 감독의 입에서 선수 기용을 두고 구단의 개입이 있었다는 말이 나오자, 김여일 단장도 같이 경질하며 '속 보이는' 인사를 단행했다.
사태 진화에 나선 신용준 신임 단장은 지난 5일 취재진 앞에서 "전임 감독과 단장이 선수 기용인 아닌 팀 운영을 두고 의견이 맞지 않았을 뿐, 구단의 개입은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같은 날 김연경이 "선수 기용을 두고 윗선의 개입이 있었다고 느꼈고, 이 때문에 진 경기도 있다"고 폭로하며 이견을 보였다.
김연경은 "회사(구단)에서 원하는 감독은 말을 잘 듣는 감독 같다"라고 했다. 구단이 정한 새 감독을 선수들이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실제로 사태 직후 구단이 내정한 김기중 감독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현 상황이 부담"이라며 감독직을 고사했다.
흥국생명의 '사령탑 구인난'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대행 체제도 마찬가지. 지난 7일, 흥국생명이 한 외국인 감독과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영입 시점은 미정이다.
'구단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흥국생명 지휘봉을 잡을 국내 지도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래도 새 기둥을 세워야 하는 게 프런트의 몫이다. 여의치 않다면, 선수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적임자를 찾기 위해 대화할 필요도 있다. 흥국생명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인 영입도 궁여지책일 뿐이다. 감독 선임에 또 윗선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는 속내도 엿보인다.
신용준 단장은 "우승을 위해 배구단을 운영한다"고 했다. 하지만 선수를 위한 구단의 지원은 없다. 그저 선수들에게만 맡겨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경 대행과 현재 코칭 스태프 노고에 감사 인사를 잊지 않고, 항상 동료들을 독려하는 김연경이 애처롭다. 그는 감독만큼 영향력이 크지만, 코트 위에서 뛰어야 하는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