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 투수 구창모(26·NC 다이노스)는 2017년 11월 16일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17년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일본과의 개막전. 4-1로 앞선 6회 등판한 구창모는 첫 타자 곤도 겐스케(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좌전 안타로 내보낸 뒤 후속 야마카와에게 우월 투런 홈런을 맞았다. 세 번째 타자를 범타 처리해 최종 기록은 3분의 1이닝 2실점. 대표팀은 연장 접전 끝에 7-8로 패했다.
구창모의 국가대표 데뷔전은 '악몽'에 가까웠다. 미국 애리조나 구단 스프링캠프를 소화 중인 그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APBC를 회상하며 "던졌던 공도 다 기억난다. 홈런을 맞은 건 직구(포심 패스트볼)였다"며 "마운드 올라가서 첫 타자한테 2구째 안타, 그다음 초구 홈런을 맞았다. 3구 만에 2점을 내줬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던 거 같다"며 멋쩍게 웃었다.
APBC는 한국과 일본, 대만의 24세 이하 또는 프로 3년 차 이하 선수가 나서는 이벤트성 대회에 가까웠다. 구창모는 KBO리그를 대표하는 영건으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야마카와는 나이나 경력 제한 없이 출전 가능한 와일드카드(최대 3명)로 사무라이 재팬(일본 대표팀)에 합류했다.
출전 제한으로 주축 선수들이 빠진 대회였지만 한일전은 양보가 없었다. 구창모로선 야마카와에게 허용한 홈런의 잔상이 유독 강하게 남았다. 그는 "뭔가 아쉽거나 화가 나는 승부는 기억이 난다. (APBC에선) 중요한 상황에 올라가서 홈런을 맞은 터라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고 곱씹었다.
2018년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일본 야구대표팀 경기에 출전한 야마카와 호타카. 게티이미지
구창모는 APBC 이후 성장했다. 2019년 데뷔 첫 두 자릿수 승리를 따냈고, 지난해에도 11승으로 활약했다. 허리와 왼팔 전완부 피로골절 부상 등으로 2019년 프리미어12, 2021년 도코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지만, 소속팀에선 토종 에이스로 입지를 굳혔다.
구창모는 지난 시즌이 끝난 뒤 NC와 비(非) 자유계약선수(FA) 다년 계약에 합의, 2024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하면 6년 최대 125억원(총 연봉 90억원, 인센티브 35억원), 2024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하지 못하면 6+1년, 최대 132억원을 받는다. WBC는 다년 계약 뒤 나서는 첫 번째 국제대회로 프로야구 안팎의 기대가 크다.
구창모는 "(2017년 APBC 때는) 마운드에 올라가면 긴장을 많이 했다. 내 것이 없었다"며 "지금은 (많은 경기를 소화하면서) 나만의 야구가 생겼다. 그 부분을 잘 활용해서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공교롭게도 야마카와가 이번 WBC 일본 대표에 뽑혔다. 야먀카와는 지난해 홈런 41개를 쏘아 올려 개인 통산 세 번째 퍼시픽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일본 프로야구(NPB) 데뷔 9년 만에 200홈런 고지를 밟은 대표적인 오른손 슬러거다.
한국과 일본은 WBC 1라운드 B조에 속해 3월 10일 도쿄돔에서 숙명의 한일전을 치르게 됐다. 구창모는 "(야마카와가) 이번 WBC 엔트리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만약 만나게 되면 설욕해야 할 거 같다"며 "한일전이 열리면 많은 팬이 야구장에 올 거 같다. (일본보다 전력이 뒤쳐진다는 평가가 있지만) 그런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 그래야 더 짜릿하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구창모는 김광현(SSG 랜더스)과 양현종(KIA 타이거즈)의 뒤를 이을 이른바 '포스트 광현종' 선두주자다. WBC는 그 가능성을 시험받는 무대다. 지난 13일(한국시간) 열린 라이브 피칭에선 투구수 25개로 실전 감각을 점검했다. 그는 "최근 몇 년 간 (부상 때문에) 스프링캠프를 못했는데 좋은 몸 상태로 왔다. 경험도 많이 쌓였다"며 "두 선배(김광현·양현종)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다. 롱런 비결은 물론 어떤 생각을 하며 공을 던지는지 배우고 싶다. 선배가 다가오는 것보다 내가 다가가는 게 더 빠르니까 귀찮게 해야 할 것 같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