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오일뱅크가 소위 말하는 ‘기름집’에서 벗어나 ‘에너지 플랫폼’ 사업자로 기반을 다지고 있다. 전기차를 판매하고, 디지털 아트를 감상하고, 게임 관련 팝업스토어를 방문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여기에 석유화학과 화이트바이오 등으로 신사업을 확대하며 미래 경쟁력을 갈고 닦고 있다.
주유소의 변신, ‘에너지 플랫폼’ 비전
23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오일뱅크는 기존 주유소 역할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도를 하며 주목받고 있다. 우선 지난 연말 국내 최초로 게임 테마를 적용한 주유소를 선보여 신선하다는 반응을 얻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넥슨·피치스는 서울 소재 한남동 주유소에 인기 게임 ‘카트라이더’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파츠 오일뱅크'를 열어 젊은 세대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존 주유 공간에 게임 조형물, 그래피티 아트, 팝업스토어가 어우러진 복합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카트라이더 인기 캐릭터 '배찌'와 조형물, 모형차 등을 설치했으며 주유소 지붕에는 반응형 LED를 설치해 차량 진입 시 다양한 홍보 영상이 나오도록 했다. 여기에 팝업스토어를 설치해 굿즈를 구입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고객들은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것 외에도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 덜 지루하다”는 반응이다.
주영민 대표가 이끄는 현대오일뱅크는 에너지 플랫폼 기반을 닦기 위해 ‘파츠 오일뱅크’ 브랜드 확장을 준비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아직 1호점만 있지만 고객들의 반응이 좋아 향후 넥슨과 지속적인 제휴를 통해 2호점, 드라이브 스루, 세차 등 연계 사업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사당셀프주유소는 디지털 아트 갤러리로 변신하기도 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주유소에 옥외형 LED 디스플레이를 설치하고 디지털 작품을 전시했다. 디지털아트 플랫폼 ‘세번째 공간’과의 제휴를 통해 100여 점의 디지털작품을 재생하는 등 고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강릉의 샘터주유소는 캠핑족들의 ‘성지’로 떠올랐다. 현대오일뱅크는 주유소에 캠핑카의 오폐수를 처리하고 깨끗한 물로 채우는 시설인 ‘덤프스테이션’을 오픈하기도 했다.
현대오일뱅크에서는 전기차를 구매할 수도 있다. 서울, 울산, 인천 등 5개 직영주유소에 초소형 전기차인 ‘쎄보C’를 전시하고 있다. 주유소에 전시된 차량은 누구나 자유롭게 둘러보고 탑승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대오일뱅크는 온라인 판매중개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아니지만 초소형 전기차 시장에 선제적으로 진출해 미래 판매채널을 선점한다는 전략이다.
현대오일뱅크는 2020년 SK네트웍스의 302개 주유소를 인수하면서 ‘에너지 플랫폼’ 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인수를 통해 주유소 개수가 2515개로 업계 2위로 올라섰다. 직접 운영하는 직영 주유소는 470개로 정유사 중 가장 많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인수를 통해 수도권에 많은 직영 주유소를 확보하게 됐다”며 “수도권의 주요 요지에 직영 주유소를 늘리는 등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면서 미래 플랫폼 사업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석유화학, 화이트바이오로 신사업 다각화
주력인 정유에서 벗어나 석유화학과 화이트바이오로 신사업을 확대하고 있기도 하다. 미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정유 의존도를 낮추는 게 급선무다. 넷제로(탄소 순배출0) 흐름 속에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석유화학 공정과 친환경 소재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중질유 기반 석유화학설비인 HPC 공장을 세우며 친환경 화학소재 사업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롯데케미칼과의 협력해 합작사인 현대케미칼을 설립했고, 지난해 충남 서산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에서 HPC 준공식을 열었다.
HPC 프로젝트는 3조원이 넘는 비용을 투자한 초대형 석유화학 신사업이다. HPC 공장은 나프타와 LPG 원료를 활용하는 기존 석유화학공장과 달리 저가 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특히 저가의 탈황 중질유를 원료로 사용할 수 있는 석유화학 공정은 국내에서 HPC 공장이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는 글로벌 석유메이저 기업 셸에 이어 두 번째다. HPC 공장은 연간 85만t의 에틸렌과 50만t의 프로필렌을 생산할 수 있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정유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보통 다시 정유 공정에 활용한다”며 “하지만 HPC 공장에서는 이런 부산물을 플라스틱 원료로 사용하는 기술로 가격 경쟁력을 끌어올렸다”고 했다.
현대오일뱅크뿐 아니라 다른 정유사들도 석유화학으로 사업을 확대하는 추세다. 에쓰오일은 2026년까지 9조2580억원을 들여 울산에 세계 최대 규모 정유·석유화학 '스팀 크래커'(기초유분 생산설비)를 구축하게 된다.
GS칼텍스는 지난해 전남 여수에 2조7000억원을 투자한 올레핀 생산시설을 마련했다. SK에너지의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은 친환경 에너지 회사로 발돋움하기 위해 울산콤플렉스에 2027년까지 약 5조원을 투자한다. 2050년 넷제로 달성을 위해 폐플라스틱 재활용 클러스터 조성과 설비 전환 및 증설을 통한 친환경제품 확대에 나설 계획이다.
현대오일뱅크는 화이트 바이오 사업도 본격 추진하고 있다. 기존 바이오 사업과는 달리 기름찌꺼기, 폐식용유 등 비식용 자원을 원료로 하는 사업이다. 화이트 바이오 로드맵에 따라 올해 대산공장 부지에 13만t 규모 차세대 바이오디젤 제조공장을 건설한다. 2024년까지는 대산공장 내 일부 설비를 연산 50만t 규모의 수소화 식물성 오일(HVO) 생산설비로 전환할 예정이다.
이후 HVO를 활용해 차세대 바이오 항공유를 생산해 글로벌 시장 개척에 나선다. 이어 화이트 바이오 부산물을 활용한 바이오 케미칼 사업 등의 추진으로 2030년까지 연간 100만t에 달하는 '화이트 바이오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매출 규모 크지만 번번이 실패한 상장 숙제
HD현대 그룹에서 현대오일뱅크의 매출은 절대적이다. HD현대는 지난해 매출 60조8497억원을 기록했고, 이중 현대오일뱅크의 매출이 34조9550억원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는 HD현대가 자랑하는 조선업 매출 규모 17조3020억원의 두 배에 달한다.
또 2022년 현대오일뱅크의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 2조7898억원과 1조6327억원으로 전년보다 각 155.1%, 232.5% 증가했다.
현대오일뱅크가 최대 실적을 올리는 등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지만 상장 숙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지난해 상장을 위한 세 번째 도전도 주식시장 침체 등으로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철회했다. 당초 계획으로는 시가총액 15조원 규모로 지난해 10~11월쯤 상장한다는 계획이었다.
현대오일뱅크는 상장 숙제를 해결해야만 석유화학과 화이트 바이오 등 미래사업 추진에 속도를 낼 수 있다.
현대오일뱅크 측은 “상장 재추진과 관련해서 현재 어떠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고 있다”며 “그러나 미래사업에 대한 투자 및 재무구조 개선 노력은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