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경기 37골 9도움. 기록만 보면 40년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히기에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고(故) 유상철이 베스트11에 뽑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 투표에 참여한 10인 중 8인이 유상철에게 표를 던졌다.
유상철은 ‘멀티 플레이어’의 대명사다.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했다. 한 포지션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여느 멀티 플레이어와는 달랐다. 유상철은 최종 수비수부터 최전방 공격수까지 어느 위치에 세워도 톱급 활약을 펼쳤다.
기록이 증명한다. 1994년 수비수 부문 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된 유상철은 4년 뒤 미드필더 부문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렸다. 2002년에는 리그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뽑혔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린 그는 1998년 리그 23경기에 나서 15골(3도움)을 몰아치며 득점왕까지 차지했다.
모든 포지션에서 두각을 드러낸 유상철은 미드필더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문선 전 해설위원은 “유상철은 한국에서 가장 뛰어났던 수비형 미드필더”라고 했다. 서형욱 MBC 해설위원 역시 “감독이 요구하는 위치에서 늘 최상의 역할을 했다”면서도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굉장한 존재감을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유상철은 그야말로 다재다능했다. 여러 위치에서 뛸 수 있던 배경이다. 그는 빼어난 킥력, 몸싸움, 패스, 슈팅 등 능력치가 고르게 발달했다. 강인한 체력과 투쟁심도 갖췄다. 또한 신장이 1m 84cm인 유상철은 당시 장신 축에 속해 제공권 싸움에도 능했다. 최종 수비, 최전방 공격수로도 돋보일 수 있었던 큰 이유다.
현역 시절 울산 현대,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은 현영민 현대고 감독은 최근 본지를 통해 “유상철 선배의 기량이 뛰어나다 보니 같이 그라운드에 있으면 많이 의지했고 힘이 됐다. 카리스마 있는 모습도 있었고, 그라운드 밖에서도 팀원들을 편안하게 끌어주셨다”고 기억했다.
울산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유상철은 1999년 요코하마 마리노스(일본)로 이적, 가시와 레이솔을 거쳐 다시 K리그에 복귀했다. 2002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 월드컵을 마친 후 ‘친정’ 울산에 돌아온 유상철은 훨훨 날았다. 당시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리그 8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하는 등 뜨거운 발끝을 자랑했다. 그 덕에 울산은 막판까지 성남 일화와 우승 경쟁을 벌이며 시즌을 2위로 마감할 수 있었다.
그때를 떠올린 현영민 감독은 “울산이 2002년에 8연승을 달렸을 때가 있다. 당시 유상철 선배가 최전방, 이천수가 윙 포워드에 있어서 크로스에 이은 득점이 자주 나왔다. 울산이 마지막까지 우승을 다툴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그때 모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다. 유상철 선배가 경기에 나갈 때면 득점하곤 했다. 스트라이커 포지션에서 해결사 역할을 잘해줬다”고 전했다.
축구에 있어서는 만능인 유상철은 감독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상급 기량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포지션, 전술 이해도도 빼어났다. 당연히 함께 호흡하는 팀원들에게도 힘이 됐다. 현영민 감독은 “유상철 선배는 편안함을 많이 주는 그라운드 위의 정신적 지주였다”며 엄지를 세웠다.
울산에서만 총 9년간 활약한 유상철은 리그 우승 2회(1996·2005)를 맛봤다. 경쟁자보다 출전 등 기록에서 뒤처질 수 있지만, 매 시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멀티 플레이어로서의 상징성도 단연 압도적이다. 은퇴 후에는 왼쪽 눈이 거의 실명된 상태로 뛰었다고 고백했고, 선수 시절 남긴 자취는 더욱 빛났다.
40년 역사상 베스트11에 뽑힐 자격은 충분했다. 현영민 감독은 “K리그 역사에 뜻깊은 상을 받게 돼서 하늘나라에서도 ‘선수 생활을 정말 잘했구나’, ‘나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많구나’ 하며 되게 좋아하실 것 같다”고 했다.
2006년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접은 유상철은 2011년 대전 시티즌 지휘봉을 잡으며 프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울산대를 거쳐 전남 드래곤즈, 인천 유나이티드 사령탑을 맡았다. 2019년 10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은 유상철은 시즌 끝까지 인천을 이끌고 극적인 잔류를 이뤄 큰 울림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