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요미우리신문의 사주였던 쇼리키 마쓰다로(正力松太郎, 1885~1969)가 생전에 남긴 3훈(訓) 중 하나가 ‘미국을 따라잡고 추월하라’였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기치는 ‘서양 따라잡기’였다.
일본 야구 발전을 위해 마쓰다로는 메이저리그(MLB) 올스타의 방일을 추진했다. 1931년 첫 대회가 열렸고, 1934년 2차 방일에는 베이브 루스도 참가했다. 첫 대회에서 0승 17패, 2회 대회 때 1승 17패를 당한 일본은 더 간절하게 미국을 이기고 싶어 했다. MLB 올스타와 대결했던 대일본야구구락부(클럽)는 2년 뒤 도쿄 교진군(현 요미우리 자이언츠)이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일본프로야구(NPB)가 태동했다.
일본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한 뒤 크게 침체했다. 원폭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시민을 위해 1945년 시민구단 히로시마도요 카프가 창단했다.
이후 일본은 조금씩, 조용히 사회‧경제적 힘을 키웠다. 1960년대 ‘아시아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와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가 이끄는 ‘ON 타선’은 요미우리, 아니 일본의 자부심이었다.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라는 야구가 일본의 국기(國技)가 된 배경이다.
일본은 특유의 장인정신을 야구에 녹였다. 집요할 만큼의 정확하고, 세밀했다.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약점을 파고드는 일본 야구는 한국보다 늘 앞섰다. 1990년대 후반 노모 히데오, 2000년 초반 스즈키 이치로가 MLB에 진출하면서 일본은 더 큰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일본 톱클래스 선수들은 미국에서도 통한다는 신뢰가 생겼다. 급기야 2006년 초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2009년 WBC에서 일본이 우승하자 그들은 세계 제일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여기까지는 일본 내에서 퍼진 메아리였다. 2013년과 2017년 WBC에서 일본은 4강까지만 갔다.
제5회 WBC에서 일본은 당시와 또 다르다. 이치로와 마쓰자케 다이스케 등 기교파 선수들이 주축이었던 과거와 달리 2023년 ‘사무라이 재팬’은 압도적인 힘을 과시했다. 2006년, 2009년과 달리 한국과 접전을 벌이지도 않았고 4전 전승으로 8강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오타니 쇼헤이, 사사키 로키 등의 파워는 경이적이었다. 이미 MLB에서 100년 묵은 루스의 투‧타 여러 기록을 깨버린 오타니는 2021년 투수로서 9승, 타자로서 46홈런을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MVP)에 올랐다. 지난해에는 홈런이 34개로 줄었지만, 투수로서 15승 평균자책점 2.33을 기록했다. MLB에서도 최고 스타가 된 오타니도 최고의 컨디션으로 WBC에 참가하고 있다.
22세 사사키 로키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빠른 패스트볼(시속 164㎞)을 던지는 투수로 성장했다. 지난 11일 체코전 피칭을 보면 당장 미국에서도 통할 수 있어 보였다.
힘센 거인만 있는 게 아니다. 야마모토 요시노부는 일본 특유의 정확하고 현란한 피칭을 뽐냈다. 일본 최고의 외야수 요시다 마사타카는 작은 체격(1m73㎝)인데도 지난겨울 보스턴 레드삭스와 5년 9000만 달러(1200억원)에 계약했다. 정교함을 바탕으로 한 파워의 향상이 2023년 일본 대표팀을 진짜 ‘세계 제일’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마쓰다로의 유훈을 품은 요미우리의 홈구장 도쿄돔은 ‘일본 야구의 심장’이라 불린다. 거기서 치른 WBC 1라운드 4경기에서 일본 대표팀은 강력한 파워를 보여줬다. 지난 10일 일본에 4-13으로 대패한 한국에는 치욕의 무대이기도 하다.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스타이자 MLB에서도 활약한 후쿠도메 고스케(TBS 해설위원)는 12일 기자를 만나 “최근 일본 선수들의 힘과 체격이 향상됐다. 탄탄한 기본기 위에서 웨이트트레이닝과 식단 관리를 통해 파워를 만들었다. 이제 일본은 미국의 경쟁 상대가 된 것 같다. (일본) 후배들이 정말 잘하는 것 같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일본 고시엔 대회에 참가하는 고교 야구팀만 해도 3600여 개에 이른다. 한 세기 전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마쓰다로의 꿈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일본 선수들은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일본 야구가 미국에서도 통한다”는 평가에 만족하지 않고 ‘힘으로 미국과 맞서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한국 대표팀에서 가장 뛰어난 타격을 보여준 이정후도 “(일본전에서)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공을 쳤다. 확실히 KBO리그에서는 보지 못했던 공이었다”고 토로했다. 일본 야구가 미국 야구를 추격하는 사이 한국 야구는 그만큼 뒤처졌다. 아니, 한참 뒷걸음질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