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보아가 지난 12일 개최된 단독 콘서트 ‘뮤지컬리티’(Musicality)에서 한 말이다.
2000년에 데뷔해 올해 데뷔 23주년을 맞았지만, 보아는 여전히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역 가수임과 동시에 1980~90년대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해준 전설인 보아는 한때 ‘아시아의 별’로 불리며 K팝 한류의 확산에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보아는 지금의 후배 가수들이 해외로 뻗아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며 K팝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손꼽힌다. ‘한류의 개척자’라는 수식어도 전혀 과하지 않은 가수가 보아다.
◇ ‘아이디;피스 비’로 혜성처럼 등장
보아는 1998년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에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세계시장을 겨냥한 여가수’란 목표를 가지고 본격적인 데뷔 준비에 돌입했다. SM도 보아의 데뷔에 심혈을 기울였다. 투자금만 무려 30억원에 달할 정도였다. 그 만큼 보컬과 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았다.
마침내 보아는 2000년 8월 ‘아이디 ; 피스 비’로 가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데뷔 당시 만 13살이었다. 보아는 H.O.T., 지오디, 신화 등 아이돌 그룹이 대세를 이루던 당시 가요계에 ‘춤추는 13살 소녀’라 불리며 솔로 가수로 당당히 등장했다. 특히 여자 가수에겐 청순하고 예쁜 이미지가 요구됐던 시절에 보아는 작곡가 유영진의 SMP(SM 뮤직 퍼포먼스)를 파격적으로 소화하며 가요계에 거센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해 각종 신인상을 휩쓸었던 보아는 데뷔 2년만인 2002년, 2집 앨범 ‘넘버 원’으로 사상 최연소 나이로 가요대상을 거머쥐었다. 이때 보아의 나이는 고작 15살이었다.
◇ 본격적인 일본 활동…오리콘 차트 1위
2001년 보아는 당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의 음악시장이었던 일본으로 건너갔다. 데뷔 앨범은 큰 반응이 오지 않았지만, 이듬해 보아의 첫 정규앨범 ‘리슨 투 마이 하트’는 한국 가수 최초로 오리콘 일간, 주간 앨범 차트 1위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려 밀리언 셀러에 등극했으며 보아는 일본 최고의 가수들만 출연할 수 있다는 연말 음악 축제 NHK ‘홍백가합전’에 총 6년(2002~2007) 간 연속 출연했다. 이어 일본 레코드 대상 3년 연속 ‘금상’ 수상(2002~2004) 등의 활약을 이어가며 순식간에 J팝 시장을 점령했다.
당시 국내 가수들의 일본 활동이 흔치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보아의 ‘오리콘 차트 1위’ 소식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MBC 9시 뉴스에서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보아가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습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아직 10대였던 보아는 SM을 책임질 정도로 영향력이 커지면서 ‘소녀가장’,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걸크러시’ 만들어낸 보아, 미국 진출까지
보아의 도전은 계속된다. 2003년 발매한 ‘아틀란티스 소녀’로 깜찍하고 상큼한 매력을 뽐냈던 그는 2004년 돌연 ‘마이네임’으로 강렬하고 보이시한 콘셉트에 도전하더니 이듬해엔 ‘걸스온탑’으로 파격적인 ‘걸크러시’ 콘셉트를 창조해냈다. ‘걸스온탑’의 “모든 게 나에게 여자다운 것을 강요해”라는 가사에서 알 수 있듯 보아는 당당한 여성상의 정석을 보여주는 메시지를 전하며 국내에서 인기몰이를 이어왔다.
이후 2009년 미국에 진출한 보아는 정규 1집 ‘보아’로 빌보드200 127위에 올랐고, 이후 발매된 ‘잇유업’은 빌보드 핫댄스 플레이차트 8위를 기록했다. 그 뒤에 나온 앨범들도 20위 안으로 들어오며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후 다시 국내로 컴백한 보아는 ‘허리케인 비너스’와 ‘온리 원’으로 음원차트 1위를 하며 5년 만의 공백기에도 여전한 인기를 입증했다.
김헌식 대중문화 평론가는 보아를 ‘해외 진출을 위한 전략적 기획 아이돌의 1호’라고 평가하며 “보아가 성공함으로써 동방신기, 슈퍼주니어와 같이 해외를 겨냥한 아이돌이 나올 수 있었다. K팝의 해외 진출에서 보아는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