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오래 ‘연진아’를 외쳐주셨으면 좋겠어요. ‘연진아’가 없어지면 아쉬울 것 같거든요. 앞으로도 작품 주어질 때마다 제 집요함과 도전 정신으로 열정 있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배우 임지연에게 ‘더 글로리’는 ‘영광’의 작품으로 남았다. 최선을 다해 그려낸 박연진은 그가 원했듯 시청자들에게 분노를 사고 미움을 받는 데 성공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지만, 그걸 쟁취하고 내 것으로 만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임지연은 해냈다. 박연진을 만난 임지연에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17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 임지연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임지연은 박연진 캐릭터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받은 소감, 연기자로서 걸어온 길 등을 떠올리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더 글로리’는 유년 시절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한 여자가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와 그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지난해 말 공개된 파트1에 이어 지난 10일 파트2 전편이 공개됐다.
17일(한국시간) 글로벌 OTT 플랫폼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더 글로리’는 전 세계 TV쇼 부문 1위에 올랐다. 13일 처음으로 같은 부문 1위에 오른 뒤 5일째 같은 자리를 지키며 흥행을 이었다. 19일 현재는 2위에 랭크됐다.
“‘더 글로리’는 한 번에 찍었어요. 파트1 찍을 때부터 작품이 잘될 거라는 기대와 확신은 있었죠. 그래도 이 정도로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어요. 제대로 된 복수가 파트2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싶었죠.”
임지연에게 ‘더 글로리’는 황금 같은 소중한 기회였다. 그는 “악역은 항상 하고 싶었는데 (작품이 들어올 거라는) 기대가 크지 않았다. 마흔 살 넘고 선배들처럼 내공 쌓이면 ‘그때는 제대로 된 악역이 들어오지 않을까?’ 했다”며 “어느 순간부터는 내려놨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임지연은 ‘더 글로리’ 대본이 들어온 순간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고 토로했다. 임지연은 “마침 너무 좋은 작품이 들어왔고 연진이가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욕심이 많이 생겼고 당연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나만의 제대로 된 악역을 구현해보자 싶었다”고 전했다.
임지연은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송혜교)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학폭 가해자 박연진을 연기하며 역대급 변신을 선보였다. 김은숙 작가가 임지연을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작가님이 내가 ‘천사 같은 얼굴에 악마 같은 심장’이 있을 거 같다고 하셨다. ‘악역을 안 해봤어? 그러면 내가 망쳐보지’라고 하셨다”며 “나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가능성을 봐주신 것 같아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생애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다는 임지연. 그는 박연진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화를 주려 했다. 동료 배우들과 선배들에게 물어가며 정답을 찾고자 했다.
“최대한 다양한 방법으로 생각했어요. 결국 찾아낸 게 나만이 할 수 있는 악역을 만들어보자는 거였죠. 잘 소화해낼 수 있는 화려한 패션들, 몸짓, 걸음걸이, 표정, 말투 등 최대한 잘 만들어보려고 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쁜 역이 돼보자고 다짐했죠.”
이제는 가족들도, 친구들도, 심지어 전 세계 시청자들 모두 “연진아”라고 그를 부른다. 임지연은 “주변에서도 이름 바꾸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더 많이 불러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특히 “저희 엄마도 ‘연진아, 언제 들어오니’ ‘연진아, 찌개 끓여놨어’라고 보내시더라. 캐릭터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더 글로리’는 앞서 김 작가가 예고했던 것과 같이 용서 없는 엔딩이었다. 윤소희(이소이)와 문동은, 손명오(김건우)에게 악행을 저질렀던 박연진은 결국 교도소에서 죗값을 치르게 됐다.
“그 장면은 몇 달을 고민하고 준비했어요. ‘연진이의 끝은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 연진이는 제대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되돌려 받은 거라 생각해요. 미쳐서 정신병에 걸린 건 아니에요. 같은 방 범죄자들한테 가해를 받는 거죠. 사실 그 장면은 많이 울었어요. 그래도 연진으로 반년 이상 살다 보니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무너지더라고요.”
‘더 글로리’에서 임지연의 흡연, 욕설 연기는 단연 눈길을 끌었다. “어색하게 할 바에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임지연은 “연진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잘 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트레이드 마크 같은 치켜 올라간 눈썹이나 입꼬리에 대해서도 “‘내가 저런 표정을 많이 짓는구나’ 했다”며 “원래 입도 크고 눈썹이 짙은 편이라 잘 어울렸던 것 같다”고 웃었다.
송혜교와 맞붙는 신에서는 밀리지 않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문동은이 예솔이 담임으로 왔다는 걸 알게 된 뒤 대면하는 신이 첫 촬영이었다”며 “걱정이 많았는데 기에 밀리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회상했다.
임지연은 “그때 연진이가 불안함이 있어야 더 통쾌할 거라고 생각해서 감독님과 많은 상의를 했는데, 장면을 잘 만들어주신 것 같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임지연은 극 중 남편 하도영(정성일)과의 관계를 그려내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예쁜 아기 낳아서 살아가는 게 연진이의 인생 계획이었다”며 “그런데 어느 순간 남편을 사랑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원하는 걸 다 해주던 남편이 동은이와 만나고, 점점 냉정해지는 걸 보면서 자존심이 무너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임지연에게 연기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은 무엇일까. 그는 곧바로 데뷔작인 영화 ‘인간중독’(2014)을 떠올렸다. “가장 애착 있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작품이죠. 운이 좋게 큰 상업 영화로 데뷔했어요. 그러다 보니 현장 경험은 없었고 많이 혼나기도, 울기도 했어요. 한 작품씩 해나가면서 많이 배워나갔죠. 최근 ‘종이의 집’과 ‘장미맨션’도 너무 소중하고 큰 배움을 준 작품들이에요.”
임지연에게 ‘더 글로리’는 가장 큰 용기와 도전이었다. 처음 맡아보는 캐릭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용기가 필요했다. 그는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미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전했다. 임지연은 “어떤 작품이나 캐릭터를 맡으면 시청자들에게 사랑이나 공감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미움을 받아보자 싶더라. 미움받을 노력을 갖고 캐릭터를 만든 적은 처음이라 성취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더 글로리’로 가능성을 보여준 임지연. 그는 사실 앞서 해왔던 작품들 역시 박연진 캐릭터를 준비하듯 해왔다고 털어놨다.
“저는 항상 절실했고 노력했어요. 옆에서 본 가족들, 친구들은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니까 보고 많이 울었대요. 저는 타고난 배우가 아니니까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그걸 알아준 가족들, 시청자들이 고맙고 칭찬해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해요. 항상 이런 마음으로 연기하고 싶어요.”
임지연의 차기작은 드라마 ‘마당 있는 집’이다. 김태희와 함께하는 이 작품은 벌써 촬영도 마쳤다. 그는 “보시는 분들이 ‘더 글로리’ 박연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 같다.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여자를 연기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임지연한테 이런 얼굴도 있구나’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를 연진이를 통해 보여드린 것 같은데 다음 작품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