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문 한 장 낭독이 전부였다.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모두를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조차 없었다. 승부조작 사범 등에게 면죄부를 주려다 혼쭐이 난 대한축구협회(KFA)와 정몽규(61) 회장은 뒷수습마저도 혀를 차게 했다.
KFA는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임시 이사회를 열고 축구인 100명의 대규모 사면 결정을 전면 철회키로 했다. 우루과이와 A매치를 앞두고 열린 이사회를 통해 기습적으로 사면을 발표한 지 사흘 만이다. 임시 이사회는 40분 만에 철회 결론을 내렸다. 치열한 논의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애초에 황당한 사안이었다는 반증이었다.
앞서 KFA는 각종 비위 행위로 징계를 받았던 전·현직 선수와 지도자, 심판 등 100명을 사면한다고 기습 발표했다. 월드컵 10회 연속 진출과 카타르 월드컵 16강 자축, 축구계 화합과 새 출발을 사면 근거로 내걸었다.
100명 중 절반에 가까운 48명은 지난 2011년 한국 축구 근간을 흔들었던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범들이었다. 한국 축구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K리그 팬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줬던 이들 대부분에게 KFA가 스스로 면죄부를 주려는 꼴이 됐다. 나머지 52명은 누구인지, 징계 사유는 무엇인지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축구계 분노는 들끓었다. K리그 서포터스는 물론 붉은악마도 성명 등을 통해 비판 의견을 냈다. 온라인에서도 KFA를 향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홈페이지를 통해 친절하게 Q&A 콘텐츠까지 제작해 사면을 강행하려던 KFA는 결국 들끓는 분노에 사흘 만에 이사회 결정을 철회하는 ‘촌극’을 벌였다.
정몽규 회장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임시 이사회를 마친 뒤 직접 입장문을 읽어 내려갔다. 정 회장은 “2년여 전부터 ‘10년 이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충분히 반성을 했고, 값을 어느 정도는 치렀으니 이제는 관용을 베푸는 게 어떻겠느냐’는 일선 축구인의 건의를 계속 받았다”며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평생 징계 상태에 묶여 있도록 하기보다는 이제는 예방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계몽과 교육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몽규 회장은 이어 “카타르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가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시점에 승부조작 가담자를 비롯한 징계 대상자들이 지난날 저질렀던 과오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봉사할 기회를 주는 것도 한국 축구의 수장으로서 할 수 있는 소임이라고 여겼다”며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사려 깊지 못했다. 승부조작 사건으로 인해 축구인과 팬들이 받았던 그 엄청난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한층 엄격해진 도덕 기준과 함께, 공명정대한 그라운드를 바라는 팬들의 높아진 눈높이도 감안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정몽규 회장은 다만 취재진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입장문만 읽고 자리를 떴다. 한국 축구 역사에 남을 희대의 촌극의 끝엔, 정 회장이 읽어 내려간 입장문 한 장만 달랑 남은 셈이다.
정몽규 회장은 물론 승부조작 사범 등의 사면을 추진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주도했던 그 누구도 책임 있는 행동을 약속하지 않았다. 기습적으로까지 사면하려 했던 100명은 누구인지도 베일에 가려졌다. 관용을 베풀라며 KFA 수뇌부에 꾸준히 사면을 요구했다던 축구인들, K리그 승부조작 당시 선수로 뛰었거나 당시 축구계에 몸담고도 사면안에 침묵을 지킨 것으로 전해진 임원들은 정 회장과 KFA 뒤에 쏙 숨었다. 한국 축구를 또 다른 위기에 내몰 뻔한 결정을 내리고도, 아무런 책임이나 설명 없이 사과문으로 모든 걸 덮어버리겠다는 게 KFA의 구상이었던 것이다.
사면 전면 철회가 결정된 뒤에도 K리그 경기장에 KFA를 향한 비난 여론이 거셌던 건 이번 사태가 결코 사과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K리그 각 구단 서포터스들은 사면 철회가 결정된 뒤에도 ‘피눈물은 팬들이, 사면은 (정)몽규가’, ‘책임자 사퇴, 축협 쇄신 촉구’, ‘승부조작 死(사)면, 꺼진 암도 다시 보는 KFA’, ‘팬들은 개돼지가 아니다’ 등 안티 배너들을 내걸었다. 한 K리그 구단 서포터스 회장은 “사면 철회는 당연한 일이고, 이를 결정한 이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