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페디는 홈런을 치고 들어온 동료 선수들을 직접 카메라로 찍어 보드판에 붙이고 있다. 그가 얼마나 팀에 녹아들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화 중 하나다. NC 다이노스 제공
기량만큼 중요한 건 '적응력'이다. 외국인 투수 에릭 페디(30·NC 다이노스)가 성공시대를 활짝 열었다.
페디는 올 시즌 프로야구에서 가장 강력한 선발 투수다. 시즌 첫 9번의 선발 등판에서 무려 7승(1패)을 쓸어 담아 다승 단독 선두. 세부 지표도 흠잡을 곳이 없다. 평균자책점(1.63)과 이닝당 출루허용(WHIP·0.99) 모두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9이닝당 탈삼진은 11.55개로 지난해 탈삼진왕 안우진(키움 히어로즈·11.46개)에 앞선 1위다.
계약 당시 기대한 모습 그대로다. 페디는 2017년부터 6년 연속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활약했다. 2021년과 2022년에는 선발 투수로 각각 27경기 이상 등판, 매년 127이닝 이상을 책임졌다. 에이전트마저 빅리그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보라스 코퍼레이션. NC는 페디에게 계약금 20만 달러, 연봉 80만 달러를 안겼다. 신규 외국인 선수가 받을 수 있는 상한액(100만 달러·13억원)을 꽉 채웠다. 말 그대로 '현역 빅리거'를 데려왔으니, 영입이 발표됐을 때부터 '거물'이라는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었다.
그런데 한편에선 우려 섞인 시선도 있었다. 한국야구 역사상 빼어난 경력에도 불구하고 적응에 실패했던 외국인 선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4년 루크 스캇(당시 SK 와이번스)이 대표적이다. 빅리그 통산 홈런이 135개인 스캇은 영입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시즌 중 선수기용 방법과 2군행 통보 등에 불만을 품고 이만수 당시 SK 감독을 향해 "거짓말쟁이(liar)" "겁쟁이(coward)"라고 말하면서 항명하는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했다. 한국야구를 향한 존중의 자세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SK와 스캇의 동행은 개막 3개월여가 지난 7월에 막을 내렸다.
최근 구단 유튜브에서 맛깔나는 사투리를 보여준 에릭 페디. NC 다이노스 유튜브 캡처
NC도 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 2019년 영입한 외국인 투수 에디 버틀러가 경기 중 투구 후 글러브를 집어 던지고 발로 차는 추태 끝에 퇴출당한 것이다. 버틀러는 2012년 MLB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출신으로 계약 당시 팀 안팎의 기대가 컸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그만큼 선수가 어떤 마인드를 가졌느냐도 KBO리그 안착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 변수다.
이런 면에서 페디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마운드 위에선 변형 슬라이더의 일종인 '스위퍼'를 앞세워 타자를 압도한다. 구위와 제구 모두 일품. 그런데 더그아웃 뒤에서도 무척이나 팀에 잘 녹아들고 있다. 빅리그 출신의 자존심을 내려놨다. 김수경 NC 투수 코치는 "야구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데이터팀의 전력분석 정보나 코치들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잘 받아들이려 한다"며 "선수들과 융화는 물론 한국 문화 적응에도 노력하는 모습이다. 팀을 먼저 생각하면서 튀는 행동을 하지 않고 팀원들과 함께 가려고 하는 모습도 대단한 것 같다"고 칭찬했다.
지난 18일 구단 공식 유튜브에는 흥미로운 영상이 하나 업로드 됐다. 페디가 SSG 랜더스와 홈 경기가 우천 순연됐다는 내용을 마산 사투리로 팬들에게 전달하는 장면이었다. 구단 관계자는 "구단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며 "페디는 한국 문화와 프로야구에 대한 존중의 자세가 있다. 상대 선수를 존중하는 것도 옆에서 지켜보면 바로 알 정도다. 이런 걸 바탕으로 팀에 잘 녹아들고 한국야구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