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2년생이다. 경남 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 옛날 생각이 또렷해진다는데, 요즘 내가 그렇다. 나이가 더 먹으면 기억도 사라질 듯하여 생각나는 대로 이 지면에다 기록해두고자 한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돈이 없었다는 뜻만은 아니다. 구멍가게에서 아이들이 사먹을 수 있는 게 사탕 정도밖에 없었다. 어시장에는 먹을 것이 많았다. 어린 나는 어시장에 어머니를 홀로 보내드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치마를 부여잡고 울고불고 했다. 시장에 가면 무엇 하나라도 입에 넣을 주전부리가 주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하는 짓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늘 단호하지 못했고,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어시장 바닥은 진창이었다. 진 데를 피하려니 눈은 아래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내 눈에 드는 것은 어른들의 다리와 진창길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기쁜 마음에 총총총 걸었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치기도 했다. 어른들은 바빠서 길 잃은 아이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것밖에 없었다. 자식의 울음소리 하나는 기가 차게 알아듣는 게 어머니인지라 어디서 순식간에 어머니가 나타나 내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다. “그러니까 따라오지 말랬잖아.”
마산 어시장의 최고 주전부리는 어묵이었다. 고소한 기름내만으로 황홀했다. 잡어를 통으로 갈아서 튀긴 어묵이라 까끌까끌 뼈가 씹혔다. 요즘 어묵은 그때의 어묵에 비해 맛이 너무 곱다. 바닷내가 짙게 나는 어묵이 그립다.
멸치, 새우, 홍합, 문어, 오징어 등이 놓여 있는 건어물전에도 주전부리가 하나 있었다. 말린 오징어의 껍질이다. 오징어는 일본어로 いか(이카)이고, 말린 오징어는 するめ(스루메)이다. 그 당시 마산 사람들은 말린 오징어의 껍질을 수루메라고 불렀다.
오징어 껍질은 비닐 같다. 씹다 보면 침에 불어서 물렁물렁해진다. 섬유질이 질겨서 녹거나 조각조작 잘리지는 않는다. 최종에는 물컹한 섬유질 덩어리만 남게 되는데, 이를 꿀꺽 삼켰다. 맛은, 말린 오징어와 똑같다. 타우린의 구수한 맛이 입안에 가득 채운다. 수루메는 고추장과 설탕을 넣고 볶아서 반찬으로도 썼다. 볶으면 부드러워진다. 어머니가 도시락에 가끔 넣어주었다.
수루메라는 이름의 오징어 껍질은 수출용 오징어 가공품의 부산물이었다. 말린 오징어의 살만 발라 찢어서 수출하고 껍질은 국내 시장에 팔았다. 1980년대에 우리 살림이 넉넉해지자 수출용 오징어 가공품이 국내에서도 팔리기 시작했다. 상품명이 ‘오양진미 오징어채’였고 현재는 이를 ‘진미채’라고 줄여서 부른다. 진미채 조리법은 예전 수루메 조리법의 맥을 잇고 있다. 시판 도시락에 꼭 끼여 있는 매콤달콤한 진미채를 먹을 때마다 어릴 적 내 도시락에 있던 수루메 반찬을 떠올린다.
내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였다. 말린 오징어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제대로 씹지를 못하였다. 나와 아내는 오징어를 적당히 씹어서 아이들 입에 넣어주었다. 입에서 오징어를 잘게 짓이기기는 하는데 오징어의 몸통에서 나오는 구수한 맛이 짓이겨진 오징어에 남아 있어야 했다. 맛있는 오징어를 씹으면서도 그 맛을 즐기지 못하는 상황인데, 나는 이 일이 즐거웠다. 내 입에서 나온 오징어를 맛있게 받아먹는 아이들이 내게 주는 행복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아이들은 금방 자랐다. 너네들 어릴 때에 내가 오징어를 씹다가 입에 넣어주었다는 말을 하면 기겁을 했던 게 초등학교에 가기도 전이었을 것이다. 가끔은 내 입에 있던 아무것이나 이놈들 입에 확 밀어넣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까 그게 언제였는지 까맣게 잊었다.
입으로 씹어서 자식에게 먹이는 일은 모든 어버이가 하는 일이다. 내 어버이도 내게 그랬을 것이다. 오징어는 비싸서 못 사고 수루메를 씹어서 내 입에 밀어넣었을 수도 있다. 내 의식은 기억 못 하지만 내 몸은 그 일을 기억하고 내가 오징어를 씹어서 내 아이들 입에 넣었을 것이다. 내 아이들도 자식에게 그럴 것이다. 오징어는 어버이 입안에 있는 것이 제일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