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연거푸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 ‘밀수’ 개봉을 앞둔 어느 날. 인터뷰 첫 타임이 시작되기 20~30분 전에도 카페는 기자들로 북적였다. 소란스런 사이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김혜수가 있었다.
아직 인터뷰 시작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은 상황. 여유롭게 도착한 그는 카페 안에 자리를 잡고 일하고 있는 기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일찍부터 일하던 고단함이 다 사라질 것 같은 미소와 함께.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나이가 너무 많아졌잖아요. 늘 막내였는데 어느 순간 저보고 다 선배라고 하고. 지나가면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김혜수는 말했다. “나이는 숫자”라고. 그 나이가 된다고 해서 그 숫자에 맞는 어른이 되는 게 아니더라는 뜻이다.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한 김혜수는 배우로서의 나이만 벌써 37살. 실제 나이는 지천명을 넘겼다.
하늘이 자신을 세상에 낸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 김혜수는 하지만 나이를 먹고 경험치를 쌓는다고 만사에 통달하는 것은 아니라며 “그냥 어린 친구들이 보기에 ‘저 사람은 우리보다 많은 걸 했고 나이도 더 들었으니까 더 잘 알겠지’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카페에서의 인사, 또 이후 이어진 인터뷰에서 20여명 기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대답을 하던 태도는 확실히 김혜수는 무언가를 아는 ‘어른’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 말을 김혜수에게까지 적용하면 섭섭할 것 같다.
몇 년 전 선배에게 이런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점심 이후 인터뷰에 들어간 선배에게 “식사는 하셨느냐”고 물었다는 김혜수. “이제 끝나고 먹으려고 한다”고 하자 알겠다고 하고 계속 인터뷰가 진행됐다고 한다. 그런데 김혜수가 모든 인터뷰를 마치고 카페를 나설 때도 그 선배는 계속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고, 이것을 김혜수가 목격했다. 그는 떡볶이를 사서 나눠 주며 “자기야, 밥을 먹고 일을 해야죠”라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아무리 기자와 배우가 동종 업계에서 함께 숟가락을 얹고 사는 동료라 해도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를 먹으며 외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더욱 좁아지고 옹졸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렇게 더욱 넉넉해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김혜수는 혼자 사는 박정민의 집에 식재료를 한아름 선물한 일화에 대해 “배우고 스태프고 잘 못 챙겨 먹는 걸 보면 안쓰럽다. 내 거 주문하면서 같이 주문하면 되는 거니까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런다”며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한 번을 만났든 여러 번 만났든 김혜수와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은 늘 그 경험을 소중하게 이야기한다. 김혜수가 사랑으로 ‘밀수’의 권상사를 만들어줬다던 조인성, “우리 모두는 김혜수의 사랑 속에 있었다”던 염정아의 말처럼. 김혜수가 실제로 어떤 분야에서 통달의 경지에 올랐는지 어쩐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하나는 확실한 것 같다. 김혜수는 사랑을 베푼다는 ‘천명’(天命)을 이미 깨닫고 실천하고 있다는 것.
“제가 누군가의 좋은 걸 발견할 때가 좋아요. 그 사람 덕분에 제가 좋은 걸 본 것이고, 그건 저한테도 좋은 영향을 주거든요. 그래서 말해주고 싶은 거예요. ‘당신 이런 점이 참 좋다’고요. 표현이 많다고요? 세상엔 좋은 게 너무 많은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