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는 현실이 됐다. FA컵 준결승(4강) 두 경기를 연기했던 대한축구협회(KFA)의 결정은 결국 대회 도중 결승전 방식을 바꾸는 ‘촌극’으로까지 이어졌다. 가뜩이나 추락한 FA컵의 권위를 더 떨어뜨리는 건 다름 아닌 대회를 주최·주관하는 KFA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KFA는 16일 FA컵 4강전 전북 현대-인천 유나이티드, 제주 유나이티드-포항스틸러스전을 오는 11월 1일, 결승전을 4일에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11월 1일과 4일은 원래 각각 대회 결승전 1·2차전을 각각 치르기로 예정됐던 날이었다. 결승 1차전이 열려야 하는 날에 4강전 두 경기를 열고, 사흘 뒤 결승전을 ‘단판 승부’로 개최한다는 것이다. 대회 전도 아닌 4강전을 앞두고 대회 결승전 방식을 바꿔버린 셈이다. 그 어느 대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4개 구단 모두 합의로 채택” 사라진 문구
새 일정이 발표되기 이틀 전이었다. KFA와 각 구단 대표자들은 온라인 화상회의를 통해 향후 일정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시간 차를 두고 전북-인천, 제주-포항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해 의견을 나눴다. 사전에 공문을 통해 구단들이 개최를 희망하는 일자가 KFA에 전달됐고, 이를 바탕으로 논의가 이어졌다.
우선 제주와 포항은 문제가 없었다. 회의 전부터 오는 9월 9일 개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두 팀 모두 KFA에도 같은 의견을 전달했다. 같은날 예정된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예선을 고려해 하루 늦추는 KFA의 제안에도 두 구단은 수용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전북과 인천 간 뚜렷한 입장차였다. 전북은 8월 29일, 인천은 9월 9일 개최를 각각 희망했다. 상대가 원하는 일자에 대해선 회의에 참석한 두 대표이사 모두 뚜렷한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전북 입장에선 A매치 기간 대표팀 선수들의 차출로 전력 손실이 컸다. FA컵 일정이 더해지면 16일 간 무려 5경기를 치러야 하는 인천 역시 난색을 표했다.
두 구단의 이견 속 또 다른 방안으로 논의된 게 이번에 확정된 결승전 일정(11월 1일, 4일)의 활용이었다. 다만 대회 도중 결승전이 홈·원정 방식에서 단판 승부로 바뀌는 문제에 대해선 신중을 거듭해야 했다. 다음 주 2차 회의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던 것도 결코 쉽게 풀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KFA는 빠르게 이 방안으로 결정했다. “4개 구단 모두 주요 선수들이 모두 출전 가능해 구단 입장에서도 최고의 전력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게 KFA의 설명이었다.
이틀 전 구단 의견을 듣긴 했으나 KFA가 최종적으로 일정을 결정한 방식은 통보였다. 각 구단은 KFA 차원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 공문도 아닌 구두로 일정에 대한 사실을 전해 들었고, 이후 보도자료를 통해 이 내용이 발표됐다. 이미 내달 9일 개최에 합의한 제주와 포항의 의견은 무시됐다. KFA는 일정 변경 근거로 대회규정 제12조(대회방식) ‘결승전의 경우 경기 일정에 따라 단판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조항에 근거했다고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KFA는 최초 보도자료엔 ‘4개 구단 모두의 합의로 채택됐다’고 발표했지만, 이후 ‘일정을 최종적으로 확정해 구단에 알리고 발표했다’고 수정했다. 이미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4개 구단 모두의 합의’의 문구가 담긴 최초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해 출고한 뒤였다. 이번 일정 변경과 관련해 이 문장이 갖는 의미를 돌아보면 분명 석연찮은 수정이다. ‘타이틀 후원사인 하나은행 측도 대승적으로 동의했다’던 문구마저 어느샌가 ‘하나은행 측에 양해를 구했다’고 정정됐다.
스스로 논란에 논란만 불러일으킨 KFA
이번 논란은 잼버리 케이팝 콘서트가 돌연 11일 전주월드컵경기장 개최가 결정되면서 시작됐다. 당장 9일 같은 장소에서 FA컵 경기가 예정돼 있던 전북과 인천, 그리고 KFA에 잼버리 불똥이 튀었다. 정치권이 엮인 국가적인 행사인 만큼 전북 구단도 반기를 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건 축구계 안팎의 공통된 시선이다.
문제는 전주에서 열릴 예정이던 경기를 언제, 어디서 치르느냐였다. 이미 6일과 9일 전북 원정 2연전을 위해 전주에 머물러 있던 인천은 ‘홈 개최를 포기할 경우 원정팀 홈에서 개최한다’는 대회 규정에 따라 홈에서 경기가 열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KFA 역시 잼버리 불똥이 튄 뒤 가장 먼저 인천 구단에 홈경기 개최가 가능한지를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전북 입장에선 홈 개최를 포기했다고 하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이에 인천 구단에 공문을 보내 제3구장인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는 걸 제안했다. 인천도 국가적 행사에 따른 영향인 만큼, 대승적인 차원에서 대전 개최를 수용했다. 전북과 인천은 예정대로 9일, 대신 전주가 아닌 대전에서 FA컵 경기를 치르는 데 합의했다.
KFA는 그러나 두 팀의 경기를 ‘연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외적 요인에 따른 불가피한 상황인 만큼 전북이 홈 개최를 포기한 건 아니라고 봤고, 인천 홈에서 열리는 건 규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제3구장 개최 역시 홈팀과 원정팀 모두 경기 개최가 불가능할 때 적용되는 조항인 만큼 대전 경기 승인도 불허했다.
KFA는 두 구단에 공문을 통해 연기 결정을 통보했다. 인천 선수단은 곧장 짐을 싸 인천으로 향했다. 숙소, 훈련장 등 위약금은 모두 인천이 물었다. 무엇보다 KFA의 일방적인 통보에 분노했다. 공식 채널을 통해 “일방적으로 경기 일정 변경에 대한 공문을 전달받아 전원 철수했다. 일방적으로 인정이 변경된 점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하필이면 KFA가 연기 결정을 통보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콘서트가 전주가 아닌 서울에서 개최될 것이란 소식이 전해졌다. 인천은 이미 전주를 떠난 뒤였다. 결국 KFA는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행사와 관련된 변수로 경기 참관을 계획했던 축구팬, 홈경기 및 원정경기를 준비하는 양 구단 등 모두가 일정과 준비에 차질을 빚은 점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연기를 최종 발표했다.
KFA 측은 인천의 ‘일방적인 통보’ 등에 대한 주장에 대해 “충분히 소통했다”고 반박했다. 연기를 결정한 근거로는 제13조(경기 개시) 3항 ‘경기 개시 일자 및 시간은 TV 중계·대회 흥행 및 기타 사유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천 구단은 협의는 물론 공문에조차 관련 규정 등 충분한 설명이 없었던 데에 강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경기만이 아니었다. 9일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제주와 포항의 다른 4강전마저 연기됐다. 태풍 카눈의 영향이었다. 문제는 연기를 결정한 시점이었다. 경기 시작 1시간도 채 안 남은 시점에 KFA가 연기를 최종 결정했다. 태풍에 대비해 포항 선수단은 이틀 전 입도해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고, 포항 팬들도 제주 원정 응원길에 나서 경기장에 도착한 뒤였다.
경기 직전 제주도에서 보낸 공문이 결정타가 됐다. ‘국가적으로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 가운데, 축구경기가 열리면 안전불감증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게 제주도가 KFA와 두 구단에 보낸 공문의 요지였다. 이미 정상 개최를 결정했던 경기 감독관은 KFA와 협의를 거쳐 이 공문을 근거로 연기를 결정했다. 포항 선수단도, 팬들도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는 공문을 보낸 제주도, 그리고 연기를 결정한 KFA로 향했다. 실제 태풍에 대한 피해가 우려됐다면 경기 직전이 아닌 경기 전날이나 당일 오전에 공문을 보내는 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선수단도 차라리 일찍 포항으로 복귀하고, 팬들도 원정길에 오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연기를 결정한 KFA의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경기를 진행한 뒤 날씨 상황에 따라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선택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에선 지극히 일반적인 절차이기도 했다. 더구나 앞서 경기 감독관이 정상 개최를 결정할 정도로 날씨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KFA는 그러나 제주도에서 받은 공문 하나로 경기 직전 연기를 최종 결정했다. 경기를 기다리는 선수들과 팬들을 외면했다. ‘이런 대응책이 있다’고 제주도를 설득했어야 했지만 침묵했다. 경기 연기가 결정된 뒤 포항 선수단은 정상적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1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연기를 결정한 게 섣부른 판단이었던 이유였다.
“FA컵 일정 또 바뀔라” KFA 향한 불신
KFA의 아쉬운 판단들이 결국 화를 불렀다. FA컵 4강 두 경기는 모두 개최가 가능했다. 전북과 인천의 경기는 적어도 구단끼리 합의한 대로 제3구장인 대전 개최의 길이 있었다. ‘외적 요인이 개입한 만큼 전북이 홈 개최를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했듯,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규정을 융통성 있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구단 간 합의를 외면할 게 아니라 어떻게든 개최를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게 KFA의 역할이었다.
제주와 포항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기가 결정된 뒤 훈련을 진행할 정도로 날씨는 우려만큼 나쁘지 않았다. 경기 감독관의 최초 결정대로 우선 정상적으로 개최하되, 실제 안전이 우려되는 상황이 되면 그때 경기를 중단하는 방법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KFA는 경기 직전 제주도의 공문을 무작정 수용했다. 현장에 있는 선수단과 팬들을 가장 고려한 결정이 필요했는데도 공문이 우선이었다. 쉽게 납득하기 힘든 결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구단들과 소통이 잘 이뤄지고, 그래서 더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면 없었을 논란들이기도 하다. “구단들과 소통했다”는 게 KFA의 일관된 입장이지만, 여러 구단이 KFA와의 소통에 대해 공통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던 KFA의 황당한 반응에 구단과 팬들이 분노했던 것 역시 KFA가 이번 논란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결승 방식마저 바꿔가면서까지 결정된 이번 일정이 깔끔한 것도 아니다. 4강을 치른 뒤 불과 사흘 만에 우승이 걸린 단판 승부를 준비하는 것도 문제고, 이번 FA컵 4강과 결승 전후로 예정된 ACL 본선 일정이 확정되면 일정과 관련해 또 다른 논란이 나올 수 있다. 단판으로 바뀐 결승전 장소를 어떻게 정할지도 미지수다.
KFA의 소셜 미디어(SNS)엔 이미 이번 일정과 관련된 비판 목소리가 가득하다. “저렇게 일정을 짤 수밖에 없어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비아냥부터 “이러다 또 일정이 바뀌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추락할 대로 추락한 FA컵의 권위, 그 대회를 주최하는 KFA를 향한 불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목소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