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5년 반 만에 열리는 유럽 원정 평가전이지만, 그 의미가 다소 퇴색될 가능성이 커졌다. 상대인 웨일스가 최정예 멤버로 맞설 가능성이 적은 데다 상대 홈 관중들마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칫 반쪽짜리 평가전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그런데도 졸전에 그친다면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위르겐 클린스만(독일)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8일 오전 3시 45분(한국시간) 웨일스 카디프의 카디프시티 스타디움에서 A매치 평가전을 치른다. 클린스만호 출범 이후 원정 평가전은 이번이 처음이고, 중립이 아닌 원정경기로 유럽팀과 평가전을 치르는 건 지난 2018년 북아일랜드·폴란드 원정 이후 5년 6개월 만이다.
출범 네 경기째 무승(2무 2패)의 늪에 빠진 클린스만호 입장에선 어떻게든 무승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두 번째 평가전 상대가 중립지역인 잉글랜드 뉴캐슬에서 열리는 사우디아라비아전인 만큼 사실상 이번 웨일스전에 모든 전력을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 손흥민(토트넘)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등 최정예 멤버들을 가동해 어떻게든 결과를 가져온다는 게 클린스만 감독의 구상이다.
그런데 상대인 웨일스가 과연 제대로 된 전력을 가동할지는 미지수다. 웨일스 입장에선 한국과의 평가전이 아니라 나흘 뒤 열리는 라트비아와의 2024 유럽축구연맹(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24) 예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웨일스는 예선 4경기에서 1승 1무 2패(승점 4)에 그치며 5개 팀 중 4위에 처진 상황이다. 라트비아를 반드시 이겨야 본선 진출의 희망을 이어갈 수 있다. 애초에 웨일스의 이번 A매치 2연전 일정 초점은 한국과의 친선경기가 아니라 라트비아 원정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롭 페이지 감독도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솔직히 말하면 (한국과의) 친선경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상대가 한국이어서가 아니라, 나흘 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열리는 친선경기 자체가 달갑지 않다는 뜻이다. 한국과의 평가전에 총력을 기울였다가 자칫 부상 선수가 나오거나 주축 선수들의 컨디션에 문제라도 생기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라트비아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감독 입장에선 오롯이 라트비아 원정에 온 힘을 쏟아붓고 싶은 상황에 한국과의 평가전이 중간에 끼어버린 셈이다.
자연스레 한국과의 평가전 전력에 변화가 클 가능성이 크다. 라트비아전에 선발 풀타임 출전할 만한 주축 선수들은 대거 휴식을 주거나 출전 시간을 제한하고, 어리거나 A매치 경험이 적지 않은 선수들을 대거 시험대에 올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페이지 감독은 이번 한국-라트비아와의 A매치 2연전을 앞두고 리암 쿨렌(스완지 시티) 모건 폭서(퀸즈 파크 레인저스) 톰 킹(울버햄프턴) 등 A매치 경험이 없는 선수들도 일부 선발했다. A매치 출전 경험이 5경기도 채 안 되는 선수들도 8명이나 되는데, 웨일스 입장에선 이러한 선수들에게 기회를 줄 명분은 충분하다.
페이지 감독 역시도 “내게 더 중요한 경기는 다음 경기(라트비아전)다. 선수들을 관리해야 한다”며 “선수들의 출전 시간 등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미 가지고 있다. 하프타임이나 후반 15분 등 교체 선수가 많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주축 선수들의 체력을 안배하거나 많은 교체 카드 활용을 통해 선수단에 변화를 주겠다는 뜻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한국(28위)보다 더 낮은 웨일스(35위)가 오히려 더 힘을 뺄 수도 있는 셈이다. 최정예 멤버들을 앞세울 클린스만호와는 다른 분위기다.
설상가상 경기장에 많은 웨일스 관중들이 찾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일방적인 상대 홈팬들의 응원에 맞서보는 건 원정 평가전의 가장 큰 의미 중 하나인데, 이마저도 썩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는 것이다. 영국 더선에 따르면 지난주 웨일스축구협회가 판매한 한국전 티켓은 겨우 7000장에 불과하다. 웨일스 대표팀의 부진에 따른 페이지 감독에 대한 불신이 작용한 결과라는 게 매체 설명이다. 이 추세라면 지난 2019년 9월 벨라루스전 당시 관중 7666명 이후 4년 새 가장 적은 관중이 입장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날 경기가 열리는 카디프시티 스타디움 수용 인원은 3만 3280명인데, 자칫 썰렁한 경기장에서 A매치 원정 평가전을 치러야 할 수도 있는 셈이다.
가뜩이나 A매치 상대 등에 대한 대한축구협회(KFA)의 행정력이 늘 도마 위에 올랐던 가운데, 상대가 힘을 잔뜩 빼는 데다 경기장마저 썰렁하다면 웨일스 원정 평가전의 의미를 두고 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축구협회가 빠르게 독일(원정)-튀르키예(중립) 등 괜찮은 평가전 상대를 잡은 것과도 더욱 비교될 수 없는 상황이다.
설령 이겨도 의미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더 치명적인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호의 첫 승이 불발될 경우다. 웨일스가 힘을 빼고, 일방적인 상대 팬들의 응원에 시달린 것도 아닌데도 결과나 경기 내용을 잡지 못한다면 클린스만호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이미 외신에서부터 경질설이 제기되는 가운데, 그동안 클린스만 감독을 둘러싼 여러 논란과 맞물려 그야말로 거센 후폭풍이 몰아칠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