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땅끝 해남 오기택 전국가요제’가 오는 11월 4일 전남 해남군의 해남미남축제 특설무대에서 열린다.
이번 가요제는 2013년생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오는 20일까지 주최를 맡은 (사)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해남지회로 접수하면 된다. 음반 발표자 및 유사대회 대상 수상자는 참가 자격을 주지 않는다. 참가를 원하는 사람은 성명 나이 출신지 곡명 연락처를 기재해 팩스나 이메일로 접수하면 된다. 전화 접수도 받는다.
참가를 신청한 사람은 21일 오후 2시 해남문화예술회관 다목적실에서 열리는 예선을 통과하면 11월 4일 열리는 본선 무대에 오를 수 있다.
대상 수상자 1명에게는 300만원의 상금 및 트로피를 수여하며 가수 인증서도 발급해준다. 또 금상 수상자에겐 상금 100만원과 트로피, 은상 수상자에겐 70만원과 트로피를 시상한다. 시상은 동상, 장려상, 참가상까지 선정해 진행한다.
지난 2022년 3월 23일 오랜 투병 끝에 별세한 오기택은 해남군이 낳은 최고의 가수이자 스포츠맨이었다. ‘땅끝 해남 오기택 전국가요제’는 그가 살아 있던 2007년부터 시작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명가수는 죽어서 노래를 남긴다’는 것을 오기택이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9년 11월 18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에서 태어났다.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해남중학교에 재학 중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서울에 살던 외삼촌의 도움으로 상경해 성동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동화백화점에서 가수 고복수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 다니며 노래를 배웠다.
1961년 제1회 KBS 직장인 콩쿠르에 동화백화점 대표로 참가해 1위를 했다. 당시 이 콩쿠르를 TV로 본 작곡가 김부해 선생이 스카우트해 ‘영등포의 밤’, ‘가버린 영아’, ‘우중의 여인’ 등을 취입하고 신세기레코드사와 계약을 하면서 오기택의 신화가 시작된다.
1962년 12월 ‘영등포의 밤’이 담긴 데뷔 음반이 나왔다. ‘영등포의 밤’은 나오자마자 히트를 쳤다.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의 기세를 꺾을 정도였다.
당시 신세기레코드사는 부도로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영등포의 밤’이 담긴 레코드가 밤새 찍어도 모자랄 정도로 잘 팔려 회사가 되살아났다고 한다. ‘영등포의 밤’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엄앵란과 남궁원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서울 영등포구가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영등포의 밤’ 시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오기택은 1963년 4월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다. 진해에서 훈련을 받고 서울 한남동 군예대에서 근무했다. 해병대에 근무할 때 취입한 영화 주제가 ‘아빠의 청춘’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해병대를 제대한 다음 해인 1965년은 오기택의 황금기였다. 그해 발표한 ‘고향무정’을 비롯해 ‘충청도 아줌마’와 ‘마도로스 박’ 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고향무정’의 반응은 ‘영등포의 밤’을 능가할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하면 ‘고향무정’이 나왔고 전파사와 레코드가게 등 서울 시내 가는 곳마다 그 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이 무렵 혈기왕성한 오기택은 MBC 라디오의 모PD와 주먹다짐을 벌이면서 방송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했다.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준 KBS에는 계속 출연했지만 MBC에선 오기택의 노래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오기택은 그 후 방송활동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골프에 빠졌다. 아마추어 골퍼로 전국체육대회에 전남대표로 출전해 메달을 4개나 목에 걸었다. 그러나 음반회사들이 오기택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돈을 싸들고 찾아와 방송활동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불러만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렇게 해서 취입한 곡이 무려 1000여 곡에 이르렀다.
1979년 추자도 인근 염섬에서 홀로 낚시를 하다가 당한 뇌출혈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불굴의 투지로 건강을 회복하기도 했다. 2008년 중풍으로 다시 쓰러져 언어장애와 전신마비 증세로 14년 동안 투병하다 끝내 별세했으나 이 불세출의 가수가 부른 노래들은 살아남아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