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 소리가 요란한 다크 판타지 만화 ‘체인소 맨’. 그중에서도 수백만 팬을 설레게 한 애니메이션 ‘레제 편’은 일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문화현상으로 불릴 정도의 큰 사랑을 받았다. 악마와 피가 난무하는 이 기괴한 세계관 속에서, ‘레제 편’이 유독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가장 순수하고 서정적인 첫사랑’ 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소년 덴지와 소녀 레제의 비극적 이별은 한국 문학의 걸작, 황순원의 ‘소나기’와 깊은 정서를 공유한다. 서브컬처에 녹아 있는 클래식의 정서, 그 데자뷔가 기묘하다.
두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두 작품의 매개체는 ‘비’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만난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는 두 사람을 원두막이라는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으며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비는 두 사람을 세상과 고립시키며 그들 만의 내밀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매개체다.
‘체인소 맨:레제 편’에서도 ‘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공중전화 박스, 학교 수영장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속의 유영. 덴지와 레제는 물에 젖은 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삭막한 도시의 소음을 지우고 서로에게 집중한다.
죽음을 암시하는 비극의 색채 또한 같다.
‘소나기’ 속 소녀가 좋아했던 보라색 양산은 신비로움과 동시에 죽음과 애도를 상징했다. 레제 역시 어둠 속 보랏빛 눈동자와 머리색깔, 폭죽의 잔상을 통해 덴지에게 닿을 수 없는 비극적 운명임을 예고한다. 두 소녀는 찰나의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피어올랐다가, 소년의 가슴에 흔적 없이 사라진다.
이 비교의 백미는 단연 결말에 있다. 두 작품의 비극성은 ‘소녀의 죽음을 모른 채 기다리는 소년’의 무지에서 극대화된다. 소녀가 이사 가는 줄만 알고 호두를 만지며 내일을 기약하는 ‘소나기’의 소년처럼, 덴지 역시 길목에서 목숨을 잃은 레제를 모른 채 꽃다발을 들고 하염없이 카페에서 기다린다. 진실이 전달되지 못한 이 처절한 엇갈림이야말로 인류가 오랜 시간 슬퍼해 온 비극의 원형이다.
잔혹한 액션물인 ‘체인소 맨:레제 편’이 대중을 사로잡은 진짜 힘은 화려한 액션이 아니라, 우리의 DNA에 각인된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애틋함에 있다. 20세기의 시골 소년이나 21세기의 전기톱 소년이나 사랑 앞에 서툰 모습은 매한가지다.
보라색 소나기가 내리던 날, 소년은 소녀를 잃었다. 그 상실의 기억은 소년을 성장시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20세기의 황순원이 그렸던 순박한 시골 소년이나, 21세기의 후지모토 타츠키가 그린 전기톱 소년이나, 사랑 앞에 서툰 모습은 매한가지다.
비록 그 끝이 죽음과 이별일지라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려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작품의 데칼코마니 앞에서 마음이 젖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종언 변호사 (법무법인 존재) 노종언 변호사 ▶저자 소개=노종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 후 현재 법무법인 존재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컬처인컬처’(Culture in Culture)는 문화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문화를 성찰해 그 연결 고리를 소개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