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와서 식당을 연 후배가 짜증을 내며 제게 물었습니다.
“서양 감자 요리 있잖아요. 메쉬드 포테이토. 그걸 원통에다 넣고 쏙 빼야 하는데, 달라붙어서 안 빠져요.”
“분질 감자를 써야 쏙 빠지지. 남작이라고, 분질 감자가 있는데, 요즘 재배 면적이 워낙 적어서 찾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다들 수미밖에 안 심으니. 인터넷에서 뒤지면 생산자가 올려놓은 게 나올 거야.”
메쉬드 포테이토는 분질 감자를 못 찾으면, 수입 가공품을 쓰면 됩니다. 이 요리사는 감자로 직접 요리를 하려니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메쉬드 포테이토는 가끔 먹는 것이니 감자의 품종 따위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저에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한국인의 일상 음식인 감자탕의 감자가 문제입니다. 감자탕에서 제일 중요한 재료가 뭐냐고 물으면, 물론 사람마다 대답이 다 다르겠지만, 저는 감자를 꼽습니다. 이름이 감.자.탕.이잖아요.
지금 감자탕을 먹는다고 상상해봅시다. 먼저 등뼈에 붙은 살을 파먹어야겠지요. 등뼈 하나를 맛있게 발랐으면 시래기를 듬뿍 건져내어 국수 먹듯이 후루룩 들이키고 시원하게 국물을 마신 다음에, 이젠 냄비에서 감자를 꺼내야지요. 국물이 반쯤 담긴 앞접시에 감자를 놓고 숟가락으로 꾹 눌렀을 때에, 감자가 파사사사삭 허물어지면서 국물 안으로 번지듯이 스며들어야 진짜 감자탕입니다.
감자를 숟가락으로 눌렀는데 감자가 미끄덩 접시 밖으로 튀어나가면, 실격입니다. 돼지 등뼈에서 우러나온 묵직한 국물에 반투명의 파슬파슬한 감자 살이 풀어져 동식물의 조화로움을 우리에게 선사해야 비로소 감자탕의 대미가 장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묘사를 해도 “이게 뭔 소리야?” 하는 젊은 분들이 많을 겁니다. 분질 감자를 쉬 맛볼 수 없게 된 지가 꽤 되었기 때문입니다. 50대 이상은 분질 감자가 기억 속에 존재할 것입니다. 감자를 삶으면 냄비 안에서 턱턱 갈라지는 그 감자 말입니다. 입안에 넣으면 씹을 것도 없이 사르르 녹듯이 흩어지는 그 감자 말입니다.
감자는 근래에 유입된 작물입니다. 조선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순조 갑신·을유(1824~1825) 양년 사이 명천의 김씨가 북쪽에서 종자를 가지고 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구황작물로 함경도와 강원도, 평안도 등의 산간지에서 재배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남작이라는 품종이 도입되었습니다. 남작은 1876년 미국에서 육성한 품종입니다. 이 남작이 분질 감자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포실포실한 이 남작을 주로 먹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감자 품종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병충해에 강하고 지역 적응성이 뛰어나며 수확량이 많은 수미가 선택되었습니다. 수미는 1961년 미국에서 육성한 품종입니다. 그리고 점질 감자입니다.(수미를 중간질 감자라고도 하는데, 감자탕에서의 적응도를 따져보면 점질 감자입니다.)
점질 감자가 맛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점질 감자는 점질 감자로서의 장점이 있으며, 그에 맞는 가공품과 요리도 존재입니다. 다만, 시장에서 점질과 분질이 구분되어 팔리지 않고, 요리를 할 때에 이 둘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미식적 손실’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분질 감자가 재배하기 까다롭고 시장이 좁아서 생산자가 재배 면적을 늘리지 않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합니다. 그러나 감자탕이나 닭도리탕, 메쉬드 포테이토 등에는 분질 감자를 써야 맛있다는 소비자의 인식이 확산하면 시장에서 분질 감자가 점질 감자와 분리되어 가격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