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혁(롯데 자이언츠) 선수가 공을 던집니다. “한 명씩 서 봐. 공 던져 줄게…. 잘 친다. 엄청 멀리 가네.”
그런데 야구공은 아닙니다. 흙먼지가 묻은 테니스공입니다. 이 곳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학교 운동장입니다. 부산 사직야구장 근처 부산 예원초등학교.
무슨 행사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헐렁한 평상복에 운동화 차림의 노 선수는 여섯 살 아들 형준 군과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 놀러 왔습니다. 2023시즌을 마치고 개인 훈련 등 일정이 없는 날이면 공놀이를 좋아하는 유치원생 꼬마를 데리고 마실 다니는 것이 이 아빠의 소중한 스케줄입니다.
“토요일이던 그날 형준이랑 캐치볼 하려고 운동장에 갔는데 어린이들이 야구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초등학교 5~6학년이더라고요. 아들 녀석이 자기도 형들이랑 하고 싶다고 조르데요. ‘너는 아직 어려서 안돼. 저 형들은 훨씬 커’라고 말렸죠.” 그러나 시즌 때 자주 놀아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아빠는 아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노 선수는 어린 학생들에게 다가가 “같이 하면 안될까. 내가 던져 줄게. 대신 동생도 끼워 줄래?”라고 말을 꺼냅니다. 아이들은 대번 “노진혁이다!”라고 알아 봅니다. ‘구도’로 자부하는 부산의 아이들 답습니다. 머쓱하기도 했지만 자식 앞에서 은근 뿌듯해진 노 선수는 “고맙다, 같이 놀아줘서. 내가 야구 장갑을 선물로 줄게”라며 주머니를 뒤져 장갑 몇 켤레를 꺼냅니다. 환호성이 더 커집니다.
노진혁의 즐거운 동네야구는 서너 차례 더 이어집니다. 주말이면 노 선수가 아들과 함께 초등학교를 찾습니다. 야구하고 노는 아이들이 늘어납니다. 중간중간 사인회도 열립니다. 노 선수는 장갑을 더 챙겨와 고루 나눠 주고, 회사에서 받아 놓은 사인볼도 전달합니다. 노 선수 아내는 햄버거와 피자를 운동장으로 배달시켜 놓았고요. 노 선수는 “제가 고맙죠. 새로 팀을 옮기며 이 동네로 이사 왔는데 이웃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잖아요. 아들이 동네 형들이 좋다고 해요. 저도 이 아이들 덕분에 다른 아빠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웃이 됐죠. 이게 사람 사는 거잖아요”라고 말합니다.
오랜만에 저도 노 선수와 통화 했습니다. 최근 스포츠 기사 중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야구하는 아저씨, 알고 보니 50억 FA’를 읽은 뒤였습니다. 길지 않은 기사여서 노 선수의 말과 생각이 없어 궁금해졌습니다. 울림 있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보면 ‘환장’할 정도로 야구를 좋아하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게 해요. 그걸 보니 저도 저 또래 때 순수하게 야구가 하고 싶던 추억이 떠올랐고요. 나도 그랬는데…. 프로 선수이지만 아이들 야구 보면서 동기부여가 됐어요. 배움을 느꼈어요.”
평소 붙임성 좋고 생각이 깊은 노 선수입니다. 최근 ‘디 애슬레틱(The Athletic)’에서 읽은 일본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의 인터뷰와 오버랩됩니다. 은퇴 후 이치로는 사회인 야구팀을 조직해 선수로 뛰면서 순수 동호인 야구선수들도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치로는 “프로로 은퇴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야구를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나에게 특별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고 나는 그 느낌을 되찾고 싶다. 프로의 세계는 압박과 책임으로 가득하다. 28년간 프로로서 최선을 다한 뒤 이제 기쁨의 순수성을 재발견하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사랑, 순수, 기쁨, 재발견이란 단어가 키워드로 남습니다. 노진혁 선수의 동네야구 스토리와 겹쳐집니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가 1997년 초, 고향 파나마의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과 동네야구를 하는 사진도 떠오르네요.
결이 비슷합니다. 꽉 맞는 유니폼 차림이 아니어도, 멋진 정장의 포즈가 아니어도, 함성 가득한 야구장이 아니어도, 현역이든 은퇴를 했든, 세상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기 때문에 야구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선수 여러분, 일상에서 매일 호흡할 수 있는 야구, 당신의 초심을 이번 겨울에 나눠 주세요. 오프시즌 각종 행사, 예능 방송, 사회 공헌 활동에 참여 요청을 받고 바쁘겠지만 세상과 진심을 나눌 편안한 자리도 찾아 주세요. 멀리 있지 않아요.
이번 글 제목은 정지우 작가의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차용했습니다.
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 김종문 coachjmoon 지메일
김종문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2011~2021년 NC 다이노스 야구단 프런트로 활동했다. 2018년 말 '꼴찌'팀 단장을 맡아 2년 뒤 창단 첫 우승팀으로 이끌었다. 현재 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KPC)다.
안희수 기자 anheesoo@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