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안방극장을 뒤흔들었던 ‘사계절’ 감수성이 음악을 타고 다시 돌아온다. ‘한류 드라마 OST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이 프로젝트는 2003년 방영된 KBS2 드라마 ‘겨울연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일본 한류 20주년을 기념해 선보이는 프로젝트로, ‘겨울연가’와 함께 제작됐던 사계절 드라마 시리즈 ‘봄의왈츠’, ‘여름향기’, ‘가을동화’의 OST 수록곡들이 함께 리메이크 된다. 해당 드라마들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던 그룹 모노 출신 작곡가 겸 프로듀서 박정원이 음악감독으로 나서 20년 만에 다시 명곡을 소환한다.
“이런 프로젝트는 꽤 오래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던 부분이에요. 여러 가지 환경과 상황에 의해 못 하다가 이제야 하게 됐는데, 여름 분위기에 어울리는 ‘여름향기’ 음악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최근 서울 합정동 한 카페에서 일간스포츠와 만난 박정원 감독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품어왔던 ‘꿈’과도 같은 프로젝트를 실현해나가고 있는 근황을 자세히 전했다. 박 감독은 “사실 10주년 때 하려고 했었는데, 리메이크 앨범의 기획 등에 대한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진행하지 못했다. 기획의도와 너무 동떨어지게 많은 요구를 받아 그 땐 포기하고 줄곧 꿈만 꾸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빛을 보게 됐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욘사마’(배용준), ‘지우히메’(최지우)라는 이름을 탄생시킨 ‘겨울연가’는 당대 독보적인 감성 명작으로 사랑 받은 드라마다.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 특히 큰 인기를 누렸고, 종영 후에도 수년간 열광적 반응이 이어져 이를 비즈니스적으로 활용한 프로젝트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친 상업적 활용은 작품 자체의 순수함을 퇴색시키는 법. 이 와중 시작된 이번 프로젝트 역시 누군가의 눈에는 상업적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박 감독은 ‘드라마의 후광을 노리는 게 아닌, 철저히 음악과 아티스트를 조명하자는 취지’라고 기획의도를 강조했다.
이번 프로젝트 작업에는 지난 달 공개된 ‘여름향기’ OST곡 ‘두 번째 사랑’의 가창자로 나선 츄를 비롯해 다수의 아이돌 가수들이 참여했다. 박 감독은 “요즘 10대 20대들은 윤석호 감독의 사계절 시리즈 드라마를 잘 모를 수 있다. 우리 앨범을 듣고 누군가는 ‘츄의 신곡이 나왔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다. 알고 보니 그 노래였구나, 엄마아빠가 젊을 때 인기 있던 드라마의 노래구나 라고 이야기하면서 세대간 소통이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베테랑 음악감독이지만 오래된 명곡을 재소환하는 작업은 녹록치 않았다. 박 감독은 “20년도 더 지난 음악들을 리메이크 하는 건데, 지금의 트렌드를 따라가면서도 곡들이 가진 고유성을 잃어버리면 안되니까, 어떻게 하면 곡의 아이덴티티와 트렌드를 잘 믹스해 결과물을 만들어낼까가 제일 큰 과제였다”고 설명했다.
츄 등 아이돌들과의 작업에 대해선 “너무 준비를 잘 해와준 덕분에 녹음 과정도 수월했다. 많이 긴장됐을텐데 잘 해줘 고맙고, 사실 내 입장에선 츄를 비롯한 아티스트들이 함께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며 “어떻게 하면 이 친구들과 소통을 잘 할까 늘 생각했고, 격려를 많이 해줬다. 과거의 박정원은 이번 작업엔 없었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30년 전 박 감독이 모노 프로듀서 겸 베이시스트로 활동했을 당시 보컬 김보희를 트레이닝 시키며 ‘스파르타식 프로듀서’로 악명 높았던 것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1993년 데뷔한 밴드 모노 시절의 것으로 이어졌다. 모노를 결성하게 된 데 대해 박 감독은 “사촌동생 친구의 동생이 가수를 하고 싶다고 해서 우연히 소개를 받았는데 그게 김보희였다. 처음 보자마자 너무 예쁘게 생겨서 ‘이 친구구나’ 싶어 애정을 갖고 트레이닝 시켰다”며 “한 3년간 열심히 트레이닝 시키며 음악 만들고, 함께 음악 하던 친구 이홍래와 같이 ‘우리도 뭐 한 번 해볼까’ 하고 결성한 팀이 모노였다”고 설명했다.
모노는 당대 히트곡 ‘넌 언제나’로 큰 사랑을 받았으나 활동 기간은 1년 여에 불과했다. “방송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고 싶었던 거였는데 1년 정도 방송을 하니 자괴감이 들었어요. 당시엔 다 립싱크였던 시절이라 라이브도 할 수 없었고, 스케줄만 소화하다 보면 음악 만들 시간도 없었고, 아티스트의 조건이나 환경을 존중해주는 환경도 아니었죠.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싶고 고민이 점점 커졌죠.”
숙고 끝에 팀은 해체했고, 그렇게 모노는 누군가에겐 ‘원히트 원더’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박 감독은 “나는 모노 활동에 후회는 없다. 나는 가수는 아니니까. ‘넌 언제나’를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리메이크 해주신 부분에 감사할 뿐”이라 말했다.
박 감독의 음악 여정은 이후에도 변화무쌍하게 이어졌다. 이번 프로젝트로 재소환된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등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작품은 무려 50편이 넘는다. 어디 그뿐인가. 모노 이전에 이미 이상우가 강변가요제에서 금상을 받게 된 데뷔곡 ‘슬픈 그림 같은 사랑’을 비롯해 이상은, 민혜경, 소방차, 강수지, 강인원 등 많은 가수들의 음악에 참여한 저명한 작·편곡가였던 그는 지금은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 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그동안 드라마 음악을 50편 정도 했는데, 드라마 음악감독 할 땐 사람들이 ‘어, 감독님 모노였어요?’라며 놀라고, 내가 모노로 활동했던 걸 아는 사람들은 ‘드라마 음악감독도 했어요?’라고 묻곤 해요. 또 모노 활동 당시엔 ‘이상우 곡도 쓰셨어요?’ 이러고요. 제가 다 작업했다는 게, 연결이 안 되는 거죠.(웃음) 가만히 생각해보면, 30년 넘게 음악 하면서 참 다양하게 해왔구나 싶고, 운이 좋았구나 싶어요.”
1~2년 전부터 가요계에 강하게 불고 있는 ‘Y2K’ 시대의 실제 주인공이던 박 감독은 “MZ 세대 어린 아이돌들이 그런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반갑고 고맙고, 또 신선하다”면서도 “어떤 유행을 예측하는 것보다, 자기가 좋아하고 자신 있는 음악을 하면 언젠가 반드시 그 음악이 인정 받을 것”이라 조언했다.
뉴진스의 음악과 퍼포먼스에서 영감을 받고 (여자)아이들 소연 등 아이돌 프로듀서들이 직접 디렉팅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며 “지금도 많이 배우고 있고,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는 박 감독은 “나는 고인 물이 되기 싫다. 나름대로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노력하는 수 밖에 없어요. 우린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인데, 대중의 외면을 받으면 그건 죽은 음악이죠. 과거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되요. 예전에 조용필 형님이 ‘나는 박제된 영혼이 싫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너무나 공감하는 말씀입니다. 과거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작곡가이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