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포지션과 보조 포지션은 무엇인가? 투수라면 며칠의 휴식이 필요하고, 개인 루틴은 어떻게 되는가? 일주일에 보통 몇 번 등판이 가능한가?"
미국여자프로야구리그(WPBL) 캠프 시작 전, 뉴욕 하이츠의 지휘봉을 잡은 라셸 헨리 감독이 선수단 전체에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질문들을 확인한 김라경(27·뉴욕)은 낯선 미국 무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투수의 루틴과 컨디셔닝을 이토록 정확히 짚어내고 배려하는 지도자라면 온전히 신뢰하고 마운드에 오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헨리 감독의 이러한 세심함은 단순한 코칭 기술이 아닌, 평생을 여자야구 발전을 위해 뛰어온 치열한 개척자의 삶에서 우러나온다.
7세부터 리틀 야구팀에서 활약한 헨리 감독은 1990년대 남성 프로 및 세미프로 팀과 직접 맞붙었던 선수 출신이다. 지도자로 전향한 뒤에는 1개 팀뿐이던 지역 야구 프로그램을 150명 이상이 뛰는 8개 팀 규모로 성장시켰으며, 이번 WPBL 출범을 앞두고 열린 대형 트라이아웃 선발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번 WPBL에선 4개 팀 감독 중 유일한 여성 감독으로 첫걸음을 내딛는다.
김라경 본인 제공
이러한 헨리 감독의 헌신적인 행보는 김라경이 한국에서 걸어온 궤적과 닮아 있다. 김라경 역시 한국 여자야구 발전을 위해 뛰어 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특출난 재능으로 리틀야구 연령 제한을 중학교 1학년에서 3학년으로 연장하는 이른바 ‘김라경 특별법’을 이끌어냈던 김라경은, 서울대 체육교육과 입학 후 남성 사회인 구단과 경기하는 외인구단 ‘JDB(Just Do Baseball)’를 직접 창설해 운영하며 새로운 길을 냈다. 2022년 일본 실업팀 ‘아사히 트러스트’에 입단하며 해외 무대의 문을 두드렸으나 부상이라는 벽을 마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재활과 훈련에 매진한 그는 지난해 일본 실업야구 세이부 레이디스에서 풀타임 시즌을 소화한 뒤 올해 미국 프로무대까지 서게 됐다.
평생을 여자야구 인프라 확장에 헌신해 온 사령탑과, 척박한 환경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돌파해 온 투수의 만남은 남다른 시너지를 예고한다.
지난겨울 열린 WPBL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1순위, 뉴욕 팀 투수로는 가장 먼저 지명을 받은 김라경은 오는 8월 1일 열리는 개막전 선발투수에 도전한다. WPBL은 지난 1954년 폐지된 올-아메리칸 걸스 프로야구 리그 이후 72년 만에 부활하는 미국 여자프로야구리그다. 김라경이 홈 개막전 선발로 낙점될 경우, 72년 만에 열리는 역사적인 공식 경기의 첫 공을 던지는 투수가 된다.
김라경은 "개막전 선발에 대한 욕심과 기대감이 크다. 선발로 나선다면 정말 영광스러울 것 같다"며 "간절히 바라왔던 프로 무대인 만큼, 원 없이 후회 없는 야구를 하고 돌아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