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개봉 후 최고 수혜자는 엄태구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사회 직후 관계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바로 엄태구와 이병헌이었다.
사실 이병헌이야 어떤 존재감을 내비칠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됐고 결과적으로 "역시"라는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로 주연 배우 뺨치는 특별출연의 역할을 소화해 내 회자될 수 밖에 없었지만, 엄태구는 그야말로 반전 그리고 발견 그 자체였다.
송강호도 엄태구의 연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그 친구 진짜 잘해. 연기 진짜 잘해. 참 잘해"를 여러 번 반복해 강조했을 정도니 '밀정'이 감춰둔 또 한 명의 히든카드임은 분명하다.
'밀정'의 중반부 즉 허리를 책임지는 엄태구는 등장부터 퇴장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은 채, 흔한 성격 변화없이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하시모토로 극악무도한 모습을 보인다.
귀가 얇지만 촉이 좋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의심하며 임무 수행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다혈질 하시모토로 분한 엄태구는 '뭐 이렇게까지 사실적이야' 싶을 정도로 미친 열연을 펼친다. 왠지 어떤 사진에서든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일본 순사를 빼다 박은 비주얼과 깔끔한 일본어 대사, 군더더기 없는 표정연기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화룡점정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엄태구는 자신이 지시한 미션에 실패한 부하의 뺨따귀를 사정없이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린다. 몇 번을 때린 것인지 세다가 포기할 정도로 쥐잡듯이 잡을 때의 살벌한 표정과 약간의 쇳소리가 나는 저음 목소리는 스크린을 뚫고 나와 관객들에게도 그 공포감을 고스란히 선사한다.
또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열단 등 독립군들을 비밀리에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접한 후 정말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듯 "왜지?"라고 말하는 한 마디 역시 엄태구가 하시모토에 완벽 빙의했음을 엿보이게 한다. 이는 김지운 감독이 가장 흡족해 하고 좋아하는 연기 중 하나라는 후문.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엄태구는 영화 속 하시모토와는 180도 다르다. 까불거리고 능글맞은 성격조차 아니다. 심한 낯가림에 언론시사회 등 공식석상에서는 또박또박 대답을 하는 듯 하면서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속내를 숨기지 못해 늘 애정어린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또 뺨따귀 장면을 촬영하고 나서 상대 배우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에 밤 늦게 피자를 사들고 숙소에 찾아 갔다는 일화 역시 엄태구의 성격을 가늠케 하기 충분하다.
스토리상 하시모토의 과거신은 영화에서 편집될 수 밖에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밀정'이 흥행에 성공하면 편집된 장면을 추가한 감독판을 고려해 보겠다고 한 김지운 감독의 약속을 믿어 볼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