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4강에 오르는 신화를 작성했다. 독일과 4강이 열리던 날 전국의 거리에 무려 700만명이 뛰쳐나와 대한민국을 외쳤다.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함성과 열기였다.
2018년 한국의 2002년과 비슷한 열기를 가진 국가가 있다. 베트남이다.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결승에 진출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강 신화는 베트남 축구 역사상 가장 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베트남 축구대표팀 유니폼 역시 한국과 같은 붉은색. 베트남은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베트남은 거리응원을 장려하기 위해 단축근무를 시행하는 등 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와 베트남을 연호했다.
두 국가의 붉은 물결에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박항서다.
2002년 한국에서 수석코치로, 2018년 베트남에서 감독으로 마법을 부렸다. 평생 한 번 경험하기도 힘든 국가적 축구 신드롬. 박 감독은 국가적 붉은 물결을 '두 번' 이끈 유일한 영웅이다.
베트남의 '국민 영웅'으로 등극한 박 감독을 지난 23일 인천의 한 카페에서 일간스포츠가 만났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 감독이지만 본지의 창간(9월 26일) 인터뷰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줬다.
추석 전날 박 감독은 베트남으로 출국했다. 추석을 가족들과 함께 보낼 여유는 없었다. 박 감독은 당초 영국 런던으로 들어가 2018 국제축구연맹(FIFA) 어워즈에 참석할 계획이었지만 베트남 대표팀의 훈련과 경기 일정이 꼬여 바쁘게 베트남으로 향했다.
박 감독은 유일하게 자신만 경험한 두 번의 국가적 붉은 물결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2002년 그리고 2018년. 시대도 다르고 국가도 다르고 구성원도 다르지만 하나의 같은 점이 있다. 박 감독은 "한국과 베트남의 공통된 부분은 축구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뜨거운 2018년 이야기
2018년. 박 감독은 베트남의 '주연'이다. 가는 길마다 베트탐 축구 최초의 길을 걸었다.
지난해 9월 29일 박 감독은 베트남 대표팀 감독에 공식 취임했다. 오는 29일이 1주년이다. 1년 동안 많은 영광이 있었다.
M-150컵에서 10년 만에 라이벌 태국을 꺾었고, 베트남을 12년 만에 아시안컵에 진출시켰다. 베트남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호주와 일본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 아시안게임 4강 등 베트남은 박항서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부임 1주년을 돌아보면.
"처음 갔을 때 사실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베트남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고, 한 눈을 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인의 성실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물론 스트레스도 받는다. 그렇지만 정말 하루하루 즐겁게 생활을 하고 있다."
-시작부터 위기가 찾아왔다고.
"AFC U-23 챔피언십으로 가기 전에 우즈베키스탄에게 1-2로 졌다. 챔피언십 대비를 하기 위한 경기였는데 베트남 언론에서는 선수기용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베트남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멀리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베트남의 신뢰를 빨리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해 승리를 갈구했다. 그 결과 태국을 잡았다. 10년 만에 이겼고 분위기가 좋았다. 신뢰를 어느 정도 쌓은 상태에서 U-23 챔피언십을 출전했다."
-U-23 챔피언십에서 한국에 패배했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대회였다. 당시 모든 이슈가 나의 조국인 한국과 맞대결에 맞춰져 있었다. 베트남 역시 좋은 성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한국에 졌을 때 여론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호주를 이기면서 분위기가 좋아졌고 이라크를 이기니 폭발적으로 변했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신체가 작은 베트남 선수들에게 '나도 키가 작다'라고 말했다.
"베트남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려주고 싶었다. 특히 미드필더에서는 기동력 등을 위해 작은 선수들이 장점이 있다. 나도 키가 작고 이영진 코치도 작다. 나는 선수들에게 '이영진 코치는 키가 작지만 월드컵을 2번이나 갔다'고 설명해줬다."
-선수 선발의 원칙은.
"베트남에도 기술위원장이 있다. 독일 사람인데 선수 선발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선수 선발 권한은 오로지 나에게만 있다. 선수를 선발하는 원칙은 경기력, 개인의 기술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특별한 원칙이 하나 있다. 바로 사회성이다. 이 선수가 우리팀에 와서 하나의 팀 일원이 될 수 있는지를 본다. 이를 위해 경기장에서 훈련장에서 하는 행동을 주의 깊게 본다. 원팀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보는 것이다. 선수들도 나의 이런 원칙을 잘 알고 있다. 베트남은 몇 몇 선수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키 플레이어도 없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하나의 팀이 되지 못하면 배제한다. 용납할 수 없다."
-베트남 3급 노동훈장을 받았다.
"처음에는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왜 1급이 아니고 3급을 주냐고 농담으로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3급이 더욱 높은 것이었다. 베트남 영웅에게 국가적으로 공로를 세운 자에게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 영광스러운 훈장이다. 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약팀을 강하게 만드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동안 강팀을 맡지 못했다. 큰 팀을 맡아도 잘 할 수 있다. 내가 맡은 가장 큰 팀은 상주 상무였다. 우승시키지 않았나.(웃음) 히딩크 감독님이 나에게 해준 말이 있다. '성인팀을 맡을 때 절대로 만들어서 갈 생각을 하지 마라. 시간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있는 자원을 극대화 시키는 것을 고민해라'고 조언해줬다. 약팀이라는 것은 전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기량이 뛰어난 선수가 부족하다는 의미다. 좋은 선수를 데려올 수 없다면 있는 자원을 극대화시켜야 한다. 기술적인 부분을 단기간에 끌어올릴 수는 없다. 팀워크와 응집력밖에 없다. 이 부분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다."
-한국과 베트남의 붉은 물결, 무엇이 같고 다른가.
"공통된 부분은 축구에 대한 사랑이다. 한국도 베트남도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다. 다른 점은 베트남은 역사적 배경이 녹아들어 있는 것 같다. 베트남이 U-23 챔피언십에서 연장전을 3번 치렀다. 베트남 역사를 돌아보면 포기하지 않고 강국과 끝까지 싸웠다.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이런 것이 베트남 정신이라 불린다. 축구로 인해 베트남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준 것 같다."
-베트남 선수들의 K리그 진출 가능성은.
"내가 K리그를 잘 알고 있으니 어느 정도 조언을 해줄 수는 있는 일이다. 꽝하이와 같은 선수들은 소속팀에서 동남아 국가에 보낼 생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베트남 선수들 중 몇 몇 선수는 K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는 경쟁력과 기량을 가지고 있다. 쯔엉은 사실 기량을 좋은데 스타일이 한국과 맞지 않았고,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지금 다시 도전하면 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시안게임에서 베트남 언론의 비판도 받았다.
"아시안게임 조별리그 일본전에서 로테이션을 돌리지 않고 최정예로 나섰다고 비판을 한 언론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극소수의 언론이 이런 비판을 했다. 대부분의 베트남 기자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해줬다. 일본을 지금껏 한 번도 못 이겼는데 체력 안배를 하다 참패를 당한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일본전은 체력 안배가 아니라 정면 돌파를 할 상황이었다. 토너먼트 흐름과 분위기도 생각했어야 했다. 일본을 잡았고, 내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을 한다."
◇베트남의 붉은 물결은 끝나지 않았다
베트남의 붉은 물결은 끝나지 않았다. 베트남 축구는 더욱 큰 물결을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는 U-23 대회였다. 이제부터는 A대표팀이다. 박 감독의 본격적인 시험무대인 셈이다. 오는 11월 시작되는 동남아시아 대륙 대회 스즈키컵을 시작으로 내년 1월 2019 아시안컵이 박 감독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박 감독은 더 멀리 월드컵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베트남 A대표팀은 전력이 약하다는 평가다.
"약하지 않다. 많은 이들이 베트남 A대표팀 주축이 U-23 대표팀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내가 볼 때는 40% 정도가 U-23 선수들이다. 성인 중에서 훌륭한 선수, 경험 있는 선수들이 많다. 베트남 A대표팀을 약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시안컵에도 진출했다. 스즈키컵에서도 1번 시드를 받았다. 이 대회에서 10년 만에 우승을 기대하고 있다."
-아시안컵에서는 아시아 최강 이란과 한 조다.
"솔직히 아직 아시안컵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일단 스즈키컵에 집중하고 있다. 이 대회 마친 뒤 3주 후에 바로 아시안컵에 나선다. 피로 누적이라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 발을 맞췄던 멤버가 그대로 아시안컵에 간다는 것이다. 이란은 아시아 최강호다. 물론 힘든 상대다. 하지만 낙관적인 것은 베트남은 중동 징크스가 별로 없다. 한국, 일본에는 약하지만 중동을 상대로는 강한 모습을 보였다."
-베트남 축구 정체성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베트남 축구협회에 강한 상대와 A매치를 하자고 강조하고 있다. 이 선수들이 강한 상대와 붙으면서 많이 배울 수 있다. 지금까지 베트남은 경기에 끌려 다녔다. 앞으로 어떻게 경기를 지배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는 우리보다 약한팀과 상대하면서 배울 수 없는 일이다. 강팀하고 하면서 스스로 느끼고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변해야만 FIFA 랭킹도 오를 수 있다. 지금 베트남은 랭킹 102위다. 많은 욕심은 없다. 두 자리 숫자로 진입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베트남은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하는 월드컵을 꿈꾸나.
"내가 베트남 기자에게 '베트남은 월드컵에 언제 나갈 수 있나'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베트남은 월드컵에 나갈 준비가 돼 있나.' 곧 다가올 올림픽 출전은 어떻게든 힘을 모아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월드컵은 다른 차원의 무대다. 유소년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지금 많은 이들이 베트남 황금세대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아니다. 유소년 시스템으로 더 좋은 선수들을 발굴해야 베트남 축구에 미래가 있다. 아직 베트남은 유소년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기반이 약하다. 몇몇 프로 구단만 유소년을 육성하고 있다. 나는 유소년 시스템이 없으면 미래가 밝지 않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월드컵을 위해서라면 확실한 목표와 계획이 있어야 한다. 10년 20년 후를 바라보고 계획적으로 경쟁력 있게 추진해야 한다.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베트남의 월드컵 출전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베트남은 경제발전을 하고 있다. 이런 부분이 축구와 함께 발전한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