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만난 록밴드 넬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럴 것이, 지난 2년간 멤버들을 고민스럽게 잡아끌던 숙제를 이제 막 끝낸 참이었다. 스스로 만든 문제지만, 풀어내기까지는 체력적·정신적으로 쉽지 않았다.
넬(보컬 김종완·기타 이재경·베이스 이정훈·드럼 정재원)은 2012년 김종완의 제안으로 한 가지 실험에 나선다. 중력(Gravity)을 소재로 한 3부작 앨범을 발표하는 것. 첫 싱글 'holding onto Gravity'를 2012년 12월에 내놨고, 두 번째 싱글 앨범 'Escaping Gravity'는 지난해 6월에 나왔다. 그리고 신곡 11곡과 더불어 두 싱글을 아우르는 세 번째 앨범 'Newton's Apple'을 올해 2월에 발표했다. 빠르게 신곡이 소비되는 가요계에서 긴 호흡의 연작 시리즈를 발표한다는 건, 용감한 도전에 가까웠다. 지난 10여년간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거의 유일한 록밴드로서의 음악적인 자존심이 돋보였다.
최근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새 앨범 프로모션 중인 넬을 서울 연희동의 한 주점에서 만났다. 바쁜 활동에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여전히 기운이 넘쳤다. 눈 코 뜰 새없이 바쁜 활동 중에서도 ‘뭔가 해냈다’는 후련하면서 대견한 마음이 표정으로 읽혔다.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한 새 앨범 이야기는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긴 대화 속에 음악을 사랑하는 넬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중력 3부작이 드디어 끝났어요. 왜 중력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김종완)"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세상 모든 것에서 작용하는 거니까.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늘 존재하고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잖아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 중력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살면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과 중력이 비슷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중력과 누구나 겪는 이야기를 엮었죠. 사랑·꿈·시간 등은 거부할 수 없는 것들이잖아요. 그것에서 오는 절망감·허탈감 등을 하나씩 이야기해보자는 의도로 중력 시리즈를 기획했죠."
(이재경)"종완이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근데 이렇게 대대적인 작업이 될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약 2년에 걸쳐 3부작으로 선보였어요. 대단원을 마무리한 소감은요.
(김종완)"곡 수가 많아 정말 힘들었어요. 열정적으로 달려들었지만 감정 소모가 많은 작업이잖아요. 이번에 수록된 곡은 21곡이지만 작업한 곡은 두 배 정도거든요. 힘은 들지만 뭔가 굉장히 뿌듯해요. 이번에 완성된 앨범을 받아들었을 때 '우리의 지난 2년이 헛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온전히 우리가 하고 싶은 걸 담아냈으니까요."
-이번 앨범 수록곡 모두 김종완씨가 작사·작곡·편곡을 했어요. 작업 스타일이 궁금하네요.
(김종완)"몇 년 전부터는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휴대폰 녹음기에 녹음을 해요. 금방 까먹기도 하니까요. 한참 지난 뒤에 휴대폰을 뒤적이다가 녹음한 곡을 발견하고 작업하기도 하고요. 작곡을 먼저해요. 작사는 녹음 직전 쓰는 경우가 많고요. 물론 모티브가 될만한 문장 등은 미리 잡아두죠. 그게 바탕이 돼 있으니까 녹음 전에 써도 큰 무리는 없는 것 같아요. 곡 작업은 꾸준히하고 녹음은 몰아서하죠."
(이재경)"종완이가 옆에서 작업하는 걸 보면 정말 놀라워요. 3일 정도 잠을 안 자는건 흔한 일이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체력 하나는 정말 끝내줘요."
-'침묵의 역사'는 가사가 굉장히 슬퍼요.
"남자들은 마음이 멀어지거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아예 말을 안 해 버리잖아요. 이유는 얘기하지도 않고 괜히 짜증만 부리고. 저도 그런 때가 있었어요. 당시 느낀 걸 바탕으로 만든 노래에요."
-'타인의 기억'은 어떤 곡인가요.
(김종완)"한 사람이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과정을 노래한 곡이에요. 내 기억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점점 무뎌지잖아요. 못 잊을 것 같았지만 결국 잊죠. 물론 사랑했던 깊이만큼 잊는 게 힘들지만. 또 사귄 시간 보다 잊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경우도 있고."
-'지구가 태양을 네 번'도 이별에 대한 얘기에요.
(김종완)"너무 다른 마인드를 가진 남녀가 만났다가 헤어진 걸 이야기하는 노래에요. 사랑했던 사람을 잊기까지 4년이나 걸렸다는 내용을 공전에 비유해 만들었어요. 정말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치열하게 싸웠던 연인이 있었어요. 이별에서 비롯된 감정과 겪어야 되는 일들, 절망감,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심리를 녹여낸 곡이에요. 이젠 그런 사람은 못 만날 것 같아요. 나에게 모든 걸 맞춰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어요."
-헤어지고 잊는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김종완) "잊기까지 시간이 좀 걸려요. 20대에는 이별 이후 미치게 힘들어 했어요. 30대가 된 뒤에도 잊기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힘든 기간이 전 만큼 길진 않거든요. 근데 은연중에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추억을 쌓아온 시간과 잊는 시간이 비례하는 듯해요."
(이정훈)"사랑했던 사람이 완전한 타인이 되기까지는 2~3년 정도 걸리는 것 같아요."
(이재경)"사귄 기간 만큼은 아픈거 같아요."
-이별에 관련된 내용이 많네요.
(김종완)"꼭 남녀 사이의 이별만을 뜻하는 건 아니에요. 이별은 사람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나의 꿈과도 이별하게 되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꿈과 멀어지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몽환적인 곡이 굉장히 많아요. 취중에 녹음도 하나요.
(김종완)"데뷔 때부터 100곡 정도 만들었는데 한 2번 정도는 있었던 것 같아요. 정규 3집 '힐링 프로세스'에 수록된 '미닝레스'와 정규 4집 '세퍼레이션 앵자이어티'의 '언더바'요. '미닝레스'는 녹음 할 때 느낌이 잘 안 살아서 술 마시고 약간 취한 상태에서 해봤죠. 결과는 만족스러웠어요. '언더바'는 술 마시고 기분이 좋아서 녹음한 곡이에요. 오르간과 보컬 밖에 없는 곡이라 작업도 금방 마쳤죠."
-타이틀곡은 정해두고 앨범을 만드나요.
(김종완)"타이틀곡 선정은 굉장히 단순해요. 길을 지나다가 들었을 때 기분 좋을 만한 곡을 선택하죠. 많은 사람들이 들었을 때 기분 좋아질 것 같은 곡이요. 무겁거나 딥한 노래가 길에서 흘러나오면 이상하잖아요.(웃음) 타이틀곡은 어렵지 않게 정해요. 그 보다 수록곡 구성과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심혈을 기울이죠."
(정재원)"이번 앨범은 2번부터 6번까지(1번은 연주곡이라 생략) 타이틀곡으로 아무거나 해도 상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두 좋은 곡이고 자신있는 곡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