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하는 이병헌이 무섭고 날카롭다면 인터뷰하는 이병헌은 그 이상으로 노련하다. 관록이 쌓인다고 해서 입담까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연기력만큼 말솜씨도 타고났다. 치고 빠지는 센스는 '천상유수'가 따로 없다.
가볍고 유쾌한 질문에는 그 이상의 재미섞인 답변이 뒤따르고, 어느 정도 답을 정해놓고 던진 예민한 질문에도 현답은 기본, 껄껄 웃으며 유연하게 넘어간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때마다 놀라게 만드는 것도 이병헌의 재주다. 천부적 재능이다.
5년 전 1000만 돌파에 성공한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 감독)'을 통해 그 해 가을 스크린을 뒤집어 놓았던 이병헌은 그 보다 더 깊어진 정통사극 '남한산성(황동혁 감독)'으로 올 추석 스크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흥행보다 '작품성'이 먼저 거론되고 있는 대작이다. 일각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상업성을 작품성이 뛰어 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심에는 역시 이병헌이 있다. 작품보는 눈도, 그 작품을 낚아채는 솜씨도 탁월하다. 갈고 닦아놓은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행보다.
이미 1000만의 맛을 본 이병헌이지만 "정상적인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고 직언을 날리는데 거침없다. '남한산성'의 손익분기점은 약 500만 명. 혹여 흥행에 성공하지 못해도 감독·배우들의 만족도는 이미 최상이다. 그 마음이 관객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을리 없다. 이병헌은 또 부러운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인터뷰②에서 이어집니다. - 어떻게 보면 '남한산성'은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 중심이 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감독 예술이 될지, 배우 예술이 될지는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을 선택함에 있어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작품 자체가 나에게 울림을 줬는지, 안 줬는지가 선택의 가장 첫 번째 기준이 된다. 슬픈 영화도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 않나. '남한산성'은 울림의 깊이가 깊고 클 것이라 생각했다."
- '작품보는 눈'이 언급되는 이유 아닐까. "내가 읽은 느낌 그대로 이야기 되고, 영화로 표현된다면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지나가 버린 역사다. 가상도 아니고, 엔딩을 우리 마음대로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더 안타까웠다."
- 우려되는 마음은 없었나. "흥행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난 오히려 이게 더 좋았다. 영화가 승리의 역사만 고집하고, 우리만 잘났다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 암울하지만 실패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선택하면서 본다는 것도 좋았고, 이것을 영화화 하겠다고 한 사람들도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 대작이 나오면 흥행 언급이 빠질 수 없고, 1000만 돌파 가능성과 직결된다. "관객이 많이 드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좋은 영화였다'는 말을 듣는 것이 나는 더 좋다. 1000만이 넘는 것도 되게 축하하고 좋은 일이지만, 정상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000만을 넘고 머릿속에서 이야기와 이미지가 쉽게 날아가 버리는 것 보다는, 1000만이 안 되도 정서가 남아있는 것이 더 좋은 영화 아닐까 생각한다. 진심이다."
- 그래서 작품 선택도 다양하고, 그래서 '믿고보는' 수식어도 얻게되는 것일까. "오로지 흥행만 생각하고, 특정 이미지만 생각했다면 어쩌면 '싱글라이더'는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 스스로 그러한 이미지에서 벗어 나려고 하는 것 같다. 당연히 못 미더운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나. '무조건 믿고 볼거야' 보다 내 필모그래피를 쭉 놓고 '다양하니까 골라보면 돼'라고 생각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 쉼없이 활동하고 있다. "할리우드 작품을 찍는다고 몇 개월 해외에 나가있을 때, 우리나라 영화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잠깐이지만 안에 있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은 분명 다르다. 과거 중국·홍콩 영화들이 전세계 영화지에 실릴 때 '와,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 영화들이 그렇더라. 객관적으로 바라보니까 더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끌리는 작품이 있으면 체력이 될 때까지 하자'는 주의다. 물론 몸에 두개가 아니니까 쉬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고, 보는 사람이 지칠 수도 있으니 너무 자주 나오는 것도 좋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조율하면서 활동할 계획이다."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준비는 잘 되고 있나. "하나도 못했다. 감독·작가·배우들이 다 같이 모여 미팅은 했는데 대본을 안 주셔서 리딩은 못했다. 기다리고 있다.(웃음)"
- 무려 9년 만의 드라마다.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선택에 큰 영향을 끼쳤을까. "'아이리스'가 마지막이었으니까 오래되긴 했다. 이번 드라마는 작가님도 작가님이지만 소속사 손석우 대표의 힘이 컸다.(웃음) 사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대사를 맛깔나게 쓴다.' 난 솔직히 말씀드려서 드라마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도 사람이라면 전성기가 있을텐데, 특히 방송은 작가의 예술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다들 하나같이 '김은숙 작가 대본은 언제봐도 예술이야. 대사가 끝내줘'라고 하니까 내 입을 통해 직접 연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 파트너 김태리와 나이 차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어떨 것 같은가. "아직 모르겠다. 대본도 안 나왔는데 미리 뭘 예상하고 예측할 수는 없지 않나.(웃음) 다만 내가 한참 '내부자들'로 상을 받으러 다닐 때 같이 몰려 다녔던 사람이 나·손예진·김태리·박정민이었다.(웃음) 무슨 영화 한 편을 찍은 것 같다. 열 몇 개 시상식 중 반 이상은 만났다. 최근 촬영을 마친 '그것만이 내 세상'을 정민이와 함께 찍었는데 그래서인지 빨리 친해졌고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서먹하지 않게 잘 마쳤다. 태리 씨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 현재 배우로서 하고 있는 고민은 무엇인가. "고민이 있기는 한데 그 고민의 주제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늘 다르다. 고민을 하다보면 해결되고 또 다른 고민이 생기지 않을까. 없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