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장준환 감독이 작품으로 제5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내심 감독상을 기대했지만 호명되지 않은 탓에 마음을 비우고 앉아있던 찰나, 마지막 순간 들려온 작품명이다. 장준환 감독은 생각했던 소감도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무대에 올라 얼떨떨한 마음으로 기쁨을 만끽했다. 2003년과 2004년 상업영화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로 각종 영화제와 시상식 단골 손님으로 불렸던 장준환 감독은 유일하게 백상에서만 트로피를 품지 못했다. 그 아쉬움을 14년만에 풀었다.
장준환 감독에게 '1987'는 눈물 버튼이나 다름없다. "평소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고 여러 번 강조했지만 '1987' 관련 행사가 있을 때마다 눈물을 보이는 장준환 감독을 포착할 수 있었다. "고민했던 만큼 마음의 짐도 컸던 것 같아요. 영화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이야기가 꾸준히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크죠." 개봉 후 반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1987'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찾은 장준환 감독이다. 고(故)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추모식에 참석하는 것도 매 해 챙겨야 할 일정이 됐다.
장준환 감독은 수상 후 "아내 문소리를 언급하지 못했다"며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장준환 감독과 문소리는 감독과 배우로 만나 지난 2006년 결혼, 2011년 딸 연두를 낳았다. "딸에게는 잘 놀아주는 아빠이면서 미안한 아빠"라고 토로한 장준환 감독은 "배우 활동을 하는 아내에게는 많은 혜택과 긍정의 에너지를 받는다"며 고마워 했다.
'지구를 지켜라(2003)',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 '1987(2017)'까지 작품을 선보이는 텀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타 감독들에 비해서는 꽤 오랜 준비 기간을 필요로 한다. 차기작은 역시 미정, "'1987'을 잘 마무리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장준환 감독이다. 은근슬쩍 55회 백상 심사위원 자리를 요청하자 장준환 감독은 "'촬영 들어간다'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시원한 맥주를 쭉 들이켰다. 더할나위없이 반가울 소식. 장준환 감독의 행보를 아낌없이 응원한다.
※취중토크①에서 이어집니다.
- 백상 GV 당시 '기회가 되면 우디네극동영화제 반응을 전해주겠다'고 했어요. "아, 그것도 소감으로 말하려고 했는데 잊었네요. 어떻게 보면 '1987'은 우리의, 우리나라의 이야기잖아요. 인물도 너무 많고요. 가끔 외국영화를 볼 때 '쟤 아까 죽었는데 왜 또 나와?' 싶을 때가 있거든요. 얼굴 구분이 잘 안 되서요. 그 분들도 그럴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갈 땐 큰 기대를 안 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뜨거워 놀랐어요. 영화에 집중하는 눈빛이 걱정될 정도로 진중하시더라고요. 우디네영화제는 관객상이 대상이에요. 그걸 '1987'이 받았죠. 물론 평소 아시아 영화를 많이 보는 분들이 자리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뜻깊었어요. 박수도 길게 쳐 주셔서 나중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 상영은 끝났지만 '1987' 관련 행사들이 많아요. "'1987'은 특히 더 노심초사하면서 걱정한 부분들이 많은 작품이에요. 유가족 분들의 마음이 혹시라도 상한다면 우리가 영화를 만든 뜻과는 달라지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을까' 끝까지 긴장할 수 밖에 없었죠. 또 '이 이야기를 관객들이 잘 즐길 수 있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뒤따랐고요. 아주 기본적이지만 그 기본을 해내는게 쉽지는 않았어요. 번 아웃이라고 하죠? 지금은 그런 것들이 싹 다 타버린 것 같아서 관련 행사들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어요."
- '1987'이 낳은 긍정적 영향력이라 봐도 될까요. "학교, 시민단체, 행정단체 등 많은 곳에서 관심을 주셨어요. 영화 '1987'은 1987년의 어떤 아름다운 부분을 보려고 노력했고, 그걸 이야기로 만들어서 나눈건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를 좀 더 확장시켜 1987년을 들여다 봤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었죠. '30년 전 저렇게 순수하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발걸음을 걸었는데, 왜 30년만에 다시 광장에 나가야 했는지, 당시 희생되신 열사 분들을 비롯해 목청 높여 소리치며 뛰어다닌 분들의 피땀이 지금까지 제대로 흐르고 있는지, '그 날이 오면'이라고 외친 열사들의 꿈처럼 그 날은 왔는지, 그 날을 향해 가고는 있는지' 그런 의미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기 위해 제 스스로, 자발적으로 많이 참여하고 있어요."
- 고(故)이한열 열사 추모 행사에도 참석했죠. "매년 참석할 생각이에요. 앞으로도 쭉이요. 1년에 두 번 있어요. 1월에 고 박종철 열사 기일이 있고, 이한열 열사는 7월에 돌아가셨지만 추모제는 6월9일 전 후에 진행하죠.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지만 '1987'을 연출한 만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 '1987'은 이한열 열사를 연기한 강동원 씨의 영향력이 확실히 컸어요. "동원 씨가 촬영 때문에 미국에서 있잖아요? 참석은 못했지만 추모식이 있다는 걸 알고 그 먼 곳에서도 꽃을 챙겨 보냈더라고요. 특별한 선물이 됐어요. 고맙고 고맙죠. 언제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런 배우예요."
- 현재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를, 대화를 잘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뭘 하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잖아요. 요즘에는 SNS나 메시지를 이용하는데 긴 문장들도 쓰긴 하지만 대부분 짧은 문장으로 해결하고 '여기서 뭐 더 있어?'라는 식으로 끝나는 것 같아요. 빨리 빨리 소통하죠. 장점도 있지만 아쉬움이 생기더라고요.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때로는 표정도 눈빛도 보면서 또 다른 무언가가 생기는 부분이 있는데 단절된 느낌이라서요."
- 그 과정에서 오해도 생기죠. "흔히 '민주주의, 민주주의' 말은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를 언제부터 제대로 할 수 있는거지?' 싶어요. 민주주의는 서로 의견을 나누고 결정하는 거잖아요? 우리나라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일이 날 때마다 이리 슥 갔다가 저리 슥 가면서 어떤 깊이있는 이야기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이쪽에 우르르 몰렸다가 '저기도 있대!' 하면 그쪽으로 또 우르르 몰려가는. 나쁘다는건 아니지만 그런 현상에 관심이 생겼어요."
- 작품 활동 혹은 감독이라는 직업에 대한 고민도 하나요. "제가 작품을 좀 띄엄띄엄하는 편이라.(웃음) '그만 해야지' 이 생각을 할 때는 아직 아닌 것 같아요. 다만 할 때마다 '이제는 좀 편하겠지'라는 기대가 있는데 막상 시작하면 또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제가 여성은 아니지만 영화를 만들 때마다 아이 낳는 것처럼 하나하나 공들이고 힘들여 만들다 보니까 할 때마다 어렵기도 해요. 빠르고 쉽게 건드리면서 '또 하나 해보자~' 이런 생각이 잘…. 저는 평생 안 들 것 같기도 해요."
- '다른 것을 해봐야겠다' 생각해 본 적도 있나요. "그럼요. 감독이 너무 어렵고 어지럽고 힘들어서 '인형 눈 박는 일'이 하고 싶었을 때가 있어요. 절대 그 일이 쉽다는건 아니에요. 오로지 행위 하나에만 집중해서 똑같은 일을 무한 반복하는거죠. 그땐 그냥 그런 식으로 '하루가 가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 실제로 시도해 보기도 했나요. "다른 업종으로 계획했던 적은 있어요. 영화를 제대로 시작하기 전이긴 하지만 '병아리 감별'을 하려고 진지하게 준비했어요. 병아리 감별이 태어난 병아리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병아리가 되기 전 암수를 구분하는 거예요. 알만 보고요. 그걸 빨리 빨리 최대한 정확하게 해내는 것이 병아리 감별사죠."
- 뭔가 전혀 상상 밖의 직업이에요. "한 때 유학 준비를 했어요. 돈이 없으니까 가서 병아리 감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하려고 했죠. 그땐 되게 그럴싸 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어요. 농장은 오하이오 시골에 있는데 거기서 어떻게 왔다갔다 하며 공부를 하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죠.(웃음)"
- 성격에서 오는 어려움은 없었나요. "아시다시피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에요. 희순이와 단편 찍을 땐 감독인데도 '몰라요' 하기 바빴으니까요.(웃음) 처음 영화 아카데미에 갔을 때도 영화 공부를 시작하긴 했지만 저 역시 '영화감독'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진짜 영화감독의 모습일거라 생각했어요. 빵모자 쓰고 굉장히 카리스마 있게 지시하고 여기저기 뛰어 다니고. 저와는 정반대죠.(웃음) 내심 걱정하면서 다녔는데 그 때 동기 중에 봉준호도 있었고 지금까지 활동하는 여러 감독들이 있었어요. 막상 다들 그런 스타일은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이미지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죠. 각자 성향이 있는거니까요."
- 하다보면 자연스레 바뀌게 되는 부분들이 있죠. "맞아요. 필요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죠. 어쨌든 커뮤니케이션이란걸 하잖아요. '1987' 같은 경우엔 수 많은 보조 출연자들이 광장에 모인 장면을 찍는 날, 그들에게 너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예요. '왜 내가 이 작품을 시작했으며, 그 시작은 무엇이었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 신 때문이었다. 결국 당신들이 주인공인 영화다.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광장에 나온 당신들이 주인공이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고 했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상황이 어떻든,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든 하면 또 하게 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