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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는 국대다' 박종팔, "1980년대 파이트 머니, 한 게임에 1억5천만원"

“80년대, 미국 원정 경기 대전료만 무려 1억 5천만 원!” MBN ‘국대는 국대다’의 새로운 스포츠 레전드 박종팔이 80년대 ‘리즈 시절’에 받았던 상상 초월 ‘파이트 머니’의 실체를 공개한다. 1980년대 복싱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던 박종팔이 23일(오늘) 밤 9시 20분 컴백하는 MBN ‘국대는 국대다’를 통해 은퇴 34년 만의 복귀전을 펼쳐 초미의 관심을 모은다. 특히 박종팔의 대결 상대는 2021년 아시아 챔피언인 ‘현역 최강’ 정민호로, 37년의 나이 차가 나는 두 사람은 한국 복싱 역사에 길이 남을 ‘세기의 매치’를 선보이며 스포츠 마니아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 전망이다. 이와 관련 박종팔이 다섯 페이스메이커 전현무-배성재-홍현희-김동현-김민아와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만나, 전성기 시절에 받았던 천문학적 ‘파이트 머니’를 구체적으로 공개해 ‘입틀막’을 유발한다. 먼저 박종팔은 “80년대에는 월급이 30만~40만 원 정도 하던 시절인데, 국내 챔피언 경기에서 약 1천만 원 정도의 금액을 받았다”며 운을 뗀다. 이어 “미국 원정 경기 당시에는 대전료를 1억 5천만원 정도 받았다”고 공개한다. 이에 다섯 페이스메이커들은 “그 시절 그 금액을 받았다고?”라며 입을 떡 벌린다. 나아가 박종팔은 “경기가 잡히면 바로 땅을 보러 다녔다”고 회상해, ‘선 투자, 후 경기’를 치를 정도의 대범함과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전현무는 “그래서 (아파트를) 샀어요, 안 샀어요?”라며 ‘국대는 국대다’의 공식 질문(?)을 던진다. 박종팔은 깊은 한숨을 쉰 뒤 솔직한 답을 내놓는다. 과연 박종팔이 어마무시했던 파이트 머니를 재테크로 승화시켰을지 궁금증이 쏠린다. 제작진은 “박종팔이 다섯 페이스메이커들과 만나 복귀전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등장부터 ‘천상계급 악력’을 발휘, 출연진을 경악케 했다. 또한 10년 여의 찬란했던 복싱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한편, 당시 라이벌이었던 라경민 선수와의 일화와 ‘비운의 복서’ 동료 김득구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 모두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복싱 레전드’ 박종팔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느끼실 수 있는 한 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MBN ‘국대는 국대다’는 이제는 전설이 되어 경기장에서 사라진 스포츠 ‘레전드’를 소환해, 현역 스포츠 국가대표 선수와 맞대결을 벌이는 리얼리티 예능. 현정화-이만기-남현희의 성공적인 복귀전을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박종팔과 함께 돌아오는 ‘국대는 국대다’ 7회는 23일(오늘) 밤 9시 20분 방송한다. 이지수 디지털뉴스팀 기자, 사진 제공=MBN ‘국대는 국대다’ 2022.04.2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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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2' 성시경 "완벽한 방송 캐릭터" 극찬 부른 레전드 이만기

'씨름 레전드' 이만기가 영화 같은 천하장사 등극기부터 반전의 편식쟁이, 겁쟁이 매력으로 감동과 웃음을 동시에 안겼다. 지난 25일 방송된 채널S 예능 프로그램 신과 함께 시즌2'에는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가 출연한 가운데, 4MC가 '신의 주문'에 얽힌 토크를 나누고 메뉴 추천 경쟁을 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이만기는 씨름판의 아이돌이자 광고계까지 접수한 스포츠계 슈퍼스타였다. 이용진은 이만기에 대해 "한국판 드웨인 존슨"이라고 칭했지만, 이만기가 한 덩치 하는 성시경 옆에서 '상대성 덩치 이론'을 보여주자 "엄청 큰 독일 소시지 같다"라고 들었다 놓는 화법을 자랑했다. 천하장사 10회, 백두장사 18회, 한라장사 7회 등 씨름선수로 활동하는 7년 동안 49회 우승 기록을 보유한 전무후무 씨름의 전설 이만기. 그는 독보적인 실력으로 상대팀의 견제가 심해 씨름의 룰까지 바꾼 이야기부터 어머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아이돌급 인기'를 언급했다. 박선영의 '키워드로 알아보는 너의 이름은?'에서는 10대부터 60대 이상 국민 1,000명에게 조사한 '이만기' 하면 생각나는 키워드를 주제로 정답을 맞히는 시간을 가졌다. '가창력', '이스방', '닭다리 종아리', '국회의원' 등이 키워드로 제시된 가운데, '천하장사'와 '깝죽거리지 마라' 등이 추가됐다. 이만기가 앨범을 낸 가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만기는 자신의 노래를 아는 신동엽을 신기해하며 즉석에서 라이브를 들려줬다. 과거 예능 '백년손님'을 통해 '이스방'으로 사랑받을 당시 일으켰던 만행과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이유도 공개하며 웃음을 안겼다. '레전드 씨름 황제' 이만기의 영화 같은 천하장사 등극기도 공개됐다. 공부를 목적으로 '씨름의 본고장'인 마산으로 전학을 갔다는 이만기는 특별활동 시간 얼떨결에 씨름을 하게 됐다며 때마침 소년체육대회가 부활하고, 대학생 때 프로 씨름이 만들어지며 천하장사 타이틀을 얻게 된 인생 스토리를 털어놨다. 그는 "각본처럼 인생이 짜인 느낌이었다. 아 이게 운이구나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감동적인 스토리는 "그 많은 상금은 국회의원에 다 터신 건가요?"라는 박선영의 기습 질문으로 깨졌고, 당황한 이만기는 "그런 질문이 있어요?"라고 발끈했다. '깝죽거리지 마라' 키워드에 얽힌 영원한 라이벌 이만기와 강호동의 대결도 소환됐다. 과거 한참 후배인 강호동과의 씨름 대결에서 이만기는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강호동에게 "깝죽거리지 마라"라고 경고했고, 강호동은 선배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판에게 이르며 깐죽거렸다. 둘의 대화는 예능에서 공개되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만기는 "(강호동을) 저의 뒤를 이을 선수로 생각해서 우리 쪽으로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그런데 (강호동이) 다른 팀으로 가서 경쟁하게 됐다. 당시 (강호동이) 김학용 감독님 팀이었는데, 아마도 (감독님이 강호동에게) 저의 심기를 건드리라고 주문한 것 같다"라고 짐작했다. 그는 '1박 2일'에서 강호동과 20년 만에 씨름 대결을 했던 일을 떠올리며 "2대 1로 이겼다. 아직도 호동이한테는 자신이 있다"라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만기는 이날 씨름에서 이길 '필승법'을 직접 시범으로 보여 주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씨름판의 황제임을 입증했다. 이만기의 '신의 주문' 제목은 '형제장사 만만세'로, 이만기는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초등학교 5·6학년 연년생 형제 씨름 선수에게 대접할 메뉴를 주문했다. 그는 "모든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가 있어야 하고, 초등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해 달라"라며 '영양소가 풍부한 초딩 입맛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당부했다. 마산에서 훈련 중인 초등생 씨름 형제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김성률, 이만기, 강호동이라는 마산의 씨름 계보가 있는데, (형제들이) 계보를 이을 재목이 아닌가 싶다. 이 친구들을 잘 먹여서 훌륭한 천하장사로 키우는 게 꿈이다"라고 말했다. 체격과 다르게 미각의 디테일이 기미 상궁급인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였다. 해외에 나가면 식사를 하지 못해 몸무게가 7kg씩 빠진다는 말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겁쟁이인 사실도 공개됐다. 놀이기구는 물론, 귀신을 볼까 봐 시골에 가면 무서워서 잠도 못 잔다는 것. 천하장사 이만기의 반전 매력에 성시경은 "완벽한 방송 캐릭터인 것 같다"라고 극찬했다. 이어진 메뉴 추천에는 성시경의 '자장면과 탕수육', 신동엽의 '튀김족발', 이용진의 '통문어해물떡볶이', 박선영의 '돈가스와 장어덮밥'이 차례로 공개됐다. 특히 족발 마니아 이만기는 처음 먹어보는 튀김족발을 흡입하며 "오~ 색다른 맛이다", "마산 친구들이 먹으면 좋아하겠네"라고 쉴 새 없이 극찬해 신동엽의 우승을 예감케 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최종 우승은 박선영이 차지했다. 대표 보양식인 장어가 이만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위는 신동엽, 3위는 성시경, 4위는 이용진이었다. 이만기는 "(아이들이) 천하장사가 된다면 (4MC를) 결승 대회에 초대하겠다"라고 약속한 후 선물인 한우 눈꽃 등심을 공개했다. 신동엽과 성시경, 이용진 모두 부러움의 눈길로 박선영을 바라봤다. '신과 함께 시즌2' 30회 게스트는 50년 경력의 중식 대가 이연복 셰프. 이연복 셰프의 인정을 받기 위한 4MC의 적극적인 어필이 펼쳐진다. 3월 4일 오후 8시에 방송되는 '신과 함께 시즌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채널S는 SK B tv에서는 1번, KT Olleh TV에서는 70번, LG U+TV에서는 62번, 이밖에 B tv 케이블 0번, LG헬로비전 133번, 딜라이브 74번, HCN 210번에서 시청할 수 있다. 또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웨이브(wavve)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신과 함께 시즌2'의 방송 VOD를 감상할 수 있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oongang.co.kr 2022.02.2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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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는 국대다' 이만기, 강호동에 "깝죽거리지 마라"...은퇴 계기 고백?

이만기가 MBN ‘국대는 국대다’ 두 번째 스포츠 레전드로 출연, 혜성처럼 등장한 라이벌 강호동과의 천하장사 대결에서 아쉬운 패배를 맛봤던 경기 비화를 생생하게 전한다.천하장사 타이틀만 총 10회 거머쥔 ‘씨름 대통령’ 이만기는 19일(토) 밤 9시 20분 방송하는 MBN의 스포츠 예능 ‘국대는 국대다’에서 은퇴 31년 만에 ‘선수 복귀’를 선언하며, 1980년대 국민 스포츠로 사랑받던 ‘씨름의 황금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초대 천하장사로 등극하기 전까지, 개인전에서 한 번도 우승을 해본 적 없었다”는 이만기는 만 19세에 초대 천하장사가 된 뒤 ‘장사’ 타이틀만 무려 49번, 승률로는 84.9%라는 어마무시한 기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당시 유일하게 승패에서 뒤진 선수가 있는데 바로 강호동이었다.이에 MC 전현무-배성재-홍현희-김동현-김민아는 1989년 백두장사 결승전 영상을 스튜디오에서 시청하고,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에 단체로 놀라워 한다.특히 이만기는 강호동과의 샅바 싸움 중, “깝죽거리지 마라”라고 경고해 모두를 얼어붙게 만드는데 이제는 ‘유행어’가 된 ‘깝죽거리지 마라’ 탄생 비화를 전격 공개한다.또 기습 공격으로 승리를 가져간 강호동의 경기 내용에 대해, “둘 다 잠시 샅바를 놓고 있어서 심판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데…”라며 억울했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만기는 고등학교 6년 후배인 강호동과의 각별한 인연을 언급하면서, “강호동의 등장이 은퇴를 결심한 계기가 됐다”고 쿨하게 인정해 ‘레전드’다운 품격을 느끼게 한다.제작진은 “이만기가 씨름판을 평정하던 자신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던 강호동에 대해 ‘씨름선수 중 가장 천부적인 몸’이라고 평하며 남다른 ‘후배 사랑’을 드러냈다. 이밖에도 은퇴 후 찾아온 공황장애와 이를 극복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털어놓는 등 ‘인간’ 이만기의 삶을 회고한다. 씨름에 대한 진정성 하나로 31년 만에 복귀를 결심한 이만기의 굳은 각오와 열정이 시청자들에게 추억과 감동을 안길 것”이라고 밝혔다.MBN ‘국대는 국대다’는 이제는 전설이 되어 경기장에서 사라진 스포츠 ‘레전드’를 소환해, 현역 스포츠 국가대표 선수와 맞대결을 벌이는 리얼리티 예능. 탁구 여제 현정화가 국가대표 맏언니 서효원과의 경기에서 2:0 승리를 이끌어낸 2회는 최고 시청률이 무려 6.9%(닐슨코리아 기준)까지 치솟으며 올림픽 만큼 ‘핫’한 인기를 증명해냈다. 이만기의 복귀전이 펼쳐지는 ‘국대는 국대다’ 3회는 오는 19일(토) 밤 9시 20분 방송된다.이지수 디지털뉴스팀 기자 2022.02.1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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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영웅 김재엽, '뭉쳐야 찬다' 용병으로 출격…허재 위협

유도계 전설 김재엽이 어쩌다FC 용병으로 출격, 시니어 라인 3인방의 승부욕을 소생시킨다. 29일 오후 9시에 방송될 JTBC '뭉쳐야 찬다'에는 유도 레전드 김재엽이 투입된다. 지난 해 배우 최수종이 단장으로 있던 축구팀 일레븐FC와의 대결에서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줬던 유도영웅 김재엽이 이번에는 어쩌다FC의 용병으로 재방문한 것. 강력한 시니어 에이스의 등장에 이만기, 허재, 양준혁이 견제한다. 어쩌다FC의 전설들은 김재엽을 두고 "강력한 시니어 에이스가 왔다"며 열렬히 환영한다. 김재엽은 "라이벌들이 눈앞에 있어 좋다. 젊은 선수들 빼면 자신 있다"라며 이만기, 허재, 양준혁을 향한 도발을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 감독 안정환 역시 "한 선수가 들어오면 다른 선수가 나가야 한다"며 의미심장한 발언을 던져 긴장감 서린 분위기에 불을 붙인다. 제대로 자극받은 시니어 3인방과 용병 김재엽의 자존심을 건 빅매치가 성사된다. 전직 유도선수의 악력을 시험해 보는 피지컬 테스트 손 씨름 대결이 펼쳐진 것. 특히 유도 그랜드 슬래머 김재엽의 손에 쥐는 힘과 천하장사만 49회에 빛나는 이만기의 하체 힘이 제대로 맞붙는다. 또 김재엽은 본 경기에서도 필드 위를 종횡무진하며 존재감을 떨친다. 철벽 수비도 뚫는 무서운 돌파력과 화려한 페이크 기술로 상대 팀을 압박한다. 김재엽의 플레이를 지켜본 안정환은 "축구 기술은 최고!"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 2020.03.27 09:54
스포츠일반

[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②] '슈퍼스타' 차범근·선동열·최동원…서울올림픽 감동에 푹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①] '박치기왕' 김일에 열광하고 양정모 첫 올림픽 금에 환호[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③] 스포츠 영웅들, 국민에게 희망을 안기다[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④] 2002년 '붉은 물결' 대한민국을 휩쓸다[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⑤] 김연아·이상화·손흥민…천재들의 시대가 열리다 2019.09.23 13:00
스포츠일반

[창간 50 특별기획]한국스포츠 50년, 슈퍼스타 50인, 환희의 50신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 <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89~1999 :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 희망을 안긴 영웅>1997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실의와 고통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안긴 스포츠 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가 곧 희망이자 위로였다. -박찬호(야구)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그는 IMF 위기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긴 영웅이었다.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1997년 14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1998년 15승을 수확하며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2000년 18승을 달성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아시아 최다승이다. 또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동메달 등을 이끌며 야구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세리(골프)IMF 위기의 시절 국민들을 위로했던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박세리다.미국 LPGA 개척자. 1998년 LPGA 무대에 뛰어들었고, 데뷔 4개월 만에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US오픈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특히 US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한 장면은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박세리의 모습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LPGA 25승으로 한국인 최다 우승자 역시 박세리다. -황영조(마라톤)'몬주익의 영웅'의 등장으로 한국 육상은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쳤다.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린 뒤 홀로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힘차게 들고 골인했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육상 첫 올림픽 금메달.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금메달 이후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이후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다시 한 번 포효했고, 1994년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당시 한국 최고 기록인 2분8초09를 기록했다. -심권호(레슬링)심권호라는 이름은 세계 최고라는 의미다.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48kg급 금메달을 목에 건 뒤 1995년 프라하세계선수권,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까지 정상을 차지했다. 48kg급이 폐지되자 54kg급으로 체중을 늘려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를 밟았다. 1998년 예블레세계선수권·1998년 방콕아시안게임·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금메달을 일궈냈다. 하계올림픽 최초 올림픽 2연패, 한국 올림픽 사상 첫 두 체급 석권 그리고 세계 레승링 최초 두 체급 그랜드슬램 달성.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기영(유도)한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는 유도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전기영이다.유도 천재, 업어치기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20세의 나이로 참가한 1993년 해밀턴세계선수권 78kg급에서 우승했다. 한국 역대 최연소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5년 지바세계선수권에서는 86kg급에 도전해 금메달을 차지, 두 체급을 석권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는 1회전을 제외하고 모두 한판승으로 이기며 정상에 섰다. 1997년 파리세계선수권에서도 1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다. -박주봉(배드민턴)배드민턴의 교과서 박주봉.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 배드민턴의 전설이었다.1980년 17세의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됐고, 1982년 덴마크오픈에서 이근구와 한 조로 역대 최연소로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1985년 캘거리세계선수권 우승·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1989년 자카르타세계선수권 금메달·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1991년 코펜하겐세계선수권 1위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6년 '배드민턴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허버트 스칠 상을 수상했다. -전이경(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라 불리는 유일한 선수, 전이경이다. 그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1988년 12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000m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석권, 2관왕에 올랐다. 이어 1995년 요빅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1996년 헤이그, 1997년 나가노까지 개인종합 3연패를 일궈냈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도 1000m와 3000m 계주를 석권하며 한국 여자 최초로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품었다. -허재(농구)농구대통령이 당선됐다. 농구 9단이라 불리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 허재다.중앙대 1학년 시절 농구대잔치에 나서 평균 24득점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어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자 기아 왕조가 구축됐다. 기아의 에이스로 농구대잔치 5연패 등 7회 우승을 일궈냈다. 3번 MVP를 수상했고, 베스트 5에 6회 포함됐다.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1990년 아르헨티나세계선수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넣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홍명보(축구)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다.그는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해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 최초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품었다. 이후 일본 J리그에서 진출하며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한국 대표팀 전설이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 최초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홍명보는 A매치 136경기 출전으로 한국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씨름)이만기를 1인자에서 내려앉히고 새로운 1인자로 등극한 괴물, 강호동이다.이만기의 은퇴는 곧 강호동이라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과 연결된다. 1989년 일양약품에 입단한 20세 강호동은 첫 백두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4강에서 이만기와 첫 공식전에서 맞붙어 2-0으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1990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천하장사에 올라섰다. 이후 백두장사 7회, 천하장사 5회를 차지했다. 최단기간 천하장하 5회라는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이 은퇴하자 씨름의 황금기도 끝났다. <1999~2009 : 불모지에서 태어난 올림픽 스타 그리고 붉은물결 2002년>불모지 한국. 그동안 한국에서 약했던 종목에서 슈퍼스타들이 등장해 행복했던 시기다. 또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박태환(수영)박태환의 등장. 한국스포츠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수영 불모지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15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따더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400m 정상에 섰다. 200m에서도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2011년 상하이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00m, 2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장미란(역도)한국 역도 역사의 새로운 신화, 장미란이 썼다.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5년 카타르세계선수권부터 2006년 산토도밍고·2007년 치앙마이·2009년 고양까지 4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역도계에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압권이었다.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 kg·용상 186 kg·합계 326kg을 기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했고, 2위와 격차가 무려 49kg이나 났다. 압도적인 우승, 압도적인 선수였다. -진종오(사격)한국은 세계최고의 권총 사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진종오가 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2연패를 달성하더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일궈냈다. 2010년 뮌헨·2014년 그라나다·2018년 창원 등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로 김수녕과 함께 역대 한국인 올림픽 최다 메달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승민(탁구)한국 탁구의 마지막 자존심, 유승민이다.2000년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승민은 2004년 이집트오픈에서 우승하며 기대를 받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 금메달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등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의 간판 역할을 했다. 유승민 이후 한국은 단 한 번도 올림픽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승엽(야구)국민타자. 이승엽이 아니면 붙을 수 없는 이름이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홈런왕. 1999년 54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한국 역대 최다인 56홈런을 때렸다. KBO 통산 465개의 홈런으로 역대 1위에 오른 이도 이승엽이다. 타점(1495점) 득점(1351점) 등도 1위다. 홈런왕 5회·MVP 5회·타점왕 4회·골든글러브 10회 등 기록이 이승엽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기도 하다. -안현수(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가 전이경이라면 황제는 안현수다.많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선 경험이 있지만 안현수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선수. 16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3년 바르샤바부터 2004년 예테보리·2005년 베이징·2006년 미니애폴리스·2007년 밀라노까지 세계 최초로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1000m·1500m·5000m 계주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500m 동메달도 추가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메달 신기록이다. -김세진(배구)한국 배구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스타, 김세진이다.1995년 실업배구 삼성화재의 창단멤버로 합류해 삼성화재 왕조를 이끈 스타였다. 김세진이 활약하던 시기 배구는 폭발적 인기를 받았다. 김세진을 앞세운 삼성화재는 리그 9연패를 일궈냈다. 배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2001년 창원아시아배구선수권과 2003년 톈진아시아배구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 월드리그에서 베스트 6에 오르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장훈(농구)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빅맨, 단연 서장훈이다.1994년 연세대를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 때부터 그는 국보급 센터였다. 공격과 수비 외곽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 1998년 청주SK 입단 후 서울 삼성·전주 KCC·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다. 1999년 리바운드 상 수상. 프로농구 사상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왕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프로통산 1만3231득점·5235리바운드 기록, 역대 1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이 이끄는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경주(골프)한국 남자 골프의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 최경주다.1999년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PGA투어 자격을 획득했다.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뉴올리언즈 콤팩 클래식에서 한국 첫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2승을 챙겼다. 이후 AT&T 내셔널 등 PGA에서 6회 우승을 더 차지하며 통산 8회 우승을 기록했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잡초 골퍼라 불리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한국 골프의 자존심을 높인 영웅이다. -박지성(축구)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환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그 중심에는 두개의 심장을 가진 박지성이 있었다.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을 꺾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성적인 4강에 진출했다. 거리는 붉은물결르 뒤덮혔고, 선수들은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중 핵심은 박지성. 그는 2005년 잉글랜드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 최초의 잉글랜드 진출. 이때부터 맨유는 국민클럽이 됐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리그 우승 4회 등 총 13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했다. <2009~2019 : 동계스포츠의 비상 그리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과거 한국의 동계스포츠는 쇼트트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종목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프로스포츠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연아(피겨)한국 동계스포츠의 역사는 김연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눌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김연아가 나온 건 기적이다.김연아는 한국을 넘어 세계 피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하이라이트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김연아는 쇼트 78.50점, 프리 150.06점 총합 228.56점으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올림픽·세계선수권·4대륙 선수권·그랑프리 파이널 등을 모두 제패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역사에 기록됐다. 11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상화(스피드스케이팅)'빙속여제' 이상화를 빼놓고 한국 동계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2010년 밴쿠버올림픽 여자 500m에서 76초09로 우승, 한국 여자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74초70, 올림픽 신기록으로 2연패에 성공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3개 대회 연속 메달을 딴 선수로 남았다. 2013년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나온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윤성빈(스켈레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썰매 종목 금메달을 딴 주인공, 윤성빈이다.한국 스켈레톤의 간판인 그는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1∼4차 레이스에서 무려 3차례나 트랙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1∼4차 합계 3분20초55로 정상을 차지했다. 한국과 아시아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켈레톤 불모지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윤성빈. 그의 헬멧에 그려진 아이언맨처럼 그는 한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다. -양학선(체조)한국 체조의 새로운 역사, 도마의 신이 창조했다. 양학선이다.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2011년 도쿄세계선수권 우승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양학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신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구에서 단 한 명만 할 수 있는 최고난위도 기술 '양학선'을 앞세워 도마 금메달을 차지했다. 16.533점. 압도적 우승이었다. 한국 체조 역사상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2013년 앤트워프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황경선(태권도)태권도 종주국 한국. 수많은 선수가 세계 정상에 섰다. 그중 가장 많은 최초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이는 '태권여제' 황경선이다.18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67kg에 나서 동메달을 차지한 그는 2005년 마드리드세계선수권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그리고 2007년 베이징세계선수권까지 재패한다. 남은 건 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멈추지 않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태권도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최초의 올림픽 3회 연속 진출을 일궈냈다. -박인비(골프)미국 LPGA에는 한국 여성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 최선봉에 자리를 잡은 스타, 박인비다.골프 여제의 2008년 US오픈 우승. 박세리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깨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US오픈 총 2회 우승 등 메이저대회에서 7회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최고 기록이다. LPGA 통산 19승으로 박세리에 이은 2위다. 56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유지했고, 4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아시아 최초로 달성하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 역시 박인비 품에 안겼다. -정현(테니스)2018년 1월, 한국에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그 바람은 정현이 일으켰다.정현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2018년 호주오픈 1~3라운드에서 미샤 즈베레프·다닐 메드베데프·알렉산더 즈베레프를 연이어 꺾으며 기대를 받았다. 16강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노박 조코비치.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 한국에 정현 신드롬이 일어났다.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마저 넘으며 4강에 올라섰다. 4강에서 로저 페더러를 만나 부상으로 기권했다. -김연경(배구)한국 여자배구에 이렇게 독보적인 선수는 없었다. 김연경이다.흥국생명에 입단한 2005년. 득점상·공격상·서브상·신인왕·정규리그 MVP·챔피언결정전 MVP까지 싹쓸이한다.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인 지 알 수 있는 기록. 이후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올랐다. 2009년 일본 JT마베라스 유니폼을 입은 뒤 2011년 터키 페네르바체로 이적했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다. 가는 팀마다 우승으로 이끌면서 가치는 올라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배구대표팀에서도 기둥이었다. -류현진(야구)21세기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류현진이다.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자마자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석권한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가 됐다.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로 이적한 첫해 14승 올리며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후 꾸준함을 보이다 2019년 평균자책점 전체 1위를 기록, 올스타전 선발로 나서는 등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야구대표팀 역사와도 함께 했다. -손흥민(축구)지금 한국 축구는 '손흥민의 시대'다.2010년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레버쿠젠을 지나 201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세계 톱클래스 공격수로 거듭났다. 특히 2018~20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우승후보 맨체스터 시티를 침몰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손흥민을 앞세운 토트넘은 최초로 결승에 올랐다. 축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주인공.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2019.09.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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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어부' 뛰는 이경규, 나는 이만기…낚시 신경전 "배에서 내려"

천하장사 이만기가 '도시어부' 게스트로 출연, 이경규와 일촉즉발의 신경전을 펼친다.9일 방송될 채널A 예능프로그램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 88회에는 이만기가 일루셔니스트 이은결과 함께 게스트로 출격하는 모습이 그려진다.배가 출항하기 전 "만선해서 올게요"라며 자신 있게 출발한 이만기는 거센 파도에 겁에 질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여 웃음을 자아낸다. 파도가 너무 세다는 이만기의 말에 이경규는 "갈래? 배에서 내려줄게, 가라"며 귀찮음을 표한다. 장도연은 "자이언트 베이비"라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이만기는 자신에게 신경도 안 쓰는 이경규를 원망하며 이덕화를 향해 "그래도 형님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이에 이덕화는 "경규는 자기 것 하기에도 바쁘다. 이런 데 나와 봐야 인간성이 바로 보인다"고 화답해 부창부수 못지않은 호흡을 자랑한다. "두 사람 때매 미치겠네!!"라며 폭발한 이경규는 이만기가 전갱이를 먼저 잡자 기세가 꺾인다. 이만기는 "행님 뭐 하세요, 고기 안 잡고. 뭐 보여준다더니만 사이비네"라며 약을 올리면서 톰과 제리 못지않은 앙숙 케미스트리를 펼친다.이덕화가 "낚시는 만기가 한 수 위"라고 편을 들자 이경규는 "고기 잡더니 너무 기고만장해졌다.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며 벼른다. 이만기에게 밀린 이경규는 문어를 잡는 데 성공하자 "내가 문어의 왕이다! 내가 문어다, 이놈들아! 내가 '올드보이'다!"라고 외친다. 자신감을 찾은 이경규는 이만기에게 "여권 있느냐? 없으면 준비해라"라고 물어 시선을 끈다.제대로 라이벌을 만난 이경규와 이만기의 기 싸움의 결말은 어떻게 될지 오늘(9일) 오후 11시에 방송되는 '도시어부'에서 공개된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 2019.05.0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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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정, ‘여자천하장사’ 타이틀 2년 만에 탈환

‘여자 이만기’ 임수정(30·부산)이 여자 씨름의 발상지인 구례에서 3년 만에 '여자천하장사' 타이틀을 탈환했다.1일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실내체육관에서 벌어진 '제5회 여자천하장사대회'에서 임수정은 1000여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라이벌 송송화(47·경남)를 2-0으로 누르고 씨름 여제에 등극했다. 1~2회 여자천하장사에 오른 임수정은 뛰어난 기술을 앞세워 자신보다 10㎏이상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상대를 배지기와 안다리 등의 기술을 사용해 제압했고 3년만에 다시 여자천하장사대회를 석권했다.임수정은 여자천하장사 16강과 8강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8월30일 개인전에서도 국화급 준우승에 그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해 천하장사 탈환이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4강전에서 어려운 상대인 이다현을 2-1로 누르면서 기세가 살아났고 결승전에서는 트레이드마크인 엉덩배지기로 우승을 결정했다. 황경수 국민생활체육전국씨름연합회 처장은 "임수정은 상대에 맞게 기술을 달리 한다"며 "연습량이 라이벌들에 비해 부족해 보였는데 기술로 승부를 지었다"고 평가했다.한편 이번 여자천하장사대회를 계기로 여자 씨름이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 씨름계의 평가다. 구례군청의 반달곰씨름단은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우승하며 강력한 면모를 과시했다. 또 전력을 보강한 대구미래대학도 임수정이 버틴 부산을 물리치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박에도 새로운 얼굴들이 입상에 성공하면서 여자씨름에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씨름계의 분석이다. 179㎝의 큰 키를 가진 구례군청의 조현주는 처녀출전해서 경기도의 강자 박미정을 들배지기로 누르며 무궁화급에서 준우승, 여자천하장사에서는 8강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대구미래대학의 김한솔도 무궁화급 3위 여자천하장사 8강에 오르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채준 기자 doorian@joongang.co.kr 여자천하장사대회 체급별 우승자 ------------------------------------- 종목 우승자(소속) -------------------------------------- 여자천하장사 임수정(부산) 매화급 박선(구례군청) 국화급 서현(구례군청) 무궁화급 이다현(구례군청) 단체전 구례군청 ------------------------------------------ 2013.09.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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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여자 천하장사 씨름대회’ 구례에서 열린다

여자 씨름의 발상지인 구례에서 여자 천하장사가 탄생한다.'제5회 국민생활체육 전국여자천하장사씨름대회'가 8월30일부터 9월 1일까지 전라남도 구례군 실내체육관에서 열린다.여자 씨름의 발상지 구례군에서 개최되는 이번 대회는 시ㆍ도 예선을 거친 전국 각지에 내로라하는 여자씨름 고수 500여명이 참가하여 기량을 겨룬다.이번 대회는 기존의 5체급을 매화급(60kg이하)·국화급(70kg이하)·무궁화급(80kg이하)등 3체급으로 줄여 더욱더 박진감 있는 경기를 치르게 됐다. 또 시·도 대항전 성격인 단체전을 신설해 시청자 및 관중들에게 단체전의 묘미를 즐길 수 있게 했다. 마지막 날에는 통합장사인 여자천하장사전이 열린다.이번 대회 가장 큰 이슈는 무제한급인 '여자천하장사'의 향배다.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는 리그 최강으로 평가 받고 있는 임수정이다. 임수정은 영양군으로부터 유니폼스폰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임수정은 뛰어난 테크닉이 강점으로 ‘여자씨름의 이만기’로 평가받고 있다. 임수정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상대는 구례군청 반달곰씨름단 소속의 이다현이다. 세기에서는 이다현이 아직 임수정을 능가하지 못했지만 파워와 자신감 만큼은 이미 임수정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고성에서 열린 대통령배에서는 임수정의 라이벌로 평가 받고 있던 박미정을 누르며 최강자 대열에 합류했다.이밖에도 임수정을 누른바 있는 박미정이 출사표를 던졌다. 또 체력만 아니면 모든 면에서 최고급으로 평가 받는 아줌마 씨름꾼 송송화, 2012 대통령기에서 임수정을 누르고 이변을 연출한 서현도 여자 천하장사에서 우승권에 근접했다.황경수 사무처장은 "우승권에 근접한 선수들의 실력차는 거의 없다. 대회를 앞두고 얼마나 많은 훈련을 소화했는지가 승부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채준 기자 2013.08.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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