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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일반

'메달 획득 실패' 여자 배구, 대회 마지막 날까지 설렘 안겼다

한국 여자 배구가 아름다운 도전을 마쳤다. 메달 획득은 실패했다. 마지막까지 투혼을 발휘하며 스포츠팬에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은 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세트 스코어 0-3(18-25, 15-25, 15-25)으로 완패했다. 세르비아 에이스 티아나 보스코비치에게만 33점을 내줬다. 전력 차이를 절감했다. 김연경은 11득점 하며 분전했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했다.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획득 이후 45년 만에 메달에 도전했다. 8강전에서 터키를 꺾으며 파란을 예고했다. 그러나 세계 강호(브라질·세르비아) 연전에서 모두 패했다. 1세트는 20점 진입 직전까지 박빙 승부로 끌고 갔다. 초반에는 상대 에이스 보스코비치에게 연속 실점하며 기선을 내줬다. 세르비아에 허용한 첫 5점 모두 보스코비치에게 허용했다. 그러나 김연경의 오픈, 양효진의 속공으로 추격했고 상대 범실로 추가 득점하며 추격했다. 5-6에서는 박정아가 보스코비치의 오픈 공격을 블로킹해내며 동점을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김희진이 연속 서브 득점까지 해내며 2점 차로 앞서가기도 했다. 12-10에서는 김연경이 오픈 공격을 성공시키며 점수 차를 벌렸다. 좋은 흐름이 갑자기 흐름을 내줬다. 한국의 서브 리시브가 갑자기 흔들렸다. 17-19에서는 세터 염혜선과 박정아의 호흡이 안 맞았다. 김희진의 속공마저 라인을 벗어나며 점수 차가 벌어졌다. 한국은 연속 6실점 했고, 18-24로 세트 포인트를 허용했다. 정지윤의 오픈 공격이 블로킹에 막히며 25번째 점수를 내줬다. 2세트는 무기력했다. 김연경도 분위기를 바꾸지 못했다. 좌우를 오가며 폭격한 보스코비치를 막지 못했다. 베테랑 세터 마야 오그네노비치는 한국의 추격 기세가 오를 때마다 2단 패스 페인트를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10-16에서 보스코비치에게 플로터 서브까지 허용하며 이 경기 최다 점수 차(7점)를 내줬다. 10점 뒤진 채 25번 고지를 내줬다. 3세트 초반에는 선전했다. 김연경이 연속 득점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3세트도 10점 전후로 점수 차가 벌어졌다. 김연경과 박정아가 오픈 공격을 성공시키며 대항했지만, 점수 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8점 뒤진 채 20점 고지를 내줬다. 15-24에서 표승주의 공격이 범실로 이어지며 경기가 끝났다. 메달 획득은 실패했다. 그러나 한국 여자 배구는 세 차례나 스포츠팬에 환희를 안겼다. 조별예선에서 강호 도미니카공화국을 풀세트 접전 끝에 꺾었다. 8강 진출 분수령에서 만난 숙적 일본도 5세트 승부 끝에 이겼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김연경의 리더십과 선수단 단합력은 큰 박수를 받았다. 열세로 평가된 터키와의 8강전에서도 다시 한번 풀세트 승부를 승리로 이끌었다. 중국, 일본이 모두 떨어진 상황에서 아시아 여자 배구의 자존심을 지켰다. 브라질과의 4강전,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전력 차이를 확인했다. 그러나 메달을 획득한 국가들과 똑같은 경기 수를 소화하며 대회 페막식까지 스포츠팬에 설렘을 안겼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2021.08.0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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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야 산다'…김연경도 경계한 세르비아 24살 핵심 공격수

여자 배구대표팀이 동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선 티야나 보스코비치(24·세르비아)를 막아내야 한다.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동메달 결정전은 한국과 세르비아의 맞대결로 압축됐다. 한국은 6일 열린 준결승 브라질전을 0-3(25-16 25-16 25-16)으로 완패했다. 세르비아도 앞서 열린 준결승에서 미국에 0-3으로 패해 두 팀이 8일 동메달을 놓고 맞대결한다. 대표팀은 올림픽 사상 첫 결승 진출엔 실패했지만, 세르비아를 꺾는다면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이후 45년 만에 시상대에 오를 수 있다. 쉽지 않은 상대다. 한국은 지난 2일 조별리그에서 세르비아를 상대해 0-3(18-25 17-25 15-15)으로 무릎 꿇었다. 세트당 평균 24.3분이 걸렸을 정도로 일방적으로 밀렸다. 보스코비치(13득점)와 밀레나 라시치(12득점), 미나 포포비치(8득점)에게 고른 득점을 허용했다. 특히 세르비아 주포 보스코비치를 막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동메달 결정전 '리턴 매치'도 보스코비치 봉쇄 여부가 관건이다. 김연경은 준결승 브라질전이 끝난 뒤 "세르비아는 보스코비치에게 (공격이) 50% 이상 올라가는 팀"이라며 "그날(조별리그)은 서브가 잘 들어가지 않아 좋지 않은 경기를 했다"고 했다. 보스코비치는 세르비아의 핵심 공격수다. 지난달 25일 도미니카공화국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선 무려 28득점을 폭발시켰다. 전체 팀 득점(75점)의 37.3%를 책임졌다. 조별리그 2차 일본전에선 34득점으로 팀 득점 비중(45.3%)이 더 올라갔다. 1-3으로 패한 조별리그 브라질전에서도 32득점. 0-3으로 셧아웃을 당한 준결승 미국전도 19득점으로 고군분투했다. 워낙 공격력이 좋아 세르비아 공격이 그에게 몰리는 건 장점이자 단점. 대표팀으로선 보스코비치의 공격을 차단해 세르비아의 화력을 떨어트릴 필요가 있다. 동메달 결정전 희비를 가를 포인트다. 라바리니 감독은 "물론 전력도 중요하지만 (8강) 터키전이나 그 이전에 보여줬던 투지 같은 걸 이용해 더 많은 찬스를 만들고 상대를 압박해야 한다"며 "세르비아는 강팀이고 질 수 있다. 모든 걸 쏟아부어서 최선을 다해 경기하면 '우리가 열심히 했고 발전해 왔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고 선수단을 독려했다. 도쿄=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1.08.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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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 여제'가 말했다. 이제부터 진짜 승부다…오늘 케냐전 첫 승 도전

'배구 여제'는 첫 경기 패배에도 흔들림 없이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라고 의연하게 말했다. 진짜 승부 돌입을 예고했다. 한국은 지난 25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2020 도쿄올림픽 배구 여자 예선 A조 첫 경기에서 브라질에 세트 스코어 0-3(10-25, 22-25, 19-25)으로 완패했다. 공격(52점-33점)과 블로킹(10개-3개) 등 힘과 기술, 높이에서 모두 밀렸다. 마지막 올림픽에 나선 김연경은 동료의 지원 부족으로 집중 견제를 받은 가운데 이날 12점을 올렸다. 그는 경기 뒤 "브라질과 세르비아가 우리 조에서 가장 강한 팀이란 건, 모두가 알고 있다"라고 인정했다. 김연경이 말한 것처럼 브라질은 세계랭킹 2위, 한국은 14위로 객관적인 전력 차가 꽤 크다. 브라질은 2008 베이징,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이번 대회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힌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동메달) 이후 올림픽 시상대에 서지 못한 한국 여자배구의 1차 목표는 8강 진출이다. 12개국이 참가한 이번 올림픽에서 A·B조 각 4위 안에 들어야 8강 진출 자격이 주어진다. '주장' 김연경은 "첫 경기 결과는 안타깝지만,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며 "27일 케냐를 꼭 이기고, 두 팀(도미니카공화국·일본) 중 한 팀은 꼭 꺾어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첫판부터 가장 강한 상대 브라질을 만났지만, 이후 8강 진출의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있다. A조에서 전력이 가장 약한 케냐(24위)와 27일 맞붙는다. 이후 세계랭킹은 우리보다 앞서지만 8강 진출 티켓을 놓고 다툴 것으로 예상되는 도미니카공화국(6위), 일본(5위)을 차례대로 29일과 31일 상대한다. 오는 2일 우리와 맞붙는 세르비아(13위)는 A조에서 브라질과 1~2위 전력을 갖춘 팀으로 평가받는다. 25일 도미니카를 3-0으로 완파했다. 김연경은 "브라질과 세르비아의 예선 통과는 모두가 예상한다. 우리도 케냐를 꼭 잡고, 다른 두 팀과의 대결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우리를 꺾고 동메달을 딴 개최국 일본은 홈 팀의 이점을 안고 나섰지만, 에이스 코가 사리나가 3-0으로 승리한 25일 케냐전에서 발목 부상으로 이탈한 것이 변수다. 대표팀은 브라질전에서 과제와 희망을 모두 엿봤다. 1세트는 호흡이 맞지 않으면서 10-25로 크게 졌다. 하지만 2세트부터 공격과 서브가 살아나며 경기력을 회복했다. 특히 3세트는 8-3까지 앞서며 초반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날카로운 서브와 끈질긴 수비를 상대를 괴롭히면서 세터와 공격수 간 호흡을 보완하고, 김연경의 부담을 나눈 레프트와 라이트의 분전이 필요하다. 김연경은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 모두가 긴장한 것 같다. 우리가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했다"며 "1세트 막판부터 조금 좋아졌고, 2세트에는 경기력이 나아졌다. 한 세트도 따지 못한 건 아쉽지만, 점점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이형석 기자 2021.07.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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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포스트 김연경' 시대를 이끌 선두 주자

V리그를 평정한 이소영(27)이 올림픽 무대에 데뷔한다.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뒤 한 번도 올림픽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 도쿄올림픽에서 45년 만에 메달 획득을 노린다. 동시에 대표팀 세대교체를 위한 초석도 닦는다. 김연경, 김수지, 양효진 등 10년 넘게 대표팀을 이끌어온 주축 선수들이 이번 올림픽을 자신의 마지막 무대로 삼고 있다. 레프트 이소영은 '포스트 김연경' 시대를 이끌어 갈 대표 주자다. 그는 2020~21 V리그에서 소속팀이었던 GS칼텍스의 3관왕(KOVO컵·정규시즌·챔피언결정전)을 이끌었다. 정규시즌에서는 흥국생명 소속으로 뛰었던 김연경에 이어 국내 선수 공격종합 2위(41.66%)에 올랐고,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최우수선수(MVP)로도 선정됐다. 2016 리우올림픽은 이소영에게 아픈 기억이다. 한국 대표팀이 올림픽 출전 티켓을 딴 예선전까지는 그도 대표팀 일원이었다. 그러나 최종명단(12명)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주 포지션(레프트)에는 김연경이 버티고 있었고, 백업 역할은 이재영에게 밀렸다. 이소영은 지난 2월 "(리우 대회에서는) 예선만 뛰고 본선은 나서지 못했다"라며 5년 전 기억을 돌아본 뒤 "대표팀이 선발되고 싶은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 꼭 출전 기회를 잡고 싶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고, KGC인삼공사와 자유계약선수(FA) 계약하며 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몸값(6억원)을 받는 선수로 올라섰다. 지난 5일 발표된 도쿄올림픽 최종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대표팀 에이스 김연경은 도쿄올림픽에서도 상대의 집중 견제를 받을 전망이다. 김연경의 공격점유율 낮추면서도 득점력을 높여야 한다. 이번 대회 성패를 좌우할 변수다. 그래서 이소영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연경이 후위에 있거나, 서브가 집중되며 오픈 공격 기회를 잡기 힘들 때는 이소영이 공격을 이끌어야 한다. 효과가 좋으면 김연경도 체력 안배를 할 수 있다. 이소영은 지난 시즌 V리그에서 리시브 효율 5위(41.82%)에 오르며 발군의 수비력도 증명한 선수. 주전 리베로와 서브 리시브를 나눠 맡는 역할도 해줘야 한다. 이소영은 이미 도쿄올림픽 전초전으로 열린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김연경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증명했다. 이탈리아전에서는 팀 내 최다 득점(20점), 벨기에전에서는 23득점 하며 김연경과 50점을 합작했다. 당시 VNL 홈페이지는 "이소영이 한국의 공격을 역동적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은 VNL 개막 전부터 이소영을 향한 기대감을 전했다. 이제 진짜 무대에 오른다. 이소영이 자신의 '롤모델' 김연경과 함께 한국 여자 배구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출격한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2021.07.23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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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 여제’의 올림픽 라스트 댄스

한국 여자 배구의 아이콘 김연경(33)은 2016년 리우올림픽 일본전 도중 혼자 욕설을 내뱉는 장면이 여러 차례 TV 카메라에 잡혔다. 경기에 몰입한 나머지 나온 실수였다. 이후 그에게는 욕설과 비슷한 발음의 ‘식빵 언니’라는 별명이 생겼다. 걸크러시에 대한 팬들의 열광은 김연경을 코트 밖으로 끌어냈다. 그는 예능 프로그램과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유튜브 채널도 개설해 인기를 끌었다. 이미 세계 최고의 기량을 지녔던 그에게 리우올림픽은 대중적인 스포츠 스타로 발돋움하는 계기였다. 배구 선수로서 모든 걸 이룬 것 같은 그에게도 허전함이 있다. 올림픽 노메달. 여자 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동메달) 이후 올림픽 시상대에 서지 못했다. 김연경이 절정의 기량을 뽐냈던 2012년 런던 대회 3~4위전에서는 일본에 아쉽게 졌다. 여자 배구는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처음으로 국제무대 우승을 차지했으나, 5년 전 리우에선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김연경은 “리우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서 정말 아쉽다. 스포츠에선 지면 안 되니까…”라며 “사실 주변의 기대가 높아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해외 리그에서 뛰면서도 김연경은 도쿄올림픽에 모든 걸 걸었다. 대표팀이 원하면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달려왔다. 그는 2017년 인터뷰에서 “국가대표의 무게감이 힘들기도 하지만, 내게는 대표팀에서 뛰는 게 가장 재미있다”며 “도쿄올림픽이 진짜 마지막 도전”이라고 했다. 중국과 국내 리그 흥국생명에서 잠시 뛴 것도 대표팀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이동 거리를 줄이는 등 체력 안배를 고려했다. 수억 원대의 연봉 삭감까지 감수했다. 또 지난해 1월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는 복근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도 진통제를 맞고 출전, 올림픽 티켓을 따내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만큼 대표팀과 올림픽 메달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간절한 이유는 단 하나다. 김연경은 “지금껏 리그에서 많이 우승해 봤고, 최우수선수상(MVP)도 수상했다. 유럽에 진출해서 인정도 받았다. 유일한 목표는 세계 대회(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배구계에서도 “김연경이 대표팀에서 활약하는 지금이 올림픽 메달을 딸 수 있는 최적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여자 배구는 대표팀 사상 첫 외국인 사령탑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을 영입하며 올림픽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여파로 대회가 1년 미뤄졌다. 그 사이 대표팀의 메달 도전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이재영과 이다영이 학교 폭력 문제로 빠졌다. 올림픽 전초전으로 치른 발리볼네이션스리그는 3승 12패, 초라한 성적으로 마감했다. 더군다나 김연경의 전성기도 끝나가고 있다. 하지만 ‘배구 여제’는 마지막 올림픽을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지난 20일 일본 도쿄에 입성한 김연경은 “무조건 서브를 강하게 때려서 상대 리시브 라인을 흔들어야 한다. 사이드 아웃 공격 효율을 높이는 것도 숙제”라고 말했다. 한국(세계 랭킹 14위)은 이번 대회서 일본(5위), 세르비아(13위), 브라질(3위), 도미니카공화국(6위), 케냐(24위)와 A조 조별리그를 치른다. 상위 4개 팀이 8강에 오르며 이후 토너먼트를 통해 우승팀을 가린다. 25일 브라질과 A조 조별리그 첫 경기를 갖는다. 이번 대회 기수를 맡아 개막전에 처음 참가하는 김연경은 “(메달을 따) 마지막까지 도쿄에 남고 싶다”라고 했다. 그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이형석 기자 lee.hyeongseok@joongang.co.kr 2021.07.23 07:50
축구

도쿄올림픽 축구, 누가 누가 나오나?

2020 도쿄올림픽 개막이 약 6개월 가량 남은 가운데 올림픽 최고 인기 종목 중 하나인 남자축구 본선 진출국 윤곽이 드러났다. 총 16개 팀이 도쿄 본선 무대를 밟을 수 있는데 이 중 12개 팀이 확정됐다. 도쿄올림픽 본선 티켓은 유럽 4장·오세아니아 1장·아시아 3장·아프리카 3장·남미 2장·북중미 2장으로 구성되고, 개최국인 일본이 1장을 가져간다.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한국이 3장 중 1장의 티켓을 거머쥐었다. 김학범호는 2020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도쿄행을 확정지었다. 준우승팀인 사우디아라비아, 3위를 차지한 호주까지 도쿄로 초대받았다. 유럽의 4장도 확정됐다. 2019 유럽축구연맹(UEFA) U-21 챔피언십을 통해 경쟁했고 주인공들이 가려졌다. 프랑스·독일·스페인·루마니아가 도쿄로 간다. 2019 아프리카 U-23 컵 오브 네이션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코트디부아르·이집트·남아프리카공화국 등 3팀도 도쿄행을 확정지었다. 2019 오세아니아축구연맹(OFC) 올림픽 예선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뉴질랜드 역시 도쿄행에 합류했다. 남은 지역은 남미와 북중미다. 2020 남미축구연맹(CONMEBOL) 올림픽축구예선은 지금 한창 진행 중이고, 2020 북중미축구연맹(CONCACAF) 올림픽축구예선은 오는 3월부터 시작된다. 이 두 대회에서 각각 2장의 티켓이 걸려있다. 프랑스·독일·스페인은 유럽 전통의 강호로 유력한 우승후보로 지목되고 있다. 세 팀 모두 올림픽 금메달 경험을 가지고 있다. 독일은 1976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독으로 나서 정상을 밟았다. 프랑스는 1984 LA올림픽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스페인은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에서 아프리카는 가장 강한 다크호스였다. 도쿄에 초대된 3팀은 우승한 경험이 없지만 1996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나이지리아, 2000 시드니올림픽에서 카메룬이 우승을 하는 등 유독 올림픽에서 아프리카는 강했다. 아시아 최고 성적은 동메달이다. 1968 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 일본이 최초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2012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이 3위를 차지했다. 김학범호는 도쿄에서 한국을 넘어 아시아 역대 최고 성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도쿄에서 유럽이 정상을 탈환할 수 있을 지 여부도 관심사다. 유럽은 축구의 대륙이지만 최근 올림픽에서는 힘을 내지 못했다.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스페인이 금메달을 차지한 뒤 단 한 번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1996 애틀랜타올림픽 나이지리아·2000 시드니올림픽 카메룬·2004 아테네올림픽 아르헨티나·2008 베이징올림픽 아르헨티나·2012 런던올림픽 멕시코·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브라질 등 타 대륙에 6대회 연속 우승을 내줬다. 프랑스·독일·스페인·루마니아 등 4개국은 유럽의 자존심을 걸고 도쿄로 온다. 또 슈퍼스타의 참가 여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프랑스의 중심이자 미래 킬리안 음바페(파리 생제르맹)를 비롯 스페인 축구의 상징 세르히오 라모스(레알 마드리드) 이집트 축구의 에이스 모하메드 살라(리버풀) 독일 축구의 교과서 토마스 뮐러(바이에른 뮌헨) 등이 올림픽 출전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한편 도쿄올림픽 남자축구 본선 조 추첨은 오는 4월 20일 일본 도쿄의 NHK홀에서 진행된다. 최용재 기자 choi.yongjae@joins.com 2020.01.29 06:00
스포츠일반

[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①] '박치기왕' 김일에 열광하고 양정모 첫 올림픽 금에 환호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②] '슈퍼스타' 차범근·선동열·최동원…서울올림픽 감동에 푹[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③] 스포츠 영웅들, 국민에게 희망을 안기다[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④] 2002년 '붉은 물결' 대한민국을 휩쓸다[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⑤] 김연아·이상화·손흥민…천재들의 시대가 열리다 2019.09.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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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0 특별기획]한국스포츠 50년, 슈퍼스타 50인, 환희의 50신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 <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89~1999 :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 희망을 안긴 영웅>1997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실의와 고통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안긴 스포츠 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가 곧 희망이자 위로였다. -박찬호(야구)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그는 IMF 위기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긴 영웅이었다.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1997년 14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1998년 15승을 수확하며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2000년 18승을 달성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아시아 최다승이다. 또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동메달 등을 이끌며 야구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세리(골프)IMF 위기의 시절 국민들을 위로했던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박세리다.미국 LPGA 개척자. 1998년 LPGA 무대에 뛰어들었고, 데뷔 4개월 만에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US오픈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특히 US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한 장면은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박세리의 모습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LPGA 25승으로 한국인 최다 우승자 역시 박세리다. -황영조(마라톤)'몬주익의 영웅'의 등장으로 한국 육상은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쳤다.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린 뒤 홀로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힘차게 들고 골인했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육상 첫 올림픽 금메달.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금메달 이후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이후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다시 한 번 포효했고, 1994년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당시 한국 최고 기록인 2분8초09를 기록했다. -심권호(레슬링)심권호라는 이름은 세계 최고라는 의미다.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48kg급 금메달을 목에 건 뒤 1995년 프라하세계선수권,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까지 정상을 차지했다. 48kg급이 폐지되자 54kg급으로 체중을 늘려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를 밟았다. 1998년 예블레세계선수권·1998년 방콕아시안게임·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금메달을 일궈냈다. 하계올림픽 최초 올림픽 2연패, 한국 올림픽 사상 첫 두 체급 석권 그리고 세계 레승링 최초 두 체급 그랜드슬램 달성.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기영(유도)한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는 유도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전기영이다.유도 천재, 업어치기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20세의 나이로 참가한 1993년 해밀턴세계선수권 78kg급에서 우승했다. 한국 역대 최연소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5년 지바세계선수권에서는 86kg급에 도전해 금메달을 차지, 두 체급을 석권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는 1회전을 제외하고 모두 한판승으로 이기며 정상에 섰다. 1997년 파리세계선수권에서도 1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다. -박주봉(배드민턴)배드민턴의 교과서 박주봉.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 배드민턴의 전설이었다.1980년 17세의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됐고, 1982년 덴마크오픈에서 이근구와 한 조로 역대 최연소로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1985년 캘거리세계선수권 우승·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1989년 자카르타세계선수권 금메달·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1991년 코펜하겐세계선수권 1위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6년 '배드민턴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허버트 스칠 상을 수상했다. -전이경(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라 불리는 유일한 선수, 전이경이다. 그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1988년 12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000m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석권, 2관왕에 올랐다. 이어 1995년 요빅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1996년 헤이그, 1997년 나가노까지 개인종합 3연패를 일궈냈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도 1000m와 3000m 계주를 석권하며 한국 여자 최초로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품었다. -허재(농구)농구대통령이 당선됐다. 농구 9단이라 불리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 허재다.중앙대 1학년 시절 농구대잔치에 나서 평균 24득점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어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자 기아 왕조가 구축됐다. 기아의 에이스로 농구대잔치 5연패 등 7회 우승을 일궈냈다. 3번 MVP를 수상했고, 베스트 5에 6회 포함됐다.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1990년 아르헨티나세계선수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넣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홍명보(축구)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다.그는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해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 최초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품었다. 이후 일본 J리그에서 진출하며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한국 대표팀 전설이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 최초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홍명보는 A매치 136경기 출전으로 한국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씨름)이만기를 1인자에서 내려앉히고 새로운 1인자로 등극한 괴물, 강호동이다.이만기의 은퇴는 곧 강호동이라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과 연결된다. 1989년 일양약품에 입단한 20세 강호동은 첫 백두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4강에서 이만기와 첫 공식전에서 맞붙어 2-0으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1990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천하장사에 올라섰다. 이후 백두장사 7회, 천하장사 5회를 차지했다. 최단기간 천하장하 5회라는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이 은퇴하자 씨름의 황금기도 끝났다. <1999~2009 : 불모지에서 태어난 올림픽 스타 그리고 붉은물결 2002년>불모지 한국. 그동안 한국에서 약했던 종목에서 슈퍼스타들이 등장해 행복했던 시기다. 또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박태환(수영)박태환의 등장. 한국스포츠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수영 불모지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15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따더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400m 정상에 섰다. 200m에서도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2011년 상하이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00m, 2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장미란(역도)한국 역도 역사의 새로운 신화, 장미란이 썼다.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5년 카타르세계선수권부터 2006년 산토도밍고·2007년 치앙마이·2009년 고양까지 4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역도계에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압권이었다.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 kg·용상 186 kg·합계 326kg을 기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했고, 2위와 격차가 무려 49kg이나 났다. 압도적인 우승, 압도적인 선수였다. -진종오(사격)한국은 세계최고의 권총 사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진종오가 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2연패를 달성하더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일궈냈다. 2010년 뮌헨·2014년 그라나다·2018년 창원 등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로 김수녕과 함께 역대 한국인 올림픽 최다 메달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승민(탁구)한국 탁구의 마지막 자존심, 유승민이다.2000년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승민은 2004년 이집트오픈에서 우승하며 기대를 받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 금메달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등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의 간판 역할을 했다. 유승민 이후 한국은 단 한 번도 올림픽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승엽(야구)국민타자. 이승엽이 아니면 붙을 수 없는 이름이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홈런왕. 1999년 54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한국 역대 최다인 56홈런을 때렸다. KBO 통산 465개의 홈런으로 역대 1위에 오른 이도 이승엽이다. 타점(1495점) 득점(1351점) 등도 1위다. 홈런왕 5회·MVP 5회·타점왕 4회·골든글러브 10회 등 기록이 이승엽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기도 하다. -안현수(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가 전이경이라면 황제는 안현수다.많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선 경험이 있지만 안현수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선수. 16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3년 바르샤바부터 2004년 예테보리·2005년 베이징·2006년 미니애폴리스·2007년 밀라노까지 세계 최초로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1000m·1500m·5000m 계주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500m 동메달도 추가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메달 신기록이다. -김세진(배구)한국 배구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스타, 김세진이다.1995년 실업배구 삼성화재의 창단멤버로 합류해 삼성화재 왕조를 이끈 스타였다. 김세진이 활약하던 시기 배구는 폭발적 인기를 받았다. 김세진을 앞세운 삼성화재는 리그 9연패를 일궈냈다. 배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2001년 창원아시아배구선수권과 2003년 톈진아시아배구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 월드리그에서 베스트 6에 오르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장훈(농구)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빅맨, 단연 서장훈이다.1994년 연세대를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 때부터 그는 국보급 센터였다. 공격과 수비 외곽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 1998년 청주SK 입단 후 서울 삼성·전주 KCC·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다. 1999년 리바운드 상 수상. 프로농구 사상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왕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프로통산 1만3231득점·5235리바운드 기록, 역대 1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이 이끄는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경주(골프)한국 남자 골프의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 최경주다.1999년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PGA투어 자격을 획득했다.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뉴올리언즈 콤팩 클래식에서 한국 첫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2승을 챙겼다. 이후 AT&T 내셔널 등 PGA에서 6회 우승을 더 차지하며 통산 8회 우승을 기록했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잡초 골퍼라 불리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한국 골프의 자존심을 높인 영웅이다. -박지성(축구)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환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그 중심에는 두개의 심장을 가진 박지성이 있었다.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을 꺾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성적인 4강에 진출했다. 거리는 붉은물결르 뒤덮혔고, 선수들은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중 핵심은 박지성. 그는 2005년 잉글랜드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 최초의 잉글랜드 진출. 이때부터 맨유는 국민클럽이 됐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리그 우승 4회 등 총 13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했다. <2009~2019 : 동계스포츠의 비상 그리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과거 한국의 동계스포츠는 쇼트트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종목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프로스포츠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연아(피겨)한국 동계스포츠의 역사는 김연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눌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김연아가 나온 건 기적이다.김연아는 한국을 넘어 세계 피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하이라이트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김연아는 쇼트 78.50점, 프리 150.06점 총합 228.56점으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올림픽·세계선수권·4대륙 선수권·그랑프리 파이널 등을 모두 제패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역사에 기록됐다. 11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상화(스피드스케이팅)'빙속여제' 이상화를 빼놓고 한국 동계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2010년 밴쿠버올림픽 여자 500m에서 76초09로 우승, 한국 여자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74초70, 올림픽 신기록으로 2연패에 성공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3개 대회 연속 메달을 딴 선수로 남았다. 2013년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나온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윤성빈(스켈레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썰매 종목 금메달을 딴 주인공, 윤성빈이다.한국 스켈레톤의 간판인 그는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1∼4차 레이스에서 무려 3차례나 트랙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1∼4차 합계 3분20초55로 정상을 차지했다. 한국과 아시아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켈레톤 불모지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윤성빈. 그의 헬멧에 그려진 아이언맨처럼 그는 한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다. -양학선(체조)한국 체조의 새로운 역사, 도마의 신이 창조했다. 양학선이다.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2011년 도쿄세계선수권 우승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양학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신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구에서 단 한 명만 할 수 있는 최고난위도 기술 '양학선'을 앞세워 도마 금메달을 차지했다. 16.533점. 압도적 우승이었다. 한국 체조 역사상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2013년 앤트워프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황경선(태권도)태권도 종주국 한국. 수많은 선수가 세계 정상에 섰다. 그중 가장 많은 최초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이는 '태권여제' 황경선이다.18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67kg에 나서 동메달을 차지한 그는 2005년 마드리드세계선수권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그리고 2007년 베이징세계선수권까지 재패한다. 남은 건 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멈추지 않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태권도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최초의 올림픽 3회 연속 진출을 일궈냈다. -박인비(골프)미국 LPGA에는 한국 여성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 최선봉에 자리를 잡은 스타, 박인비다.골프 여제의 2008년 US오픈 우승. 박세리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깨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US오픈 총 2회 우승 등 메이저대회에서 7회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최고 기록이다. LPGA 통산 19승으로 박세리에 이은 2위다. 56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유지했고, 4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아시아 최초로 달성하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 역시 박인비 품에 안겼다. -정현(테니스)2018년 1월, 한국에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그 바람은 정현이 일으켰다.정현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2018년 호주오픈 1~3라운드에서 미샤 즈베레프·다닐 메드베데프·알렉산더 즈베레프를 연이어 꺾으며 기대를 받았다. 16강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노박 조코비치.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 한국에 정현 신드롬이 일어났다.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마저 넘으며 4강에 올라섰다. 4강에서 로저 페더러를 만나 부상으로 기권했다. -김연경(배구)한국 여자배구에 이렇게 독보적인 선수는 없었다. 김연경이다.흥국생명에 입단한 2005년. 득점상·공격상·서브상·신인왕·정규리그 MVP·챔피언결정전 MVP까지 싹쓸이한다.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인 지 알 수 있는 기록. 이후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올랐다. 2009년 일본 JT마베라스 유니폼을 입은 뒤 2011년 터키 페네르바체로 이적했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다. 가는 팀마다 우승으로 이끌면서 가치는 올라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배구대표팀에서도 기둥이었다. -류현진(야구)21세기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류현진이다.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자마자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석권한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가 됐다.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로 이적한 첫해 14승 올리며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후 꾸준함을 보이다 2019년 평균자책점 전체 1위를 기록, 올스타전 선발로 나서는 등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야구대표팀 역사와도 함께 했다. -손흥민(축구)지금 한국 축구는 '손흥민의 시대'다.2010년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레버쿠젠을 지나 201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세계 톱클래스 공격수로 거듭났다. 특히 2018~20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우승후보 맨체스터 시티를 침몰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손흥민을 앞세운 토트넘은 최초로 결승에 올랐다. 축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주인공.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2019.09.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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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 시대' 가고 '진천 시대' 온다

'태릉 시대'의 막이 내리고 '진천 시대'가 새로 열린다.반세기 넘게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해 온 태릉선수촌이 '후계자'에게 바통을 넘기고 물러난다. 태릉선수촌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국가대표들의 보금자리이자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새로운 중심이 될 주인공은 오는 27일 공식 개촌식을 앞둔 진천선수촌이다.2009년 2월 첫 삽을 뜬 이후 장장 8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된 진천선수촌은 한국 체육사에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진천선수촌의 공식 개촌식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만큼 태릉 시대에서 진천 시대로 이어지는 역사를 살펴본다. ◇ '스포츠 강국' 한국을 만든 태릉태릉선수촌의 역사는 1966년 6월 30일 시작됐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선수촌은 근처에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이 있어 거기에서 이름을 따왔다.진천선수촌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유일의 국립 종합 스포츠 트레이닝센터로 엘리트 스포츠의 상징과 같은 장소로 여겨졌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전문적인 체육 시설은 드물었기에 태릉선수촌의 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태릉선수촌은 1964 도쿄올림픽에서 224명의 선수단을 파견하고도 금메달 없이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에 그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합숙을 통해 선수단을 운영하면서 국제 대회 경쟁력을 기르기 위한 결정이었다. 1966년 완공돼 선수들이 입촌한 뒤 처음 치른 1968 멕시코시티올림픽 그리고 다음 대회인 1972 뮌헨올림픽에선 '태릉 효과'가 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나 1976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가 첫 금메달을 한국에 안기면서 태릉선수촌의 '금빛 행진'도 시작됐다. 1984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때는 무려 6개의 금메달(은6, 동7)이 나왔고, 안방에서 열린 1988 서울올림픽에서는 12개의 금메달, 10개의 은메달, 11개의 동메달을 수확하며 종합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단기간에 한국을 스포츠 강국으로 끌어올린 태릉선수촌의 성과가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음은 물론이다.이처럼 국가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한국은 태릉선수촌 설립 이후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대회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다. 태릉선수촌은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산실이자 역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태릉선수촌의 입지도 점점 바뀌어 갔다. 여전히 국가대표의 자부심을 가득 안겨 주는 공간이지만 개촌 50년을 넘긴 만큼 시설이 낙후됐고 이를 위한 개·보수 및 관리 비용도 늘어났다.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국제 종합 대회 종목들이 신설되고 확대되면서 수용 가능 종목과 인원에도 한계가 생겼다. 새로운 선수촌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태릉선수촌의 뒤를 이을 더 크고 더 전문적인 진천선수촌이 2009년 공사에 돌입했다. ◇ 더 커진 진천에서 새 역사를 기대한다"단순히 선수촌을 태릉에서 진천으로 옮기는 게 아니다. 세계 최대 규모급 종합 훈련 선수촌이 탄생하는 것이다."이재근 진천선수촌장은 이번 개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선수촌장의 말처럼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에 자리 잡은 진천선수촌은 태릉선수촌과 비교하면 시설·시스템·수용 인원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다. 선수촌 조성에 투입된 예산은 5130억원에 달하고, 부지면적도 기존 태릉선수촌(31만969㎡)보다 5배가량 넓어진 159만4천870㎡다.선수들이 사용할 숙소도 태릉선수촌(3개 동 358실)에 비해 8개 동 823실로 크게 늘어났다. 수용 종목과 인원도 총 35개 종목 1150명으로 늘어났고, 훈련 시설도 12개소에서 21개소로 많아졌다. 실내 훈련장 3곳을 비롯해 벨로드롬, 빙상장, 럭비장, 하키장 등 다양한 훈련 시설이 생기면서 럭비와 우슈, 사이클, 철인3종, 근대5종 등의 국가대표 선수들의 입촌이 가능해졌다.공식 개촌식을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선수촌 이촌을 위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지난 3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우선 2018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두고 현재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중인 아이스하키와 컬링, 쇼트트랙 등 16개 종목 선수단이 다음 달 중순부터 진천선수촌으로 시설 및 장비 이전을 시작할 예정이다. 대한체육회는 오는 11월 말까지 상기 종목들의 이촌이 완료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아쉬운 점은 평창을 준비하는 겨울올림픽 종목 선수들이 진천선수촌의 시설을 100%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재 대부분의 겨울올림픽 종목 선수들이 해외 전지훈련을 떠나 있는 상태인 데다 진천선수촌의 겨울올림픽 종목 시설이 시험 가동 중이라 선수들이 이용하기 어렵다. 현재 진천선수촌에 입촌해 있는 봅슬레이·스켈레톤 국가대표팀의 경우도 체력 단련에 중심을 두고 있다.대신 정부와 대한체육회, 평창겨울올림픽조직위원회 및 종목 단체 등은 지난 2월 경기력 향상 지원단을 구성해 총력 지원 체계를 구축했다. 지원단은 외국인 지도자와 종목 전문가 증원을 비롯해 체계적인 경기력 분석 및 관리, 국내외 훈련 기간 확대, 특식 지원 등 종목별 맞춤형 지원을 통해 평창을 준비할 예정이다.김희선 기자 2017.09.22 06:00
스포츠일반

'원조 효자' 레슬링, 자신감 넘치는 리우행 출사표

"전쟁에 임하는 마음으로 준비했다."한국 레슬링이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을 향한 출사표를 던졌다. 18일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에서 리우 올림픽 미디어데이 행사를 개최한 레슬링 국가대표팀은 '원조 효자 종목'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굳은 각오와 함께 2주 남짓 남은 올림픽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레슬링 종목은 1976 몬트리올올림픽 당시 양정모(63)의 첫 금메달을 시작으로 2012 런던올림픽까지 금메달 11개·은메달 11개·동메달 13개를 수확한 원조 효자 종목이다. 특히 레슬링에 '빠떼루(파테르)'라는 별명을 안긴 1996 애틀랜타올림픽 때는 레슬링 스타 심권호(44)의 탄생까지 겹쳐 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하지만 2008 베이징올림픽,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때는 '노 골드'로 암흑기를 보내면서 자존심에 금이 갔다.그래도 레슬링의 암흑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김현우(28·삼성생명)가 2012 런던올림픽 그레코로만형 66kg급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끊어진 금맥을 이었고, 내친 김에 세계선수권대회와 2014 인천아시안게임까지 정복하며 '그랜드 슬램'으로 한국 레슬링의 위상을 높였다. 그는 이번 리우에서 75kg급으로 체급을 바꿔 두 대회 연속 금메달에 도전한다. 도전에 성공할 경우 1996 애틀랜타올림픽 48kg급, 2000 시드니올림픽 54kg급에서 각각 금메달을 따낸 심권호 이후 두 번째로 두 체급을 정복한 선수가 된다.김현우는 "패배는 두렵지 않다. 후회가 남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성숙한 각오를 밝혔다. 그는 이어 "리우에서는 후회 없는 경기를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 전사의 정신으로 꼭 금메달을 따낼 것"이라며 메달 획득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생애 첫 올림픽에 도전하는 류한수(28·삼성생명)도 "상대가 아니면 내가 쓰러진다는 생각으로 임하겠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할 것"이라고 이를 악물었다.한국 레슬링은 이번 리우 올림픽에 총 5명의 선수를 내보낸다. 그레코로만형에는 75kg급 김현우, 66kg급 류한수와 59kg급 이정백(30·삼성생명)이 출전하고, 자유형에는 57kg급 윤준식(25·삼성생명)과 86kg급 김관욱(26·광주남구청)이 나서 메달에 도전한다. 안한봉(48) 그레코로만형 감독은 "전쟁에 임한다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선수들 모두 체력과 정신력, 기술이 삼위일체가 되도록 철두철미하게 훈련한 만큼 꼭 금메달을 따오겠다"고 약속했다. 박장순(48) 자유형 감독도 "선수들이 지난 4년간 흘린 땀방울이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라며 효자 종목답게 당당한 출사표를 던졌다. 김희선 기자 kim.heeseon@joins.com 2016.07.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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