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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인터뷰] 프로 미지명과 세 번의 수술, 인고의 시간을 견딘 최원준

두산 사이드암 최원준(26)이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최원준은 사연이 많은 선수다. 신일고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해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가장 중요한 대학 졸업반 때는 오른 팔꿈치 인대 문제(MCL)로 수술대에 올랐다.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두산의 2017 1차 지명자로 선택돼 프로 미지명의 아픔을 한 번에 날렸다. 그런데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6년 10월 구단 검진에서 갑상샘암(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오른 갑상샘을 제거했다. 2017년 6월 완쾌 후 2군 경기에 출전했지만, 그해 12월 또 한 번 갑상샘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이었다. 이번엔 왼 갑상샘을 제거했다. 대학교 4학년 이후 세 번의 큰 수술을 겪으면서 프로 데뷔는 그만큼 뒤로 미뤄졌다. 2018년 7월 25일 우여곡절 끝에 1군 데뷔전(인천 SK전)을 치른 뒤 개명까지 했다. 최동현이라는 이름 대신 최원준으로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다. 굳은 각오가 통했을까. 2018년 말미부터 불펜에 활력소로 힘을 보탰고 지난 시즌엔 김태형 감독이 믿고 내는 불펜으로 자리매김했다. 시즌 34경기에 등판해 평균자책점 2.65로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프로 미지명→팔꿈치 수술→두 번의 갑상선 수술을 극복한 최원준은 "개명은 아프지 않으려고 한 거였다. 안 아픈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다"고 몸을 낮췄다. -2019시즌을 돌아보면 어땠나. "좋았다. 의미 있는 경험을 쌓은 시즌이었다. 여름인 8월이 되니까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도 있었다. 시즌을 2군에서 시작(1군 등록 4월 23일)했지만 프로에서 한 시즌을 풀타임으로 뛴 게 처음이었다. 체력 보강 운동을 빠르게 시작해 올 시즌에는 힘 안 떨어지고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 중이다." -성적이 전체적으로 부침이 없었는데. "만족스럽다.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지 않았던 게 구단에서 관리를 정말 잘해주셨다.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이제 팔꿈치에 문제는 없나. "아무 이상 없다." -굴곡진 야구 인생을 경험했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프로에 와서 느낀 게 많다. 아마추어 때는 편하게 야구했다. 팀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는데 프로에 오니까 실력으로 말해야 하는데 부족하더라. 실력도 많이 떨어지고 몸도 안 좋으니까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지난 시즌을 뛰면서 프로에서 가져야 할 것을 많이 느꼈다. 내겐 뜻깊은 한해였다." -이번 스프링캠프에서 집중할 부분은. "지난해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변화구나 왼손 타자 상대를 보완해야 한다. 지난해 왼손 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높았다. 떨어지는 구종을 계속 연습하려고 한다. 오른손 타자는 상대적으로 (스트라이크존) 좌우를 편하게 쓸 수 있는데 왼손 타자는 몸쪽을 확실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왼손 타자를 편하게 상대할 수 있는 구종도 연습해야 할 것 같다." -1년 전과 비교하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부상에서 돌아오는 선수가 많다. 경쟁을 잘 이겨내 개막전 엔트리부터 끝까지 형들과 함께했으면 한다. 올해는 처음부터 경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다." -많은 우여곡절을 경험했는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2017시즌이 끝난 뒤 당시 이강철(현 KT 감독) 2군 감독님과 겨울에 준비를 많이 했다. 내년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갑상선암(갑상샘암)이 재발해서 수술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2017년 후반 페이스가 좋아지면서 괜찮다고 느꼈는데 갑자기 아팠다." -양쪽 갑상샘을 모두 제거했는데 생활에 불편함은 없나. "젊어서 그런지 불편함은 없다.(웃음) 약만 잘 챙겨 먹으면 괜찮을 거 같다." -개명한 뒤 잘 풀리는 느낌인데. "솔직히 아프지 않으려고 개명한 거였다.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다." -미지명 뒤 향했던 대학에서 성장한 부분이 있을까. "실력은 열심히 하다 보면 좋아지는 건데 고등학교 때는 솔직히 대학교라는 또 다른 길이 있으니까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교에선 달랐다. 마지막 4년이라고 생각하니 하지 않을 수 없더라. 지명이 되지 않아 야구를 그만두는 선배도 보고 그러니까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올 시즌 목표는. "보직은 중요하지 않다. 올해도 작년처럼 롱릴리프도 맡고 중요한 상황에 나갔으면 한다. 좋은 경험을 하면서 끝까지 버티는 게 가장 큰 목표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0.01.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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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피플] '미지명→MCL→갑상선암' 두산 최원준의 '오뚜기' 인생

두산 사이드암 최원준(25)은 '오뚜기'다.야구 인생에 불어닥친 네 번의 큰 고비를 넘겼다. 신일고 재학 시절에는 나름 에이스였다. 2011년 고교 야구 광역리그(서울권) 우수투수상, 같은 해 고교 야구 주말리그(동일권) 감투상을 받았다. '공 좀 던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201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낙방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는 "프로에 많이 가고 싶었지만 잘 안 됐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2·3학년 때 성장이 멈췄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야구 인생의 첫 번째 고비였다. 벼랑 끝에 내몰린 순간 선택한 게 동국대다.대학교 진학 이후 성장을 거듭했다. 양석환(LG) 고영표(kt) 등과 힘을 합쳐 동국대를 2013년 전국체육대회 우승,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등으로 이끌었다. 이건열 동국대 감독은 "처음 왔을 때는 체중이 덜 나갔다. 그런데 2·3학년이 되면서 몸이 좋아졌다. 기본기가 잘돼 있었는데 몸이 커지면서 공도 좋아졌다"며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대표팀에 들어갔다. (대학리그) 사이드암 중에서는 최고였다"고 말했다.대학 입학 당시 체중이 78kg에 불과했다. 운동을 통해 몸집을 키웠고 자연스럽게 구위와 성적이 향상됐다. 2014년 21세 이하 세계선수권대회와 2015년 하계유니버시아드에서는 태극마크도 달았다. 3학년 때인 2015년 대학리그에서 5승1패 평균자책점 3.79, 이닝당출루허용률(WHIP) 1.08을 기록했다. 자연스럽게 프로의 꿈도 영글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대학교 4학년 때인 2016년 2월 일본 전지훈련 중 팔꿈치에 통증을 느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최원준은 "다치기 일주일 전부터 팔꿈치가 안 좋았다. 12월과 1월에 공을 만지지 않게 해 주셨는데 오랜만에 공을 던져서 그런가 보다 했다"고 했다.검진 결과 오른 팔꿈치 내측측부인대(MCL) 손상이 발견됐다. 야구 인생의 두 번째 고비였다. 처음엔 참고 던지려고 했다. 신인 드래프트 지명을 앞두고 수술을 받는다는 건 최악. 하지만 4월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그해 5경기만 뛰고 수술받았다. 감독님께서 양해를 많이 해 주셨다. 아픈데 팀에 있으면 감독 입장에선 쓰고 싶을 수밖에 없다고 하시더라. 미래를 위해 수술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결정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건열 감독도 당시 상황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감독은 "관리를 했는데 의욕에 차서 연습하다가 다쳤다. 페이스가 정말 좋았다"고 했다.감독 입장에서 결단이 필요했다. 최원준은 부상 전까지 평균자책점 2.70을 기록했다. 성적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주축 선수가 수술을 받는 건 부담이다. 이건열 감독은 "4학년이니까 지명을 앞둬 (선수도) 부담이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휴학도 생각하셨는데 장래를 위해선 수술이 낫다고 판단했다. 다행스럽게도 두산이 선수를 좋게 봐 다행이었다"고 했다. 수술 이후 재활까지 17개월이 걸렸다. 두산은 2016년 6월에 열린 2017년 신인 1차 지명에서 '아픈' 최원준을 찍었다. 그해 1차 지명 중 유일한 대졸이었다. 계약금만 1억8000만원을 받았다. MCL 재활 절차를 밟고 있던 투수를 1차 지명에 선택한 건 사실상 '도박'에 가까웠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프로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행복이 오래가지 않았다.지명 4개월 만인 2016년 10월 갑상선암(갑상샘암) 진단을 받았다. 세 번째 위기였다. 그는 "입단 이후 구단 검진에서 갑상선암이 의심스럽다는 판정이 나와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갑상선암이 확인돼 오른쪽 갑상선을 떼어 냈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전이되지 않아 빠르게 완치 판정을 받았고 2017년 6월부터 2군 경기를 뛰었다.그런데 네 번째 위기가 너무 빨리 찾아왔다. 2017년 12월 구단 정기검진에서 또 한 번 갑상선암이 발견됐다. 한 달 뒤 이번엔 왼쪽 갑상선을 제거했다. 이건열 감독은 "얘도 참 힘들게 사는구나 싶더라. 좀 잘해 보려고 하면 아프고 살도 쪽 빠져서 한 번 찾아왔는데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불굴의 의지로 극복했다. 그리고 2018년 7월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름도 바꿨다. 최원준은 "프로에 와서 계속 부상을 당하니 개명을 했다. 지난해 9월부터 최원준(개명 전 최동현)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를 뛰고 있다. 작명소에서 여러 개의 이름을 해 줬는데 '높을 준(峻)'이 들어간 지금의 이름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너무 흔해 껄끄러웠는데 나한테는 이 이름이 좋다고 하니까 선택했다"고 했다. 올해 초반 기대는 높지 않았다. 1군 스프링캠프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주전 선수들의 부진과 부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지난 4월 한 차례 1군 콜업을 받았다. 얼마 뒤 2군에 내려갔지만 5월 25일 두 번째 등록됐다. 그리고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오는 16일 잠실 LG전 '임시' 선발이라는 중책까지 맡게 됐다. 어깨 부상으로 1군에서 제외된 외국인 투수 세스 후랭코프의 빈자리를 채우는 게 역할이다. 시즌 7경기 불펜 등판해 평균자책점 1.17로 호투한 뒤 얻은 달콤한 결과였다. 피하지 않고 결전에 들어가는 부분에서 김태형 감독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최원준은 "이렇게 뛸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지난해 열심히 하다 보니까 감독님께서 불러 주셨는데 너무 임팩트가 없었다. 그때 못 보여 줬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욕심은 크지 않다. 드래프트 미지명과 팔꿈치 수술 그리고 두 번의 갑상선암 수술까지 남들이 한 번 겪기 힘든 일을 모두 버텨 냈다. 그는 "목표는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어 "지금처럼 한 걸음 한 걸음씩 가면서 1군에 오래 있고 싶다. 두산은 분위기도 좋고 항상 상위권에 있는 팀이다. 1군에서 하는 게 재밌다"고 강조했다.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은 최원준의 야구 인생은 이제 출발선에 섰다. 그가 던지는 공 하나를 허투루 볼 수 없는 이유다.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tbc.co.kr 2019.06.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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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인터뷰] '미지명→97번째 선수' 삼성 백승민의 굴곡진 야구인생

삼성 백승민(28)이 바늘구멍을 통과하고 있다.백승민은 현재 삼성 1군 엔트리에서 경험이 가장 부족한 선수다. 지난 6월 21일 대구 SK전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9월 4일 마산 NC전에서 첫 안타를 신고했다. 1군 출전이 9경기(24타석)에 불과하다.1군에 등록됐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그만큼 굴곡진 야구 인생을 살았다. 대구상원고 졸업 이후 2010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해 영남대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때 무릎 수술을 받아 1년을 유급했고, 성적은 바닥을 쳤다. 두 번째 도전이던 2014 신인 드래프트에선 마지막인 2차 10라운드(전체 97순위)에 가서야 이름이 불렸다. 1차 지명 유망주의 실패 사례가 수두룩한 KBO 리그에서 '10라운드 성공 신화'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대부분 하위 라운드 선수들처럼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을 것처럼 보였다.백승민은 달랐다. 2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지난해 7월 팀에 합류한 뒤 곧바로 2군 캠프에서 기량을 갈고닦았다. 2군 성적은 타율 0.302(199타수 60안타). 외국인 타자 다린 러프의 발가락 부상과 9월 엔트리 확대가 맞물리면서 기회가 닿았다. 준수한 타격과 수비로 김한수 감독의 눈도장을 찍었다. '늦깎이 신인' 백승민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며 각오를 전했다. -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지명받지 못했는데."2010년 신인 드래프트였다. 지명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때는 당연히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에 가서 다시 해 보자는 마음이 컸다. 성적이 좋지 않아서 대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이후 10라운드 지명을 받았는데."경기 중이어서 신인 드래프트를 라이브로 보지 못했다. 10라운드였지만 지명되니 기분이 좋았다."- 10라운드에 지명된 선수의 성공 케이스가 극히 드물다. 기회를 잡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나."입단하면 다 똑같은 선수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집중했다."- 대학교에 가서 좋아진 부분이 있다면."아무래도 고등학교 때보다 투수들 공이 빨라서 그 부분에 맞게 적응했다. 코칭스태프에서 1학년 때부터 경기를 뛸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 주셨다. 경기를 많이 소화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입단 이후 한 시즌을 치르고 군대에 갔는데."고등학교 때 무릎 수술을 받아서 유급했다. 그 영향으로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다. 대구 지하철 영대병원역에서 역무원 보조로 2년을 복무했다. 선로 안전선을 지키게 하는 게 임무 중 하나였다. 모교인 상원고에서 배려해 주셔서 일과 시간(오전 6시 반부터 오후 3시) 이후 학교에서 운동했다."- 드래프트 미지명과 하위 지명 그리고 무릎 수술까지 많은 곡절을 경험했다."무릎 수술을 받았을 때는 야구를 그만둘까라는 고민도 했다. 일반적인 수술이 아니었다. 연습 중 코치가 쳐 준 공에 무릎을 맞았는데, 왼무릎뼈가 부러져서 옆으로 이동했다. 그것을 움직여 핀으로 고정했다. 목발 생활을 6개월 동안 했고, 재활까지 1년이 걸렸다. 쉽지 않았다."- 나이가 많다는 불안감은 없었나."군대에 가기 전에는 29세 정도 되는 선수가 팀에 꽤 있었다. 그런데 돌아오니 젊은 선수가 많아졌다.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올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 올해 2군 성적이 안정적이었다."대만 2군 캠프에서 신동주 코치님께서 많이 봐 주셨다. 적지 않은 나이기 때문에 무조건 어필해야 한다. 대만에서부터 차근차근 많이 준비했다. (1군에 등록되기 전) 최근 2군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계속 신경 써 주시니까 기록이 괜찮아지더라."- 부진했던 이유는 뭐였나."하루 이틀 공이 맞지 않으니까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퇴출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불안감보다 '될 대로 돼라'고 생각했다. (걱정을 많이 하는 것보다) 그게 마음이 더 편하더라."- 올해 목표는."사실 (첫 안타를 치기 전까지) 자신감이 없었다. 1군 투수와 상대한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보이면 치라'고 하더라. 자신있게 하니까 좋은 결과가 나왔다. 1군에선 나가면 보여 줘야 한다. 일단 매 타석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러프가 부상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주어지는 기회 속에서)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겠다."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tbc.co.kr 2018.09.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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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방사 1경비단 출신' 삼성 김호재의 '굴곡진' 야구인생

2013년 8월에 열린 '2014 신인 드래프트'에선 총 105명의 선수가 선택 받았다. 10개 구단이 10라운드까지 각각 1명씩. 그리고 신생팀 KT가 1라운드 종료 후 5명의 선수를 특별 지명했다. 배재환(NC·1라운드 1번) 고영표(KT 1라운드 10번) 양석환(LG 3라운드 28순위) 등이 그해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지원자 720명 중 14.6%가 웃었다. 하지만 김호재는 달랐다.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그에겐 2013년 8월은 '아픔'이다.삼성 내야수 김호재의 야구인생은 굴곡 그 자체다. 장충고를 졸업하고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일종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대학 진학도 생각했지만, 프로 입단이 우선 순위였다. 마침 삼성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지명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안 했던 건 아니다. 지명식이 다 끝나고 삼성에서 연락이 왔다. 프로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계시더라. 올 생각 없냐고 해서 바로 '가겠다'고 했다. 감사했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2014년 삼성 육성선수가 됐다. 하지만 1군 데뷔는 뜻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삼성의 선수층은 그만큼 두터웠다.2년의 시간을 보낸 뒤 2015년 10월 결단을 내렸다. 바로 현역 입대했다. 김호재는 "그때 장태수 2군 감독님께서 어린 나이에 다녀오는 게 좋다고 하셨다. 고민 없이 갔다"고 말했다. 서울 독립문 쪽에 있는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제1경비단에서 군생활을 시작해 2017년 7월에 만기전역했다. 선수에겐 최악의 상황이었다. 경찰야구단이나 상무야구단과 비교했을 때 환경도 열악했다. 고참이 되기 전까진 야구를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병장 때 캐치볼을 하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그는 "병장 때 일병 중에 박찬호(KIA)가 있었다"고 전했다. 박찬호는 장충고 시절 함께 키스톤 콤비를 맞췄던 2루수 자원. 2014 신인 드래프트에서 장충고 졸업반 중 유일하게 프로 지명을 받았다. 군대는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입대 전까지 63kg이었던 몸무게가 제대 후 75kg까지 늘었다. 자연스럽게 힘이 붙었다. 김호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몸무게가 59~60kg 정도였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보니 몸이 좋아졌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이어 "팀에 돌아와서는 적응이 잘 안 됐다. 특히 수비하면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계속 공을 받으니까 익숙해지더라. 교육리그를 다녀오면서 컨디션이 좋았는데, 오락가락하던 타격이 2군 개막하기 바로 직전에 좋아졌다"고 덧붙였다.성적이 '기회'를 만들었다. 2군 스프링캠프에서 타격폼을 간결하게 가져가면서 콘택트 능력이 좋아졌다. 2018시즌 2군 성적은 타율 0.343(102타수 35안타), 1홈런, 12타점. 결국 22일 정식선수 등록과 함께 1군에 콜업됐고, 곧바로 KBO리그 데뷔전까지 치렀다. 그는 "TV로 보던 선수들과 함께 뛰어서 영광이었다. 꿈의 무대를 밟은 것 같다"고 감격스러워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입지는 좁다. 김상수가 부상에서 회복되면 2군에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 김호재는 "상수형은 내가 본 선수 중에서 마인드가 정말 좋다. 첫 경기를 나서기 전에도 '긴장이 되겠지만 공 1개 오면 몸 풀릴 거다. 걱정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조언해주셨다"며 "난 하루살이 아닌가. 여기(1군)서 많이 배워 (2군에 내려갔을 때) 잘 만들어서 다시 오는 게 내 위치에 맞는 것 같다"고 몸을 낮췄다.꿈 같은 시간이다. 불가능하다고 했던 편견을 깼다. 그는 "프로에 육성선수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1,2년 안에 잘릴 거다' '네 체격으로는 야구 못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버텼고, 정식선수가 되니까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목표는 소박하다. 김호재는 "부상 없이 항상 꾸준한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프로 미지명 후 육성선수 입단 그리고 현역 복무까지 한 김호재의 버라이어티한 야구인생은 이제 출발점에 섰다.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ins.com 2018.05.24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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