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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712. 역사의 주인공

삼국지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290년께 진수에 의해 저술된 '삼국지'다. 후한이 멸망된 뒤 위·촉·오 세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기록이다.또 하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다. 수 세기 동안 대중에게 사랑받은 '삼국지연의'는 오늘날까지 드라마·영화·게임 등으로 제작돼 인기를 끌고 있다.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수많은 영웅이 등장하지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은 관우와 제갈공명이다.그러나 실제 역사의 주인공은 조조였으며, 조조의 2인자로 삼국을 통일한 장군은 사마중달이었다. 제갈공명과 싸워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이루었지만 대중에게 미움받는 사마중달은 '삼국지연의'에서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사마중달은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슷한 인물로, 인내심 하나는 최고였다. 그의 적은 사실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다. 조조와 조비에게 숙청될까 봐 노심초사하며 제갈공명과 싸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여러 차례 일부러 놓쳤다. 제갈공명이 사라지면 병권을 쥐고 있는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 속에서 세기의 천재, 뛰어난 지략가로 등장한 제갈공명은 사마중달을 이기지 못했으며, 훌륭한 성군이자 지혜로운 군주였던 유비는 조조를 이기지 못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역사는 그들 편이 아니었다.우리도 역사를 냉철하게 보아야 한다. 경술국치 직전, 고종은 미국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며 정성을 쏟았다. 가난한 살림에도 미국 워싱턴에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세운 것이다. 미국에 많은 기대를 가졌던 고종의 마음과 달리 미국은 일본과 밀약인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체결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자국의 필요에 따라 행동을 결정했다. 영원한 우방인 것 같아도 결코 그렇지 않았다. 현재 미국이 한국을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목소리에 이상이 생겼을 때 나는 하늘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뜻이라 여겼다. 그리고 지금 귀를 치료받고 있는 것은 온갖 세상 이야기를 다 들으려 하지 말고 가려서 들으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하늘은 참으로 공평하다. 천도에 따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부자도 권력자도 학자도 나 같은 영능력자도 죽음에는 예외가 없다. 지난 백일기도 동안 주역의 64괘를 후암 회원들과 함께 공부했다. 주역을 통달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뿐 아니라 서양철학과 중국 고전, 노자사상, 공맹사상, 석가사상까지 알아야 한다. 그런 주역을 후암 회원들과 너무 쉽게, 웃으면서 코미디처럼 풀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무술년은 60년 전, 부친께서 돌아가신 해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2018년을 시작했건만, 이상한 사건이 참 많이 발생했다. 한 가극에서 부친을 모델로 한 역을 맡았던 배우가 올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생을 마감했다. 비슷한 이유로 연출가·조연 배우 또 부친의 공덕비를 쓴 시인까지 대중에게 지탄받으며 자숙하고 근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이미 이를 예감했던 나는 M시인이 쓴 부친의 추모시로 공덕비를 새로 제작했다. 혹여 건강이 안 좋아질 때를 대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비록 건강은 예전 같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더 없이 맑아지고 있다. 많은 분이 나의 건강을 걱정해 주셔서 고마운 마음이다. 하늘이 내게 부여한 시간 동안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글도 계속 쓸 수 있으면 좋겠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8.07.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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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파리뷰] 3사 드라마, 예습·복습 보고서

지상파 드라마 삼국지다.마치 짠듯 지상파 3사가 내놓은 드라마 세 편이 첫 성적표를 손에 들었다.29일 공개된 시청률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전날 동시 시작한 지상파 3사 드라마 중 '대박'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SBS '대박'은 전국 기준 11.8%를 기록했다. 전작인 '육룡이 나르샤'의 종영 시청률보다는 낮지만 우위를 점했다. 2위는 KBS 2TV '동네변호사 조들호'였다. 10.1% 전국시청률로 그동안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던 KBS 월화극을 구원했다. 3위는 MBC '몬스터'. 7.3%로 두자릿수로 안 나왔지만 정보석·강지환 등의 열연으로 가능성을 확인했다.이제 막 첫 발을 내딛은 3사 드라마, 방송국 담당 기자들이 예습·복습 철저히 할 보고서를 작성했다. ◇ '대박', 최민수·전광렬만으로 '압도' 출연진 : 장근석(대길)·전광렬(이인좌)·최민수(숙종)·윤진서(복순) 등포인트 : 배우는 연기로 답하는 법. 논란 많던 최민수도 카리스마 연기 하나로 체면 회복. 장근석은 불과 5분 출연이었지만 남다른 존재감 발산. 또 조선시대 노름판이라는 흔히 다루지 않은 신선한 소재의 재발견.걸림돌 : 반전을 기대하긴 힘들어 보인다. 긴박한 상황 속 최민수와 이문식이 윤진서를 두고 한 판 벌였지만 결과는 뻔한 상황. 첫 회지만 다른 드라마와 달리 조금 더딘 전개도 안타깝다.줄거리 : 시작은 장근석과 전광렬의 설원 속 장기 한 판. 두 사람의 호위무사들이 칼을 겨누며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이어졌다. 이후 시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전광렬의 계략에 최민수가 숙빈 최씨가 될 윤진서에게 반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전광렬은 노름에 빠진 남편 이문식 때문에 매일을 걱정으로 살던 윤진서에게 최민수의 마음을 빼앗으라고 제안했다. 전광렬의 말대로 최민수는 윤진서에게 첫 눈에 반한다. 윤진서에게 노름꾼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안 최민수는 윤진서를 차지하기 위해 이문식에게 노름을 제안한다. 이문식은 돈을 모두 잃고 최민수가 예상한대로 결국 아내 윤진서까지 걸고 마지막 내기를 했고 결국 패배. ◇ '동네변호사 조들호', 5년 만에 컴백… 그야말로 '갓신양' 출연진 : 박신양(조들호)·강소라(이은조)·류수영(신지욱)·박솔미(장해경) 등포인트 : 박신양으로 시작해 박신양으로 끝났다. 드라마 '싸인' 이후 5년 만에 돌아온 박신양이 검사·노숙자·변호사를 오가며 냉철한 카리스마, 우스꽝스러운 코믹 면모 등을 다양하게 분출하며 답답한 일상을 속 시원하게 뚫어주는 '동네 히어로'로 맹활약. 걸림돌 : 박신양에게만 지나치게 포커스가 맞춰져 다른 배우들이 보이지 않는다. 홀로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줄거리 : 고졸 출신이지만 수석으로 사법고시를 패스한 박신양. 그는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검사였다. 하지만 윗선에 미움을 사 '뇌물수수' 누명을 쓰고 노숙자로 전락했다. 가족도 잃고 삶의 의지도 잃은 그는 아무런 희망 없이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아끼던 동생이 죽고 그 동생 때문에 덮기로 했던 3년 전 방화사건이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났다. 공판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접한 박신양은 방화범으로 잡힌 범인이 진범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그를 변호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했다. 그렇게 박신양은 약자를 위해 변호하는 변호사로 새 삶을 시작했다. ◇ '몬스터', 개밥먹는 강지환, 역전은 3회부터 출연진 : 강지환(강기탄)·성유리(오수연)·박기웅(도건우)·수현(유성애) 등포인트 : 사이다에 LTE. 군더더기 없는 쾌속 질주로 나머지 49회를 위한 예열을 완료했다. 사이사이 빛났던 배우들의 연기력은 기대 포인트. 드라마 시작과 함께 등장한 강지환은 단 5분 출연으로 시선을 사로잡았고, 강지환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이기광은 일취월장한 연기력으로 '열일' 했다. 성유리·박기웅·수현 등 주연배우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3회부터 '진검승부' 하겠다는 계획.걸림돌 : 기선제압에 성공하지 못한점은 뼈 아프다. 방송일에는 포털사이트 검색어와 화제성에서 밀리지 않았으나 첫성적표는 3위. 빼앗긴 '손님'을 되찾아 오려면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줄거리 : 산발이 된 머리와 상처 투성이 얼굴, 넝마를 입고 개밥을 훔쳐먹는 강지환의 모습이 먼저 등장한다. 그는 한때는 가족처럼 여겼던 이들에게 당한 배신에 복수를 다짐하고, 극은 '6년전'으로 돌아가 강지환에게 가해진 사건들을 훑어올라 온다. 대형 병원 이사장의 아들인 이기광(강지환의 어린시절)은, 의문의 교통 사고로 부모를 잃고, 자신은 시력을 빼앗긴다. 대신 비상한 청력을 가지게 된 그는 주변 사람들의 음모를 알게되고, 병원을 빼앗으려는 이모의 계략을 가까스로 저지한다. 김진석·황소영·박현택 기자 2016.03.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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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삼국지] 허정, 헛된 명성 덕에 유비에게 극진한 대우 받아

유비가 성도를 포위했을 때, 허정은 촉군태수로 있었다. 익주의 수도였던 성도가 촉군의 한 현이었으므로 허정의 위치는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를 합친 정도의 요직이었다. 허정은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지만 죽는 것이 두려웠나 보다. 하긴 어떻게 살아왔던 인생이던가. 구차한 목숨 하나 지키려고 5000리 바닷길을 헤치고 이역만리를 떠돌아 다니다 간신히 얻은 안온한 삶이 아니었던가. 성의 함락이 임박했음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수도방위의 책임을 지고 있던 허정은 몰래 성을 빠져나와 유비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유장의 부하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실패했다. 유장은 이미 유비에게 항복할 마음을 굳힌 상태였기 때문에 허정의 배반행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유비는 익주를 장악한 후 널리 명사들을 초빙하고 인재들을 발굴해 적재적소에 기용했다. 허정은 익주의 선비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사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중용할 것을 추천했다. 제갈량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유비는 허정이 비겁하게도 성도의 함락이 임박하자 항복하려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내심 그를 경멸했다. 유비가 허정을 박대하고 등용하지 않자 법정이 유비를 설득했다. "세상에는 헛되이 명성이 높으나 실질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허정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공께서는 이제 막 대업을 창업하셨으므로 천하 사람들의 중론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허정의 헛된 명성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으므로 만약에 그를 예우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주공께서 어진 사람을 천시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면 오히려 그를 더욱 존경하고 귀하게 대우하는 척 해야 합니다."유비는 법정의 말에 따라 허정을 자신의 비서실장 격인 좌장군장사로 삼았다. 유비가 허정을 영입하자 그때까지 유비에 대해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던 익주의 이름난 선비들이 자연스럽게 유비의 진영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허정과 같이 명성은 높으나 실제로는 별반 쓸모없는 사람들도 소용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소위 정권의 정통성을 보강해 주는 역할이다. 허정은 이런 까닭에 유비정권에서 매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허정은 태부가 되어 국가의 원로대접을 받았으며, 제위에 오른 후에는 사도가 되어 삼공의 반열에 올랐다. [영웅의 이면] 허정, 난세 최고의 36계 달인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학문하던 선비들은 제 한 몸 지키기도 어려워졌다. 많은 사대부들이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난했다. 어떤 사람은 난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며 유랑생활을 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허정(?~A.D 222년)이다.젊은 시절 허정은 사촌동생 허소와 함께 ‘여남월단평’을 발행했던 유명한 인물품평가였다. 허정은 출사가 비교적 늦었다. 하는 수 없이 방앗간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한다. 그는 동탁이 집권한 후 상서랑이 되어 인사를 담당했다. 당시 그의 상관은 이부상서 주비였다. 주비가 오경 등과 의논해 한복·유대·장자·공주·장막 등을 지방관으로 내보내 동탁에 대한 반기를 들게 했을 때 그 실무를 담당한 자가 바로 허정이었다. 동탁이 주비를 죽여버리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허정은 관동으로 도망쳤다. 이때부터 그의 기나긴 유랑생활이 시작됐다. 허정은 처음 예주로 가 예주자사 공주에게 의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가 패망했다. 허정은 다시 양주로 달아나 양주자사 진의에게 의지했다. 또다시 진의가 죽자 오군도위 허공의 보호를 받았다. 손책이 강동을 침공해 허공을 죽이자 허정은 회계태수 왕랑에게 달아났다. 허정은 왕랑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의 보호를 받았다. 이때 허정은 친족들은 물론 동향 출신들을 거두어들여 생계를 보살펴주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왕랑이 손책에게 패해 바다로 도망치자 허정도 그를 따르는 백여 명의 무리들과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로 나갔다. 이때 겪은 고생은 그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도중에 민·월을 지나며 만 리 길을 갔는데 한나라 땅은 보이지 않고 풍파에 표류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풀을 먹었으며 굶어죽은 자가 태반이었습니다. ~ 남해에서 형주로 북상하고자 하였으나 창오군의 여러 이족과 월족이 봉기해 노약자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저 허정은 바닷가를 따라 오천 리를 더 달아났는데 도중에 전염병이 돌아 큰어머니께서 운명하셨고 함께 따르던 사람들과 처자식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다시 서로 돕고 의지하며 교지군에 도착했는데 그 동안 살해당하거나 병으로 죽은 자가 많아 남은 사람은 열에 한둘뿐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생과 고통은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인근 주로 이주해 비교적 쉽게 자리를 잡았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허정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처럼 모진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으리라. 허정은 *교지군에 이르러서야 태수 사섭의 따듯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허정은 익주를 거쳐 천자가 있는 조정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어렵게 알아본 결과 허정은 유장의 초청을 받아 익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장은 그를 파군태수, 광한태수를 거쳐 촉군태수에 임명했다. 유비가 촉에 입성한 후 그를 중용했다. 허정의 마음은 조정에 있었기에 유비에게 진심으로 충성하지는 않았다. 오로지 익주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높은 존경을 받던 그의 명망을 이용하려던 유비의 의도에 맞게 조심스럽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허정은 나이가 칠십이 넘었지만 후배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함께 청담을 논하기를 즐겨했다. 제갈량을 포함한 익주의 사대부들이 모두 그를 존경했다.[거짓말 벗겨보기] 유장이 허정의 항복 때문에 혼절했다고? '삼국지연의'에는 허정이 유비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장이 혼절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딱 한 줄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을 뿐인데 허정의 시도가 실패했으니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이외에도 유장이 유비에게 항복하는 대목에서 엉터리 같은 기사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동화가 유장에게 항복을 만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은 이때 동화는 성도에 없었다. 또 초주가 동화의 말을 하늘의 뜻을 들어가며 반박하는데 초주는 훨씬 후대의 사람으로 유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풀이*교지군=지금의 베트남 북부 통킹·하노이를 포함한 손코이강 유역. 2014.02.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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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삼국지] 전위, 두 배의 술과 음식만 있으면 괴력 발휘했다

전위는 '삼국지'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용력을 지닌 장사였다. 힘만 가지고 따진다면 전위와 허저가 막상막하였을 것이다. 전위가 진류태수 장막의 휘하에 일개 병사로 있을 때 지휘관의 군영 문에 걸어두는 깃발인 아문기(牙門旗)가 쓰러졌다. 깃발이 매우 큰 데다가 바람까지 세차게 몰아치니 여러 병사들이 달려들어도 기를 다시 세우지 못했다. 전위가 나타나 한 팔로 기를 들어 바로 세웠다. 전위의 팔 하나가 여러 사람을 합친 것보다 더 세었던 셈이었으니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허저도 한 손으로 소의 꼬리를 잡고 백여 보를 끌고 간 적이 있으니 그 역시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지녔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조조의 호위대장이었다. 조조는 비록 무예가 뛰어났다고는 하나 체격이 왜소한 편이었다. 조조는 천하의 장사들이 마음껏 힘을 써대는 난세를 만나 자신을 지켜줄 막강한 호위무사가 필요했다. 조조는 처음 전위를 발탁해 자신의 호위를 맡겼고, 허저가 그의 뒤를 이었다. 허저는 전위가 죽은 후에 조조의 부하가 됐으므로 두 사람의 힘을 직접 비교해 볼 기회는 없었다. 다만 전장에서 발휘한 괴력을 간접 비교해 보면 전위가 더 우위에 서 있지 않을까? 전위는 복양성 싸움에서의 활약으로 조조에게 발탁됐다. 조조가 복양성 밖에서 여포에게 삼면을 포위당해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포위망을 뚫을 특공대를 모집했다. 하후돈의 휘하에서 사마로 있던 전위가 일등으로 자원했다. 전위와 특공대 수십 명은 방패 없이 갑옷만 두 겹 겹쳐 입은 채 장창과 갈래창만을 들었다. 전위가 이끄는 특공대가 여포군의 남쪽 포위망을 향해 돌격해 돌파에 성공했다. 그때 바로 서쪽에서 여포의 또 다른 부대가 진격해 오면서 활과 쇠뇌를 마구 쏘아댔다.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와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위는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적병이 바로 앞에 돌격해 오자 고함을 지르며 일어섰다. 손에 열 개의 갈래창을 쥐고 내지르니 맞는 적군마다 다 나가떨어졌다. 대단한 괴력이었다. 여포의 병사들이 겁을 먹고 물러나는 바람에 조조는 포위망을 뚫고 돌아올 수 있었다. 조조는 전위를 도위로 승진시키고 자신의 호위대장으로 삼았다. 조조가 완성에서 장수에게 습격당했을 때에도 전위는 조조의 군영 문을 지키고 있었다. 장수와 그의 장졸들은 전위의 위력을 두려워했으므로 그를 피해 뒷문으로 돌아들어가 공격했다. 조조가 황급히 달아나자 전위가 십여 명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격전을 벌여 장수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이 덕분에 조조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위는 수십 번 창에 찔리고도 혼자 남을 때까지 격투를 벌이다 죽었다. 장수의 병사들은 쓰러져 죽은 전위를 구경하며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장사였는지 떠들어댔다고 한다. 전위는 엄청난 용력을 지닌 장사였으나 단순 무식했다. 여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지 낮에는 물론 밤중에도 숙직을 하면서 집에 들어가 자는 날이 드물었다. 조조는 이런 전위를 매우 장하게 여겼다. 전위는 오로지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는데 보통 사람들의 두 배는 먹고 마셨다. 조조는 전위가 언제라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게 음식과 술을 공급해 주었다. 2013.07.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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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삼국지] 손견, 여포 뛰어넘는 최강의 무장

동탁을 쳐부수어 장안으로 도주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손견의 공로였다. 산동에서 일어난 반동탁군 중에서 처음으로 동탁의 군대와 교전한 것은 조조였다. 조조는 의기 하나에 의지해 *변수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서영이 이끄는 동탁의 주력부대에 의해 처절하게 패배했다. 그 다음 원소의 선봉 대장인 왕광은 하양진에서 동탁의 양동작전에 걸려 참패했다. 전황은 급격히 동탁군의 우세로 돌아갔고, 산조에 모인 여러 제후군들은 감히 진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때 장사에서 출발한 손견이 도착하자 전세가 일거에 역전됐다. 양현의 싸움에서 손견은 전승의 기세로 진격해 온 동탁군에게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 그러나 곧이어 손견의 반격이 시작됐다. 손견은 양인에서 여포·호진·화웅의 부대를 대파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대곡에서 동탁을 패주시켰다. 낙양 인근까지 진출해 다시 여포를 격퇴시킨 후, 손견은 낙양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손견이 이처럼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담력이 있고 용맹한 무장이었기도 하지만, 대부분 *백면서생이었던 다른 산동의 의군 장수들과 달리 풍부한 전투경험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손견은 젊은 나이에 출사한 이래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소년배 우두머리였던 손견은 이들로 구성된 의용병을 이끌고 다니며 허창의 난과 황건적의 난을 토벌했고, 서량 반군과의 싸움에도 참전했다. 산동기의가 일어나기 직전에도 그는 장사태수가 돼 구성의 난을 진압하러 강남의 3개 군을 누비고 다녔다. 손견은 전투경험이 풍부했고 게다가 소년배들로 구성된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한 군대를 지휘했다. 상승의 비결이었다. 손견이 산동반군에 가담한 이유는 순전히 동탁과의 개인적 사감 때문이었다. 손견은 장온의 참군사가 되어 서량의 반란 진압에 종군한 적이 있었다. 당시 장온이 진격을 명했으나 동탁이 이를 무시했다. 장온이 여러 차례 소환하자 동탁이 마지못해 찾아왔다. 동탁의 응대가 심히 불손했으므로, 손견이 나서 동탁을 군법에 따라 참수할 것을 주장했다. “동탁은 죄를 짓고도 참회하기는커녕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소환을 받고도 제 때에 도착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군법에 따라 참해야 합니다.” 장온은 동탁의 위명을 의식해 감히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로 인해 동탁과 손견은 철천지원수가 됐다. 이런 동탁이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으니 손견에게는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의 문제였을 것이다. 동탁의 정권이 그대로 안정된다면 손견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때마침 동탁이 원외와 원봉 등 원씨 일가를 몰살시키자 전국적으로 원씨의 문생고리들이 원씨를 위해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손견은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를 일으켜 원술과 합류했다. 손견은 삼국지 초기의 인물들 중 최강의 무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맹만 믿고 설치다가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가 조금만 자신의 몸을 아꼈더라면 '삼국지'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손견은 유표를 공격하다가 일개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일군의 대장이 되었으면서도 용력만 믿고 선봉에 서서 설친 결과였다. 손견의 이러한 대담무쌍하고 자신을 과신하는 태도는 그의 아들 손책에게도 이어졌다. 손책 역시 그 담력과 무용으로 '소패왕'이라는 칭송마저 들을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경호도 안 붙이고 혼자 산야를 달리다가 일개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부자 모두 빼어난 용장이었으나 한 나라를 건국할 창업군주로서의 자질은 부족했다. 손견의 둘째 아들 손권은 비교적 신중한 성격이었기에 손견 부자의 세력을 이어받아 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영웅의 이면] 손견의 오부인, 손씨 남자들 '꼼짝마' 손견(A.D 156~192)은 조폭 두목 출신답게 결혼도 힘을 동원해 뜻을 이뤘다. 손견은 젊은 시절 고향인 오군에서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오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당시 오부인은 조실부모해 동생 오경과 함께 살고 있었다. 손견이 혼담을 넣자 오부인의 후견 역할을 하고 있던 오씨의 친척들이 반대했다. 손견이 사람됨이 경박하고 사납다는 이유였다. 손견이 몹시 불쾌해 오씨 가문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손견은 이미 그 지역의 소년배 우두머리로 행세했을 뿐더러 성격이 거칠었으므로 오씨 집안의 사람들에게 큰 근심거리가 됐다. 오씨가 친척들을 찾아가 말했다.“어찌 여자 하나를 아껴 화를 부르시려 하십니까?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운명인가 합니다.” 이윽고 집안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낸 오씨는 손견과 인연을 맺게 됐다. 모두 사남 일녀를 낳았는데, 손책이 첫째이고 손권이 둘째였다. 손견과의 결혼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오부인은 매우 굳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패왕이라 불릴 정도로 기세가 맹렬했던 손책조차도 그녀에게만은 꼼짝을 못했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한 후 어떤 일로 의견이 대립되어 공조 위등을 죽이려 한 일이 있었다. 아무도 손책을 말릴 수 없었다. 그 때 오부인이 손책을 *후정으로 불렀다. 오부인은 후정의 큰 우물을 붙잡은 채 손책을 꾸짖었다. “너는 이제 막 강동으로 와 아직 큰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마땅히 어진 선비를 잘 대접하고 과거의 허물은 묻지 말고 공만 포상해야 한다. 위공조는 너를 위해 자신의 직무를 다한 사람인데 오늘 네가 그를 죽이면 사람들이 다 너를 버리고 떠날 것이 아니냐. 나는 화가 집안에 미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지금 당장 이 우물에 뛰어들고 말겠다.” 손책이 깜짝 놀라 사과하고 바로 위등을 풀어주었다. 오부인의 영향력이 이와 같으니 강동의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평소에 부인을 어려워하고 크게 의지했다. 오부인은 손권이 소년의 나이에 강동정권을 계승하자 정권이 안정될 수 있게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다. 직접 장소 등 신료들을 불러 모아 강동정권을 안전하게 보전하는 방안에 대한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손권의 집권 초기에 정권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정권 안정에 기여했던 오부인은 손권의 위치가 공고해진 건안7년(202)년 세상을 떠났다. [거짓말 벗겨보기] 손견, 전국옥새 훔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손견은 낙양의 궁전 우물에서 전국옥새를 찾아낸 후 황제가 되고자 하는 흑심을 품었다. 본거지인 장사로 돌아가려다가 원술의 사주를 받은 유표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비슷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손견이 낙양에서 전국옥새를 되찾은 것은 사실이나 손견이 회군한 것은 산동반군의 내분 때문이었다. 산동반군은 곧 하북의 원소·하남의 원술로 대표되는 양대 진영으로 갈려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하북군의 맹주인 원소가 예주자사로 임명한 주옹이 손견의 근거지인 양성을 점령해 군량 공급을 끊었으므로 손견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풀이] *변수=형양군 중모현에 속하며 낙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강. 조조군과 동탁군이 처음으로 맞붙은 장소다. *백면서생=글만 읽어 세상물정에 어둡고 경험이 없는 사람. *후정=건물 뒤의 뜰. 사진 제공=극단 미추 2013.01.2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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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삼국지] 조조,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쓰다

조조는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써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출신성분도 가리지 않았다. 후일 조비를 낳아 황후가 된 변부인은 창기 출신이었으며, 두부인은 멀쩡히 두 눈 뜨고 살아있는 다른 사람의 부인이었다. 덕분에 조조는 무려 25명이나 되는 아들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평생의 원한을 사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진의록의 처 두부인을 장난삼아 빼앗았다가 관우에게 한을 품게 했고, 미망인이 된 장수의 숙모를 슬쩍 취했다가 거의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다. 육수 가에서 *장수의 습격을 받았을 때, 조조는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묵숨을 건질 수 있었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첫딸 청하공주와 함께 유부인의 소생이었으나, 유부인이 일찍 죽었으므로 정실부인인 정부인이 맡아 키웠다. 자식이 없었던 정부인은 조앙을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다. 정부인은 조조가 장수의 숙모와 염문을 뿌렸다가 조앙을 죽게 하고 홀로 살아 돌아온 것에 몹시 분개했다. 그녀는 조조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바가지를 긁곤 했다.“내 아들을 데려가 죽이고는 혼자 살아 돌아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조조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견딜 수 없었던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정부인이 기가 좀 꺾이면 다시 데려올 생각이었다. 정부인은 조조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조조가 직접 정부인의 친정집으로 찾아갔을 때, 정부인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다. 조조가 정부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달랬다.“나를 좀 보아서 함께 집에 돌아갑시다!” 정부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조조는 발길을 돌려 나가다가 문지방에 서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정말로 헤어지자는 것이오?” 아무 대답이 없자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관계를 끊었다. 정부인은 평생을 길쌈을 해 자급했다. 조조는 정부인을 쫓은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조조가 병이 깊어져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 깊이 탄식했다 한다.“내가 평생에 뜻대로 살았지만 크게 마음에 빚진 일이 없었다. 다만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가 맞아들 조앙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저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장차 뭐라 답해야 할까!” [영웅의 이면] 조조,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고자 했다 조조(A.D 155~220)는 처음부터 반역을 꿈꾸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남자였다. 그의 꿈은 자신이 죽었을 때 묘비명에 ‘한나라 고(故) 정서장군(征西將軍)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쓰이기를 소망했다. 단지 시대가 그를 한나라를 빼앗은 역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새로운 여론이 일어났다. 조조는 이미 큰 공을 이뤘으니 이제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고…. 그 동안 조조의 위력과 업적에 눌려 잠잠하던 한나라 황실과 사족 계급의 합작품이었다. 헌제는 조조의 공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3개의 현을 식읍으로 내려주었고, 사족들은 패전으로 한 날개가 꺾인 조조에게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건안15년(210년) 12월에 발표한 ‘양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志令)’을 통해 자신의 뜻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밝혔다. “만약 국가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칭제를 할지,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칭왕을 할지 모른다. ~ 제군들은 내가 곧 병권을 넘겨주고 국사를 맡아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나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손을 위한 계책을 위해서,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 것을 옳다고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 이 글에는 ‘차라리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조조의 입장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적이지 않은가? 조조가 주공과 같은 성현처럼 후세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기를 원했었더라면 이때 조정의 의론에 따라 군국의 대권을 반납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조가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 자신과 일족의 생명과 안전을 결코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조조가 아니더라도 다른 실력자가 결국은 한나라를 패망시키고 황제의 지위를 빼앗았을 것이다. 한나라는 이미 스스로 멸망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국가안보와 질서유지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에 빠뜨렸다. 조조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것은 이러한 혼란상황을 극복하고자 동분서주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가 어떻게 권력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이유로 조조는 희대의 악당이요 역적이 되었다. 그러나 인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한실을 중흥하겠다고 해야만 정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 결단의 순간에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가볍게 비난하거나 폄훼할 수는 없는 법이다. [거짓말 벗겨보기] 조조가 여백사를 죽였다고? 조조는 동탁을 피해 달아나던 도중에 부친의 친구인 여백사의 집에 유숙했다. 조조는 돼지를 잡기 위해 준비하는 소리를 자신을 습격하려는 것으로 오해해 여백사의 가족들을 몰살시켰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조조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길에서 만난 여백사마저도 죽여 버렸다고 한다. 조조의 사악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거짓말이다. 조조는 여백사를 죽인 일이 없으며, 이 사건도 수배령이 내려져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풀이 *장수=자신의 숙모를 건드린 조조에게 치욕을 느끼고 대항했으나 가후의 중재로 조조에게 귀순했다. 후에 그의 딸이 조조의 아들 조균과 결혼했다. *허명=헛된 명성. 조조명문 사진제공=중국인민라디오방송 2013.01.1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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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삼국지] 비웃음거리 된 제갈량 결혼

중국인들이 공자 다음으로 존경한다는 제갈량은 어떤 결혼을 했을까? 정략결혼이었다. 제갈량은 형주에서 이름난 명사였던 황승언의 딸과 결혼했다.원래 제갈량과 황승언은 사제지간으로 만났다. 제갈량은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이주한 후 형주 지방의 저명한 학자들인 방덕공·사마휘·황승언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연마했다. 황승언에게는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다.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지만 인물이 형편없었다. 머리카락은 노랗고 얼굴은 시커먼 추녀였다. 반면에 제갈량은 일등 신랑감이었다. 제갈량은 신장이 팔척에 얼굴이 백옥같이 희었다. 한마디로 말해 키크고 잘생긴 '훈남'이었다. 게다가 집안 좋겠다, 수재로 이름 났겠다, 무엇 하나 빠진 구석이 없었다. 황승언은 일찌감치 제갈량을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다. 황승언은 제갈량과의 친분이 깊어지자 슬며시 의중을 떠보았다. "남자는 장성하면 결혼을 해야 하고 여자도 다 컸으면 시집을 가야 하는 법이라네. 듣기로는 자네가 배필감을 찾는다 하던데 나에게는 못난 딸이 하나 있네. 얼굴은 검고 머리카락은 노랗지만 재주만은 가히 자네와 어울릴 만하다네." 제갈량은 신부감의 얼굴도 보지 않고 즉석에서 혼인을 승낙했다. 그는 황승언의 사위가 됨으로써 형주정권의 핵심세력과 친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황승언은 형주 지방 최고의 명문가인 채풍의 사위였으며, 형주목 유표와는 동서지간이었다. 당시 형주의 군권을 쥐고 있던 채풍의 아들 채모와도 처남매부지간인 셈이었다. 제갈량은 황승언의 못생긴 딸과 결혼함으로써 형주정권의 핵심 인맥에 편입될 수 있었다. 제갈량이 계속해서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결혼 덕분이었다. 유표에 의해 예장 태수로 임명됐던 숙부 제갈현이 죽고 나자 제갈량은 몸소 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말이 주경야독이었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생계조차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제갈량은 결혼을 통해 형주의 명문가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의 후원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제갈량과 황씨 부인의 결혼을 비웃었다.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회자됐다고 한다. "아내를 취하려거든 공명처럼만 하지 말게나. 기껏해야 황씨 영감 추녀 딸이나 얻게 될 터이니."제갈량은 이 결혼으로 '실속'을 챙길 수 있었다. 기록은 없지만 제갈량과 황씨 부인 사이의 소생이 제갈첨 한 명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속궁합이 잘 맞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두 사람의 사이는 동지적 관계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황씨 부인은 지혜롭고 학문적 실력이 출중해 제갈량에게 훌륭한 조언자가 됐다. 제갈량이 집안 살림 걱정 없이 청렴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씨 부인의 내조 덕이다. [미화된 영웅] 제갈량, 라이벌 숙청의 칼 휘둘러 제갈량의 권력은 황제를 능가했다. 촉나라의 모든 일은 그의 수중에서 처리됐다. 오죽하면 후주 유선이 이렇게 말했을까. "정무는 갈씨(葛氏)보고 하라 하고, 과인은 제사나 지내겠소."유선 역시 이러한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제갈량의 사후 사당을 설치하는 문제에서 유독 인색을 떨었던 까닭이다. 유선은 어쩔 수 없어 제갈량의 권력독점을 방관했을 뿐이었다. 제갈량이 국가의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은 단순히 재능이 부족했던 유선이 국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갈량이 치열한 권력투쟁을 통해 경쟁자들을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권력욕이 매우 강했다. 그는 함께 *탁고를 받았던 이엄을 숙청했고, 팽양과 요립 등 잠재적인 경쟁상대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집요한 공작의 산물이었다. 자신이 제어하기 어려웠던 관우나 유봉이 죽도록 내버려 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권력에 대한 독점욕이 강했던 제갈량이 군대와 국가의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그 결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 역시 이러한 상황을 심히 걱정했다. 사실은 저 유명한 탁고(託孤) 사건도 이러한 유비의 걱정과 염려 속에서 발생했다.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를 포함해 후세의 학자들은 탁고 사건을 ‘진실로 가장 모범적인 군신간의 관계를 보여준 것’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탁고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면 전혀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 임박한 유비가 제갈량을 백제성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재능은 조비보다 열배나 나으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고, 종국에는 천하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후사를 이을 자식이 도울만하다면 도와주시오, 만약 그가 재능이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내 자리를 취해도 좋소!" 이 말을 들은 제갈량은 온몸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이마를 땅에 찧어 피를 흘려가며 유선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것이 서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국가와 자손의 장래를 전적으로 맡긴 장면으로 이해되는가? 애당초 유비는 자신의 사후 제갈량에게 권력을 독점시킬 생각이 없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필적한 만한 재능을 지닌 인물인 유파에게 권력을 분점시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고자 했다. 불행히도 유파는 유비의 사망 직전에 죽었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이엄에게 그 역할을 맡겼으나 그는 재능이 부족했다. 이 상황에서 유비는 제갈량에게 마지막으로 어린 군주에 대한 충성의 다짐을 받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탁고의 본질이다. 이엄은 역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고 결국은 책을 잡혀 제갈량에게 숙청당했다. 이로써 촉나라 조정에서는 아무도 제갈량의 권력독점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게 되었다. 유비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결과였다. 제갈량이 유선을 내치고 황위를 빼앗지 않은 것은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제갈량이 정권을 찬탈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당시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시대에 촉의 위치는 매우 취약했다. 위와 오와 같은 강대한 적국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함부로 찬탈을 시도했다간 내우외환이 겹쳐 조기에 패망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만약 제갈량이 북벌에 성공해 천하를 제패했다면 어찌 됐을까? 그가 끝까지 한나라의 충실한 신하로 남을 수 있었을까? 모든 권력과 신망이 제갈량에게 집중되게 된 상황에서 모든 권력을 황실에 되돌려주고 물러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만고의 충신으로 칭송되고 있는 그가 '삼국지연의'에서 간교한 역적이요 찬탈자로 묘사되고 있는 조조나 사마의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거짓말 벗겨보기]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었기에 주유와 황충이 화공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호풍환우할 수 있는 신적 인물로 묘사되기까지 한다. 전혀 사실과 다르다. 적벽대전의 승리는 전적으로 주유의 공이었다. 제갈량은 유비와 손권의 동맹을 체결하는 외교적 역할 이외에는 한 일이 없었다. 이때까지도 제갈량은 군사적인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풀이] *탁고=고아의 장래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함. *호풍환우=요술로 바람과 비를 불러일으킴. 2013.01.1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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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만화가대회, 세계 만화가 500명 몰린다

세계 만화가들의 ‘올림픽’이 열린다. 20여개국 500여 명의 만화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제11회 국제만화가 대회’가 오는 9월 15일부터 19일까지 경기도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개최된다. 국제만화가 대회는 매년 세계 각국을 돌며 열리는 행사다. 이 행사에는 일본 복싱 만화 ‘내일의 조’의 지바 데쓰야, ‘아버지’ ‘신들의 봉우리’의 다니구치 지로, ‘신의 물방울’ ‘소년 탐정 김전일’의 스토리 작가 기바야시 신, 대만과 중국의 역사 만화가 채지충과 진유동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가들이 대거 참가해 한국의 만화팬들을 만난다. 특히 다니구치 지로는 이번 방한에서 ‘2010 부천만화대상’의 해외작가상을 수상한다. 또한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을 제작한 미국 마블코믹스의 편집자 C.B. 세뷸스키가 9월 18일 ‘미국 진출 전략 세미나’를 열어 관심을 모은다. ‘아시아 삼국지 만화전’은 이번 행사의 대미다. 한·중·일에서 제작된 삼국지 20여 편이 전시돼 삼국의 만화를 직접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유명 작가들이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캐리커처 체험’ 등 다채로운 행사가 더해져 만화 팬들의 관심을 모을 전망이다. 박재동 대회 공동운영위원장은 “차기·차차기 국제만화가 대회 개최지인 중국 베이징과 일본 돗토리현도 이번 행사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세계 만화를 주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부천=장상용 기자 2010.08.2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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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혈단신 박지은 정관장배 4연승 도전

꿈의 4연승이 가능할까. 2월 1일부터 중국 광저우에서 열리는 제8회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 최강전 본선 3차 대회 최종전에 출전하는 한국 여자바둑이 벼랑끝 전술을 펼쳐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5명의 선수 가운데 4명이 탈락, 박지은 9단 만이 혈혈단신으로 경기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정관장배는 여성판 한·중·일 바둑 삼국지이다. 대회 방식도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과 똑같다. 한 선수가 질 때까지 상대국 선수를 바꿔가며 경기하는 연승전 방식이다. 다른 점이라면 농심배는 남녀 출전 자격에 제한이 없는 반면 정관장배는 여성만의 대회라는 것이다. 지난 1, 2차 대회에서 한국이 거둔 성적은 2승 4패. 개인전에서 국가대항전으로 바꾼 3회 대회 이후 최악의 기록이다. 일본도 스즈키 아유미 4단 만이 생존해 우승 가능성이 희박한 편이다. 반면 대회 2연패를 노리는 중국은 조선족 출신 송용혜 5단 외에 예꾸이 5단, 리허 2단 등 3명이 남아 가장 유리한 입장이다. 게다가 이번 대진표는 한국에 절대 불리한 상황이다. 박지은이 1일 열리는 3차대회 제1국에서 송용혜와 맞붙기 때문이다. 송용혜는 지난 대회에서 파죽의 6연승으로 중국 우승의 주역이 됐던 신예 강호다. 여기서 지면 한국은 탈락이다. 이 경기를 이긴다 하더라도 일본의 스즈키에 이어 예꾸이·리허 등과 연속으로 대결해야 한다. 우승까지는 4연승이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박지은의 컨디션이 최상이기 때문이다. 비록 4일 연속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여자 바둑은 치밀한 수읽기와 뚝심으로 장기전을 펼치는 남자 바둑과 달리 치열한 싸움바둑으로 승패를 가리는 단기전이 많다는 점도 박지은에게 힘이 될 수 있다. 한국인삼공사가 후원하고 한국기원이 주관하며, 바둑TV와 세계사이버기원이 공동 주최하는 제8회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최강전의 우승상금은 7500만원이다. 3연승부터는 연승상품을 별도로 지급한다(3연승 지삼(地蔘) 20지(支) 2세트, 4연승 지삼 20지 4세트, 5연승 지삼 20지 6세트, 6연승 지삼 20지 8세트). 한편 2월 2일과 3일에는 정관장배 본선 대국과는 별도로 한·중 초청 4강전이 열린다. 한국의 사이버오로(www.cyberoro.com)와 중국 시나닷컴(sports.sina.com.cn/chess)에서 누리꾼 팬투표로 결정한 초청 4강전에는 한국에서 박지은 9단과 조혜연 8단, 중국에서 루이나이웨이 9단과 탕이 2단이 출전한다. 이들은 4강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가린다. 박상언 기자 2010.01.29 11:06
게임

이승한 대표 “모바일 게임 패러다임 바꾸고 싶다”

"모바일게임 1000만 다운로드 시대에 지도 바꾸는 큰 사고를 치고 싶다." 이승한(45) 넥슨모바일 신임대표는 자신의 취임과 비슷한 때인 지난 4월 22일 출시한 신작 ‘메이플스토리:해적편’의 선전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본사인 넥슨의 온라인게임 빅히트작이기도 한 이 게임은 하루 1만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통신 3사 1위 석권했다. 2004년 출시한 법사·전사·궁수편 등 초기 3편과 2007년에 종합편, 지난해 도적편에 이은 신작이다. 그는 “이번 해적편이 6번째 시리즈다. 올 9~10월이면 전체 누적 다운로드 1000만을 돌파할 것 같다. 이는 ‘미니게임천국’(컴투스) ‘프로야구’(게임빌) 등 모바일 게임사 빅3의 대표작이 각각 올해 안에 1000만 다운로드를 달성하는 경사다"라고 말했다. 넥슨모바일의 경우 ‘메이플스토리’에 이어 넥슨 IP를 이용한 모바일 게임으로 최근 지오인터랙티브로부터 판권을 회수한 ‘던전앤파이터’의 신작도 준비 중이다. 애플의 앱스토어의 모바일 오픈 마켓에 대해서는 “개발자 입장의 시장인 것 같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 이 대표는 "앞으로 온라인과 모바일이 합쳐지는 플랫폼에서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한때 모바일게임사가 700개가 넘었지만 현재 거대 통신사와 의미있는 게임을 공급하는 업체는 10~20여곳. 단말기 성능과 게임 퀄리티가 높아지면서 중소기업이 많이 탈락했다. 그는 "온라인게임의 10분의 1(3000억원) 시장이지만 ‘삼국지무한대전’과 멤버숍을 도입한 것처럼 업계 1위는 물론 서비스나 시장에서 모바일 플랫폼을 이용한 지도를 바꾸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2004년 넥슨모바일 경영 이사로 입사한 이 대표는 현대그룹 종합기획실과 IMM투자그룹에서 재무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박명기 기자 2009.05.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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