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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규칙 몰라도 할 수 있는 KPGA 심판

지난 4월 한국 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경기위원장이 경질됐다. 개막 이전 이벤트 대회에서의 금품 수수와 개막전에서 생긴 특정 선수 봐주기 의혹 때문이었다.KPGA가 꼭꼭 덮어 놓은 더 큰 문제도 있었다. 지난 3월 시니어 투어에서 선수들 담합에 의한 스코어 조작 사건이 있었는데, KPGA와 경기위원회는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2월 발행한 이사회 회의록과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났다.A선수는 영구 자격 정지, B선수는 5년 정지와 벌금 5000만원, C선수는 3년 정지와 3000만원, D 선수는 6개월 정지 등 중징계를 받았다. 일부 시니어투어 선수와 경기위원은 “캐디까지 매수해서 담합했을 가능성이 큰, 매우 심각한 사건이어서 더 무거운 징계가 내려져야 했다”고 주장했다.위원장 교체 후에도 굵직한 사고가 거푸 있었다. 지난 8월 프로테스트 2차전에선 경기 도중에 로컬룰이 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기 중 규칙이 변경된다면 먼저 친 선수와 나중에 친 선수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은 것이므로 경기 취소사유가 된다. KPGA 경기위원회는 “실수로 생긴 해프닝으로 다시 정정했다”고 설명했지만, 이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선수는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11월 열린 3차 프로테스트에서는 더 큰 사고가 터졌다. 경기위원회는 안개 때문에 라운드를 취소했다가 이를 번복했고, 이에 대한 반발이 나오자 10명을 추가로 선발해주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A조에는 25명, B조에서는 35명을 선발하게 됐다. 확연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버렸다.두 사례는 골프에서 가장 기본적인 공정성의 원칙을 훼손한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또 소송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3월 일어난 스코어 담합 사건 같은 건 위원회가 아니라 선수의 잘못이지만 “친한 선수를 한 조에 묶어주는 것 같은 잘못된 관행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지적에 고개가 끄떡여진다.KPGA와 경기위원회의 어려움은 안다. 예산이 적어 골프장을 경기 시간에 맞춰 빌리니 날씨가 좋지 않으면 급한 마음에 우왕좌왕하다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큰 실수가 반복되는 건 구조적인 문제다. 기자는 경기위원회가 규칙과 경기 운영에 자신이 없어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다가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고 본다.두 가지가 문제다. KPGA의 경기위원 선발 규정에는 골프 규칙 시험 규정이 없다. 규칙을 잘 몰라도 인맥이 좋으면 경기위원이 될 수 있다. 실력이 없으면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데, 이를 만회하려고 힘센 사람에게 줄을 대야 하니 공정성도 떨어진다.또 다른 문제는 KPGA의 경기위원이 모두 회원이라는 점이다. 사법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골프 실력도 뛰어나다는 보장이 없듯, 골프 실력이 좋은 사람이 (경험이야 더 많겠지만) 규칙을 더 잘 이해한다는 보장은 없다. 박노승 전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은 “경기위원을 KPGA 회원 중에서만 뽑는 것은 일종의 동종교배다. 선후배, 스승-제자 사이로 얽혀 있어 여러 가지 문제도 발생한다”고 주장했다.반면 KLPGA는 골프 규칙 시험을 참고해 경기위원을 뽑고, 비회원에게도 문호가 열려 있다. 오심이 거의 없다.경기위원 선발 같은 건 겉보기에는 사소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자는 투어를 지탱하는 중요한 뿌리라고 본다. KLPGA는 건강하고 거대한 뿌리를 가졌는데, KPGA의 뿌리는 어떤가.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2021.12.28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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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LPGA 200승, 국내 투어 세계화 고민할 때

한국이 지난 24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200승을 달성했다. 골프 불모지에서 자란 구옥희는 맨땅에서 헤딩하듯 LPGA 투어에 진출, 1988년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98년 박세리는 ‘맨발의 투혼’으로 경제 위기를 겪던 국민에게 희망을 줬다. 2013년 박인비는 골프사에 남을 메이저 3연승을 거뒀다. 2021년 고진영은 혼자 한국의 197~200승을 따냈다. 한국 여성 골퍼들의 노고와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그들은 한국 골프는 물론, 전 세계 여자골프의 판도를 바꿨다. 한국 최고의 수출품이라는 얘기도 들었다.최근 변화의 움직임도 보인다. 올해 한국 선수들은 LPGA 일반 대회 6승에 그쳤고, 메이저 대회와 올림픽에서는 빈손이었다. 2019년 15승,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에서도 7승(메이저 3승)을 거둔 것과 비교하면 완연한 하락세다.남은 두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도 우하향 그래프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전망도 밝지 않다. 올해 LPGA 투어에서 우승한 한국 선수는 3명뿐이다. 박인비는 은퇴를 생각 중이고, 눈에 띄는 젊은 피는 보이지 않는다. 7년 만에 한국 선수가 LPGA 신인왕을 타지 못했다.한국의 유망주들은 LPGA 투어에 시큰둥하다. 이 추세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선수들의 도전정신이 줄었다는 비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가 변했다. 지난 20여년간 한국의 정상급 여자 선수들은 당연히 LPGA에 갔다. 요즘은 개인의 취향이 중요하고 즐기면서 운동하려고 한다.더 중요한 것은 경제적 이유다. 돈은 프로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과거 여성 프로들이 LPGA 투어 진출을 갈망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 투어 총상금이 국내 투어의 10배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면 부자가 될 기회를 얻었다.올해 KLPGA 투어 31개 대회 총상금은 280억원이다. LPGA 투어 상금의 3분의 1 정도다. LPGA에서 뛰는 한국 선수는 세금과 경비를 빼면 수입이 국내 투어에서 뛰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미국에 갔다가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선수들이 국내 투어에 머무는 게 반드시 나쁘진 않다. 한국 선수들은 LPGA 투어에서 200승을 거둠으로써 충분히 실력을 증명했다고 본다. 300승, 400승도 좋지만 이제 서서히 국내 투어를 세계화할 때가 됐다. 세계랭킹 100위 이내에 한국 선수가 31명이니, 여전히 한국이 여자골프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테슬라보다 현대차가 잘 되는 것이 한국인들에 좋다. 현대차가 일자리를 한국에 많이 만든다. 냉정히 보면 LPGA 투어는 다른 나라의 스포츠 단체이고, KLPGA가 한국의 투어다.물론 문을 닫아놓으면 안 된다. 치열한 경쟁을 위해 외국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코스도 가능한 한 길고 어렵게 만들어서 변별력을 높여야 한다. 올림픽, 메이저대회, 인터내셔널 크라운 등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한국의 여자 투어는 2류로 떨어지고, 팬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일본의 경제 버블이 절정이었던 1980년대 남녀 투어 상금이 미국 투어에 육박했다. 선수들이 굳이 미국에 갈 필요가 없었다. 이후 일본 내 경쟁이 느슨해졌고 수준이 급격히 떨어졌다. 2019년 시부노 히나코는 무려 42년 만에 고국에 메이저 우승컵을 안겨줬다. 일본 골프의 ‘잃어버린 40년’이었다.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2021.10.27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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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호수에 풍덩, 더는 못 보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시즌 첫 메이저대회인 ANA 인스퍼레이션이 내년부터 셰브런 챔피언십으로 이름을 바꾼다. 2022년 대회는 이전처럼 캘리포니아주 란초 미라지의 미션 힐스 골프장에서 열리지만, 2023년에는 텍사스주 휴스턴으로 옮겨 개최된다. 장소가 바뀐다는 건 우승자가 호수(포피의 호수)로 뛰어드는 이 대회 전통도 사라진다는 뜻이다. 대회가 열리는 날짜도 바뀔 전망이다.LPGA투어는 6일(한국시간) “LPGA가 ANA를 대신할 새로운 스폰서로 셰브런을 영입, 6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대회 상금은 31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로 60% 이상 늘어난다. 골프 전문 채널에서 방송됐던 ANA 인스퍼레이션은 셰브런 챔피언십으로 변경돼, 미국 지상파(NBC)를 통해 중계된다.ANA 인스퍼레이션은 남자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 직전 주(3월 말)에 열려 왔다. 이 때문에 ‘여자 마스터스’라는 별명도 얻었다. 캐디복을 마스터스와 똑같이 하는 등 이 대회는 마스터스를 닮으려고 했다. 그러나 2019년 오거스타 내셔널이 ANA 인스퍼레이션 대회 기간 여자 아마추어 챔피언십을 개최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일부 선수들이 ANA에 불참하고, 마스터스 여자 대회에 나갔다. 미디어와 팬들의 관심도 옮겨졌다. 그해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열린 대회는 NBC를 통해 119만 명이 시청했다. 같은 해 ANA 인스퍼레이션 최종라운드 시청자는 19만4000명에 불과했다.LPGA 투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결국 새 스폰서를 영입하면서 대회 장소와 일정을 바꿨다. 일정 변경이 쉬운 건 아니다. 일정을 당기면 기아 클래식 등 LPGA 투어 대회들의 스케줄도 옮겨야 한다. 남자 대회인 WGC 대회도 피해야 한다. 사막 지역이라 뒤로 미루면 너무 덥다.ANA 인스퍼레이션은 한국 선수들과 사연도 많다. ‘호수의 여인’이 된 한국 선수는 박지은(2004), 유선영(2012), 박인비(2013), 유소연(2017), 고진영(2019), 이미림(2020) 등 6명이나 된다.박세리는 ANA에서 우승을 못 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지 못했다. 김인경은 2012년 대회에서 30㎝ 정도의 짧은 우승 퍼트를 넣지 못해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박인비 측은 “US오픈도 큰 대회지만 포피의 호수에 뛰어드는 전통 때문에 ANA가 가장 인상적인 대회였다”고 밝혔다.이 대회는 1972년 콜게이트-다이나 쇼어 위너스 서클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나비스코 챔피언십 등으로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꾼 이 대회는 2021년 50번째로 열렸다. 현재로서는 2022년 우승자가 포피의 호수로 점프하는 마지막 선수가 된다. 대회를 주관하는 IMG는 “우승자가 호수에 뛰어드는 전통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볼 것”이라고 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2021.10.0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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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세계 1위 밀려나자마자 우승한 고진영

고진영(26)이 5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더콜로니의 올드 아메리칸 골프장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벌룬티어스오브아메리카 클래식에서 마틸다 카스트렌(핀란드)을 제치고 16언더파 268타로 우승했다. 고진영은 지난 7개월간 우승이 없었다. “골프 사춘기에 빠진 것 같다”는 인터뷰도 했다. 지난주 세계 랭킹 1위에서 밀려나자마자 보란 듯 반등했다. 세계 랭킹 1위 선수들은 이에 어울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욋일도 많다. 인터뷰 요청이 잦고, 대회 홍보 행사에도 참가해야 한다. 수많은 경쟁자의 도전도, 미디어와 팬들의 주목도 견디고 즐겨야 한다. 그게 쉽지만은 않다. 청야니(대만)는 랭킹 1위를 달릴 때 “1위가 부담스럽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남자 골프 랭킹 1위를 했던 루크 도널드(잉글랜드)도,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도 “랭킹 1위라는 부담감이 없다면 경기가 더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랭킹 1위에서 밀려났을 때 “홀가분하다. 이제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 번 밀리면 멈추기는 쉽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데이비드 듀발(미국)이다. 1999년 타이거 우즈(미국)와 1등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다 기우뚱한 후 끝없는 미끄럼을 탔다. 투어 카드도 잃었다. 1위를 오래 유지하긴 쉽지 않다. 정상의 운동선수가 갖춰야 할 초인적인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도 야구로 외도하기도 했고, 여러 번 은퇴했다가 코트로 돌아왔다. 골프는 실수가 빈번한 게임이고,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개인 종목인 골프는 혼자 모든 걸 책임져야 하므로 더 힘들고 고독하다. 타이거 우즈와 안니카 소렌스탐이 1등의 자리에 오래 머문 건 그래서 대단한 일이다. 어떤 선수는 실패했을 때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 이른바 회복 탄력성이 높다. 오히려 실패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기도 한다. 고진영의 뚝심도 놀랍다. 지난 2017년 LPGA 투어 하나은행 챔피언십 최종라운드 챔피언 조에서 고진영은 박성현-전인지와 맞대결했다. 두 스타의 팬들이 경쟁적으로 응원했고, 고진영은 외로운 싸움을 했다. 11번 홀에서 고진영은 약 60㎝ 거리의 버디 기회를 잡았다. 공과 홀 사이 그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수리해도 되는 피치 마크인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스파이크 자국인지 물었다. 동반자는 수리하면 안 된다고 했다. 고진영은 그냥 퍼트해야 했다. 공은 홀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분 나쁘고 흔들릴 만했지만, 고진영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 홀에서 버디를 잡고 보란 듯 우승을 차지했다. 고진영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라고 했다. 우즈는 지난해 마스터스 최종라운드 12번(파3) 홀에서 7오버파 10타를 쳤다. 공을 세 개나 물에 빠뜨렸다. “선수 교체를 해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고 나중에 고백할 정도로 참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즈는 이를 극복하고 남은 6개 홀에서 버디 5개를 잡아냈다. 고진영을 가르친 멘탈 코치 정그린 그린 에이치알디 컨설팅 대표는 “고진영은 워낙 성취욕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잘 다듬어진 선수다. 시야를 넓게 하고, 우승이나 1등에 연연하지 않게 가르쳤다. 장거리 목표를 설정하게 했다. 10년 후 미래를 그리면서 현재는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샷 하나 하나에 집중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고진영은 아직 랭킹 1위 넬리 코다(미국)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추월을 위한 시동은 걸었다. 그는 “도쿄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2021.07.0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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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골프의 목소리’ 저물다

“누가 저 친구 좀 말려주세요. 큰 잔으로 브랜디를 먹여서 좀 눕혀주세요." 1999년 스코틀랜드 카누스티 골프장에서 열린 디 오픈 챔피언십 마지막 홀에서 3타 차로 앞서던 장 방 드 밸드(프랑스)가 개울에 들어간 공을 치려고 신발을 벗자 BBC의 해설가인 피터 앨리스가 한 말이다. 공은 물속에 잠겨 있었고 개울둑은 높았다. 팬들은 용감한 방드 밸드에 환호했지만, 전문가들이 보기엔 무리였다. 앨리스는 “저건 완전히 미친 짓”이라면서 “공을 치려다가는 20등 밖으로 밀려 나갈 수도 있다”고 했다. BBC 등에서 50여년간 골프 해설가로 활동해 ‘골프의 목소리’라는 애칭을 가진 피터 앨리스가 6일(한국시간) 89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선수로서 유러피언투어 등에서 21승을 거두고 라이더컵에 8번 출전했던 앨리스는 1961년 방송을 시작했다. 우연히 비행기 뒷자리에 앉았다가 그의 말솜씨를 엿들은 BBC 방송 관계자가 그를 스카우트했다. 70년대 중반 은퇴하고 78년 전문 방송인이 됐다. 마스터스가 열린 오거스타 내셔널 11번 홀에서 5퍼트를 한 후 퍼트 입스로 고생한 터였다. 그는 영국 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도 방송했고 골프 관련 서적도 20권을 냈다. 1964년 골프 장면이 나오는 007 영화 골드핑거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숀 코너리에게 레슨도 해줬다. 영국에서 공부한 골프애호가이자 번역가인 정호빈 씨는 “솔직하고, 현장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시청자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며 어려운 상황도 유머로 풀어낸다”고 했다. 앨리스는 BBC 자연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하는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이 연상되는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다. 애튼버러처럼 앨리스도 잔잔하고 정곡을 찌르는 멘트를 했다. 골프 중계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 샷에 대한 설명과 통계만으로는 심심할 때도 있다. 미국 CBS 방송의 스포츠 캐스터인 짐 낸츠는 “앨리스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면서 놀라운 스토리텔링을 해낸다”고 했다. 즉흥적으로 재미있는 말을 잘해 “상황에 맞는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은 비밀 책이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이런 식이다. 2002년 타이거 우즈가 디 오픈 챔피언십 악천후 속에서 81타를 치는 걸 보고 그는 “파바로티 공연을 보러왔더니 후두염에 걸려 노래를 못하는 상황이다”라고 했다. 그의 장점은 재미만은 아니다. 다른 골프 전문가도 알지만 얘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치권력, 자본권력, 연예권력, 미디어권력처럼 스타 선수들도 권력에 가깝다. 요즘 해설가들은 선수에 대한 비판을 자제한다. 앨리스는 선수가 아니라 시청자 편에 서서 잘못 한 건 잘못 했다고 얘기했다. 그는 우즈에 대해 “학대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우라를 잃었다”고 했고, 콜린 몽고메리, 닉 팔도 등 영국 최고 스타들과도 신경전을 벌였다. 코스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다고 불평하는 젊은 선수들과는 언쟁이 잦았다. 예전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도 있다. 2003년 앨리스는 마스터스 우승자 마이크 위어에게 부인이 뭐라고 속삭이자 “우리 집에 새 주방이 생겼어”라는 말이라고 농담을 했다. 당시엔 문제가 안 됐다. 2015년 잭 존슨이 디 오픈에서 우승했을 때 그는 비슷한 얘기를 했다. 이번엔 여성차별이라 비난받았다. 99년 방드 밸드에 한 말을 요즘 했다면 비난받았을 것이다. 시대가 변했다. 그래도 그의 풍자 정신은 필요하다. 골프는 여백의 스포츠다. 골프 방송에서 이 여백을 정보, 유머, 때론 건전한 비판으로 채워야 한다. 그의 차 번호판은 PUT3였다. 3퍼트를 번번이 한 자신마저 풍자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sung.hojun@joongang.co.kr 2020.12.0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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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마라도나와 우즈, 두 개의 자아

디에고 마라도나는 마흔 살 즈음 요양을 위해 쿠바에 머물며 하루 2라운드씩 골프를 했다. 그는 “하루도 골프 없이 지내는 걸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마라도나는 축구화를 신은 채 골프공으로 리프팅을 잘 했다. 그러나 "골프채로 치기엔 공이 너무 작아 힘들다"고 했다. 또 "그래서 재미있다"고 했다. 핸디캡은 16이었다. 그는 골프 스윙 동작이 프리킥 슈팅 동작과 비슷하다고 했다. 미국 HBO가 만든 다큐멘터리 ‘디에고’에 따르면 마라도나에게는 두 개의 자아가 있다. 슬럼에서 자란 촌스러운 축구 천재 디에고와 축구 산업을 위해 만들어진 마라도나다. '디에고'는 가족을 빈곤에서 구해내기 위해 공을 찼다. 반면 '마라도나'는 팀과 팬의 기대를 한몸에 짊어진 슈퍼스타다. 현실 속 디에고와 신화 속 마라도나는 갈등했다. 마라도나는 수줍음 많은 디에고를 어디든 끌고 다녔다. 현기증 나는 관중의 환호와 명성, 때로는 마약과 마피아, 미녀 앞으로. 마라도나는 디에고를 결국 어둠 속으로 끌고갔다. 그러나 그는 “마라도나가 없었다면 디에고는 빈민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벌타를 주는 ‘정직한’ 골프와 달리, 축구는 속임수의 경기일 수 있다. 오른쪽으로 드리블하는 척하면서 왼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차는 척하면서 오른쪽으로 슛한다. 마라도나는 머리가 아주 좋았기 때문에 그걸 잘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잉글랜드전이 그런 그를 가장 잘 규정한 경기였다. 그 유명한 ‘신의 손’ 골이 나왔고, 3분 뒤에는 수비수 5명을 제치고 70야드를 돌파해 득점했다. ‘신의 손’ 골 당시 마라도나의 연기가 너무도 유려해 심판 등 대부분이 속았다. 두 번째 골은 20세기 위대한 골 중 하나로 꼽힌다. 한 경기에서 나온 두 골이 마라도나와 디에고라는 그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오프라 윈프리는 “명성을 얻으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고 말했다. 마라도나는 명성을 얻은 후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꼴찌팀 나폴리를 우승으로 이끌 때는 용서가 됐다. 하지만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고 홈팀 이탈리아를 꺾자 모든 상황이 뒤바뀌었다. 마라도나는 타이거 우즈를 연상시킨다. 자신의 스포츠를 완벽히 지배했고, 전례없이 화려하게 해석한 천재 예술가다. 우즈의 원래 이름은 엘드릭이다. 조용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타이거라는 이름을 붙여 전사로 키웠다. 우즈 안에서도 엘드릭과 타이거라는 두 개의 자아가 갈등했다. 엘드릭은 학교에서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필드에 선 타이거는 자신감 넘치는 스타였다. 그의 여자 친구가 “둘 중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우즈는 대답하지 못했다. 스타가 된 후 우즈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실수했을 것이다. 200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이 대표적이다. 뉴욕타임스는 “마라도나를 비춘 빛이 너무 밝아 어둠이 자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즈도 비슷할 거다. 신의 경지에서 경기를 하던 그들의 실수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된다. 우즈는 2017년 허리가 아파 누워 있으면서 비로소 자아와 평화를 찾았다. 마라도나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50대지만 80세보다 많이 경험했다”는 그의 몇 년 전 인터뷰가 그나마 위안이다. 아디오스, 디에고.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2020.12.0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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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김세영 첫 메이저 우승의 의미

2015년 LPGA 투어 루키 김세영은 놀라웠다. 자신의 두 번째 경기인 퓨어실크 챔피언십 연장전에서 불가능할 것 같던, 덤불에 들어간 공을 쳐 내며 챔피언이 됐다. 국내 투어에서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김세영은 뭔가 특별한 일을 해내는 선수라는 인상을 줬다.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이 허언이 아님도 다시 보여줬다. 김세영은 그해 자신의 첫 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ANA 인스퍼레이션에서도 기회를 잡았다. 최종라운드를 3타 차 선두로 출발했다. 그러나 75타를 치면서 공동 4위로 미끄러졌다. 김세영은 14번 홀에서 4퍼트를 하기도 했다. 역전의 명수라는 호칭이 워낙 강해 선두로 출발할 때 오히려 불안한 듯했다. 그냥 물러날 김세영이 아니었다. 2주 후 열린 롯데 챔피언십에서는 극장 우승을 했다. 패배 눈앞이었는데 18번 홀 칩샷을 넣어 연장전에 갔고, 연장 첫 홀 페어웨이에서 그대로 홀인해 경기를 끝냈다. 당시 상대는 박인비였다. 6월 열린 메이저 대회인 여자 PGA 챔피언십 최종라운드에서 김세영은 박인비에 2타 차 2위로 출발했다. 역전의 여왕에게 기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김세영 특유의 폭풍 같은 샷은 나오지 않았다. 역전의 여왕은 결국 침묵의 자객 박인비를 잡지 못하고 2위에 그쳤다. 한 달 후 열린 US오픈에서는 김세영의 샷감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캐디가 핀 위치를 적은 종이를 공개 전에 사진 찍어왔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출전정지 징계를 받게 되면서 김이 샜다. 이후 이상하게도 메이저대회에서는 꼬였다. 여러 차례 메이저 우승 기회를 놓쳤다. 2018년 에비앙에서는 최종라운드 중반 공동 선두로 올랐다가 짧은 퍼트를 놓친 후 2위로 밀렸다. 김세영은 LPGA 투어의 간판선수 중 하나다. LPGA 투어 72홀 파 기준(31언더파) 타수 기준(257타) 최저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LPGA 투어 사상 최대 상금(150만 달러)의 주인공이 됐다. 12일 열린 KPMG 여자 PGA 챔피언십 직전까지 통산 10승을 기록했다. 통산 상금도 900만 달러(약 103억원)을 넘었다. 김세영은 모든 걸 가졌다. 메이저 우승컵이 없는 걸 빼면 그렇다. 골프에서 메이저 우승 숫자는 선수의 업적을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이 된다. 그레그 노먼(호주)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선수 중에도 위대한 선수가 여럿 있다”고 한 적이 있다. 한 기자가 “그 선수 이름을 대보라”고 물었다. 노먼은 한참 생각하더니 “맞다.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선수 중에도 ‘괜찮은’ 선수가 여럿 있다”고 말을 수정했다. LPGA 투어는 메이저 우승이 없으면 명예의 전당에도 들어갈 수 없다. 김세영은 현역 선수 중 메이저 우승 없는 선수 중 최다승 선수였다. 큰 경기에서 약한 선수라는 뉘앙스가 없지 않다. 여자 PGA 챔피언십 우승은 5년 넘게 묶은 김세영의 메이저 한을 날려버렸다. 각종 최저타 기록을 보유한 김세영은 명실상부한 LPGA 투어 최고 선수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퍼포먼스가 놀라웠다. 2위를 한 박인비는 경기 후 “김세영의 경기는 언터처블이었다. 메이저 우승자는 최종라운드 이렇게 경기하는 것을 보여줬다”고 칭찬했다. 미국 골프위크는 “김세영이 마지막 날 기록한 7언더파는 기대할 수 없는 스코어였다”고 썼다. 대회장인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인근의 아로니밍크 골프장은 매우 어렵다. 경기 전 언더파 우승자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불처럼 뜨거운 역전승을 거두던 김세영이 최종라운드 선두로 나서 냉철하게 승리를 지키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가 연상됐다. 김세영에겐 여러모로 의미 있는 우승이다. 성호준 골프전문 기자sung.hojun@joongang.co.kr 2020.10.12 08:42
축구

한국 왔다가면 2주 자가격리…황의조·황희찬 어쩌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각종 스포츠 대회와 프로리그가 초비상인 가운데, 이번에 그 불똥이 한국 축구대표팀으로 튀는 모양새다. 사상 초유의 월드컵 예선 3연속 무관중 경기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해외토픽감을 넘어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다. 한국은 다음 달 26일 투르크메니스탄을 상대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H조 5차전 홈 경기를 치를 예정이다. 장소는 천안종합운동장이 유력하다. 투르크메니스탄은 현재 한국인 입국을 제한하는 대표적 국가다. 그런 투르크메니스탄이다 보니 자신들의 한국 입국도 거부할 우려가 있다. 전한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은 25일 “코로나19 확산 추세를 검토 중이다. 최악의 경우 무관중 경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 아직은 투르크메니스탄이 자국 선수단 파견과 관련해 연락해 온 건 없다”고 전했다. 이어 “프로스포츠와 달리 A매치(성인대표팀 경기)는 모든 축구 경기 가운데 최상위 레벨이라는 상징성이 있어 정해진 일정을 바꾸기 쉽지 않다. 한 달 정도 남았으니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무관중 경기, 팬의 소중함 깨닫는 계기 벤투호는 월드컵 2차 예선 들어 잇따라 무관중 경기를 했다. 원정 3, 4차전이 무관중 경기였다. 지난해 10월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3차전 북한전은 ‘유령 경기’로 불렸다. 남북한 관계 경색 탓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무관중, 무중계 경기를 결정했다. 한국 선수단은 호텔에서 사실상 감금 생활을 했다. 경기 중에는 북한 선수가 황인범(밴쿠버)의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 지난해 11월14일 베이루트에서 열린 4차전 레바논전도 관중석이 텅텅 빈 채로 진행됐다. 레바논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자, 레바논축구협회가 선수 보호를 위해 무관중 경기를 결정했다. 경기장 안팎에는 무장군인들이 배치됐다. 한국은 두 경기에서 졸전 끝에 득점 없이 비겼다. 한 선수는 “고요한 무관중 경기는 마치 연습경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분위기가 어수선해 집중력과 동기 부여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다음 달 31일로 예정된 원정 6차전 상대인 스리랑카도 국내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스리랑카에서는 지난해 이슬람국가 IS의 연쇄 폭탄테러로 29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관중이 운집하는 스포츠 이벤트는 테러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한준희 해설위원은 “한국이 운이 없게도 폐쇄적이거나 국내 사정이 어수선한 나라들과 한 조에 묶였다. 북한, 레바논 원정은 경기 외적인 부분이 경기력에 영향을 미쳤다. 투르크메니스탄전을 무관중 경기로 치르면 홈 이점이 사라지지만, 어쨌든 객관적 전력은 우리가 앞선다”고 말했다. 코로나19는 유럽파 선수의 거취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21일 귀국해 오른팔 골절 수술을 받은 손흥민의 경우 영국으로 돌아가도 곧바로 소속팀 토트넘에 합류할 수 없다. 영국 정부는 한국인 입국자에 대해 2주간 자택 격리 조치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후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도 같은 조처를 할 경우, 황의조(프랑스 보르도)·황희찬(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권창훈(독일 프라이부르크) 등 대표팀 주축 선수들이 A매치 참가 후 소속팀 복귀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상 모든 클럽팀은 A매치 데이에 열리는 경기에는 선수를 의무적으로 보내야 한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경우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점에서 대표팀 차출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다. A매치에 출전한 뒤 소속팀에 복귀한 뒤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일정 기간 격리될 경우 소속팀으로서는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전한진 총장은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A매치 엔트리 구성을 마치기 전에 관련 정보를 공유해야 할 것 같다. 아직 다음 달 A매치 선수 차출 협조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 소속팀에서도 먼저 연락해온 케이스는 없다”고 전했다. 여자축구는 코로나19로 인해 경기 일정이 바뀌었다. 한국은 중국과 다음 달 6일 용인시민체육공원 주경기장에서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플레이오프 홈 1차전을 치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용인시에서 감염 확진자가 나오면서 시 측에서 경기 개최를 포기했다. 축구협회는 “개최를 원하고 시설도 갖춰진 다른 국내 도시를 찾는 게 우선이다. 여의치 않을 경우 제3국 개최나 대회 연기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검토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전국에 확산하는 상황에서 개최 희망 도시가 나올지 미지수다. 중국은 홈 2차전(3월11일) 개최지를 중국 우한에서 호주 시드니로 변경했다. 송지훈·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2020.02.26 08:22
스포츠일반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내 멋대로 살아’ 성공한 허재·히메네스

2011년 유러피언투어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에서 리 웨스트우드(47·잉글랜드)와 미겔 앙헬 히메네스(57·스페인)를 인터뷰했다. 당시 세계 1위였던 웨스트우드는 소탈했고 농담을 잘했다. 프로암 라운드에 동반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티박스에서 270야드쯤 되는 지점에서 한 아마추어 참가자가 그에게 “혹시 이 공이 당신 거냐”고 물었다. 웨스트우드는 “내 공은 저 앞에 있다. (거리가 짧은) 이 공은 아마 타이거 우즈 거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에게 “이건 기사에 쓰면 안 된다. 우즈와 싸움이 날 것”이라고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영국식 농담이 재미있었다. 한편으론 랭킹 1위에 오른 그가 '골프 황제' 우즈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는 생각도 들었다. 히메네스도 사람 좋고 농담을 잘했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라 만차의 기사 돈키호테 같은 개성이었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꽁지머리를 했고, 괴상한 자세로 스트레칭했다. 다른 사람 생각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TV 중계를 해도 시가를 입에 문 채 벙커샷을 했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에스프레소를 놓고 ‘멍때리기’를 좋아했다. 또 저녁이면 와인 한 병을 들이킨다. “운동선수가 그래도 되냐”고 묻자 그는 “스포츠가 전부가 아니다. 인생도 중요하다. 인생은 단 한 번이다. 와인과 시가, 에스프레소는 물론 위스키, 페라리(스포츠카) 등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모든 스위치를 끄고 해변에 누워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반갑게도 두 선수가 19일 나란히 우승했다. 히메네스는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시니어 투어) 개막전에서 우승컵을 들었다. 히메네스는 막 시니어 투어에 들어온 ‘젊은이’ 어니 엘스(51)를 연장전에서 제쳤다. 40대에 빛을 보기 시작한 히메네스는 50대 들어 창창하다. 시니어 투어 7년 동안 매년 우승하며 중년을 만끽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시간이 지날수록 멋져지는 와인”이라며 으쓱했다. 웨스트우드는 유러피언투어 아부다비 HSBC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2011년 한국에서 열린 발렌타인 챔피언십 우승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이 없었던 그는 최근 1년여 동안 유럽 큰 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했다. 히메네스와 달리 웨스트우드는 아픔이 많다. 메이저 우승이 한 번도 없다.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한 그에게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선수 중 최고 선수’라는 웃지 못할 평가가 따라다닌다. 이번 대회 우승 후 웨스트우드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다른 선수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나의 샷과 나의 전략과 나의 마음만 신경 썼더니 우승할 수 있었다.” 왠지 히메네스의 말을 듣는 듯도 했다. 웨스트우드는 세계 1위에 오른 뒤 사실상 수직 낙하했다. 너무 주위를 신경 쓰다가 스스로 무너진 게 아닌가 했는데 이제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여유를 찾은 것같다. . 허재가 요즘 예능계에서 잘 나간다. 다들 의외라고 생각한다. 더 잘 생기고, 말 잘하고, 젊은 스타 선수들도 방송계 문을 두드렸지만 잘 안 됐다. 나는 농구 담당 기자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허재 전 감독도 조금 안다. 지금 방송에 나오는 모습은 그가 평소에 하던 그대로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방송 트렌드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 솔직한 모습을 팬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히메네스와 비슷하다. 골프 선수 중 어릴 때 아주 잘하다가 어른이 된 뒤 깊은 슬럼프에 빠지는 이가 꽤 많다. 이유 중 하나는 주변을 너무 의식하기 때문이다. 남과 비교하는 선수는 자신보다 못하던 선수가 앞서가는 걸 견디지 못한다. 주의를 의식하다가 망가지는 것이다. LPGA 선수 대니얼 강의 오른손에는 ‘just be’라는 문신이 있다. ‘just be yourself’의 약자다. 작고한 아버지가 “누가 뭐라고 하든 너만의 인생을 살라”고 가르쳤다 한다. 대니얼 강은 프로가 된 후 어려움도 겪었지만 아버지의 조언 덕에 지금은 멋진 삶을 살고 있다. 성호준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2020.01.21 08:36
스포츠일반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어디서 시작했느냐’보다 ‘어디로 가느냐’ 가 중요

지난 29일 코리언투어 대구경북오픈에서 김비오(29)가 손가락 욕설 논란 속에 우승했다. 반나절 뒤 미국 PGA투어 세이프웨이 오픈에서 캐머런 챔프(24)가 우승했다. 두 선수 모두 양 투어의 최장타자다. 챔프는 신인이던 지난해 첫 우승 당시, 더스틴 존슨, 로리 매킬로이를 압도하는 장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번 우승이 챔프에게는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의 신발과 공에는 ‘pops’ ‘papa’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할아버지를 부르는 별칭이다. 챔프의 할아버지 맥 챔프(79)는 말기 위암으로 투병 중이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시설에 머물고 있다. 챔프는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를 위해 우승했다”고 말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텍사스주의 9홀 코스에서 75센트를 받는 캐디를 했다. 19세 때 징집돼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이후에도 군 생활을 이어갔다. 맥 챔프는 군에서 독학으로 배운 골프를 손자에게도 가르쳤다. 챔프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했고, 어릴 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서서히 기량이 향상됐고 PGA투어 신인이던 지난해 첫 우승했다. 챔프는 “할아버지는 내게 항상 ‘어디서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이것이 챔프에겐 스윙 기술보다 훨씬 더 중요한 레슨이 아니었나 싶다.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던 챔프는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뒤 우승했다. 할아버지는 그의 마음속 불꽃이 다시 타오르게 하는 어떤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김비오는 엘리트로 자랐다. 중학교 때 미국에 골프 유학을 갔다. 10대에 국가대표를 했고, 프로가 돼선 KPGA 신인상과 대상을 탔다. 꿈의 무대인 PGA투어에도 진출했다. 한동안 성적이 좋지 않았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올해 다시 살아났다. 그러다 휴대전화 셔터음으로 경기를 방해한 갤러리를 향해 손가락으로 욕설을 날렸다. 기자의 경험으론 한국 갤러리 수준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평균 이하도 아니다. 미국엔 노골적으로 선수를 조롱하고 경기를 방해하는 이른바 ‘해클러’도 있다. 문제는 휴대전화다. 한국에선 사진을 찍을 때 반드시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갤러리는 뭔가 찍으려는 욕망이 있다. 외국에선 무음 모드가 있어 촬영이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에겐 매우 신경 쓰인다. 그래도 규정이 그러니 지켜야 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선수라면 어느 정도 휴대전화 소음은 경기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 김비오는 10년 가까이 프로 생활을 했고, 미국 투어도 경험했다. 팬의 관심을 통해 돈을 버는 프로페셔널이라면 갤러리를 방해꾼이 아닌 고객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스타일수록, 관심이 집중될수록 갤러리가 많고 소음도 크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물론 화가 났겠지만, TV 중계로 가정에도 경기 장면이 중계되는데 손가락 욕설을 한 건 선을 많이 넘은 행동이다. KPGA라는 리그뿐 아니라 ‘신사의 스포츠’라는 골프에 먹칠했다. 올해부터 경기 규칙이 바뀌었다. 심각한 비행에 대해서는 경고나 1벌타, 2벌타, 혹은 실격도 줄수 있다. KLPGA에서 고의로 퍼팅 그린을 훼손한 선수가 2벌타를 받은 일이 있다. 갤러리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고, 드라이버로 티잉그라운드를 친 행동에는 어떤 처벌이 적절할까. 김비오는 투어 신인 시절 코스의 쓰레기를 줍기도 했다. 그러나 슬럼프를 겪으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은 것 같다. 욕설 논란 속에서 일궈낸 우승은 영광이 아니라 수모에 가깝다. “어디서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챔프 할아버지의 충고를 되새겨볼 일이다. 성호준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2019.10.0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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