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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찰스 국왕, 암 진단 후 첫 성명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

영국 찰스 3세 국왕이 암 진단 발표 후 첫 공식 언급을 내어 자신의 쾌유를 비는 응원에 감사를 표했다.10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찰스 3세는 이날 성명에서 "최근 며칠 동안 내가 받은 많은 응원과 안부 메시지에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하고 싶다"고 밝혔다.앞서 영국 왕실은 지난 5일 찰스 3세가 전립선 비대증 치료 중 암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암의 종류나 단계는 공개하지 않았으며 다만 전립선 암은 아니라고 밝혔다.찰스 3세는 이날 성명에서 "암을 앓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러한 친절한 마음들이 가장 큰 위로이자 격려가 된다"고 적었다.이어 "나의 암 진단이 (암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돕고 영국 전역과 전 세계 암 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모든 조직의 활동을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사실도 내게 용기를 북돋아 줬다"고 밝혔다.앞서 커밀라 왕비는 지난 8일 저녁 외부 행사에 참석해서 찰스 3세가 "아주 잘 지내고 있다"면서 그가 "대중이 보낸 모든 편지와 메시지에 매우 감동받았다"고 전했다.찰스 3세의 장남인 윌리엄 왕세자는 하루 전인 7일 런던에서 열린 자선 행사에 참석해 응원의 메시지들이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라며 "최근 몇주간은 '의학적' 문제에 다소 초점을 맞췄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안민구 기자 amg9@edaily.co.kr 2024.02.11 09:57
프로야구

영국의 귀족 스포츠 폴로, 조선에서 먼저 시작했다고?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동남아시아의 산유국 브루나이에서 세간의 주목을 끄는 초호화 결혼식이 열렸다. 지난 7일부터 열흘간 열린 결혼식의 주인공은 볼키아 국왕의 넷째 아들 압둘 마틴 왕자였다. 그는 왕위 계승 서열 6위이기 때문에, 국왕이 될 가능성은 작다. 그럼에도 결혼 피로연이 열리는 14일에는 영국의 윌리엄 왕세자 부부 등 정상급 귀빈들이 참석했다. 마틴은 영국의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킹스칼리지 런던대와 소아스(SOAS) 런던대에서 학사, 석사를 받은 인재다. 잘생긴 외모로도 유명한 그는 폴로 국가대표로 동남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동메달을 2개 획득한 스포츠맨이다. 말을 탄 채 ‘말렛(mallet)’이라고 불리는 스틱을 들고 작고 단단한 공을 사용하는 폴로는 국내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스포츠다. 다만 미국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 랄프 로렌의 폴로 브랜드 로고 때문에 폴로라는 스포츠 자체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폴로 경기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우선 폴로를 처음 본 관중은 엄청나게 큰 경기장에 놀란다. 크기가 270x150m로, 축구장 6개를 합친 면적과 비슷하다. 각 팀은 4명의 선수로 구성된다. 이들의 키트에는 1~4번의 번호가 쓰여 있는데, 번호로 팀에서 그의 포지션을 알 수 있다. 1번은 축구의 스트라이커에 해당하는 공격수이고, 4번은 수비수이다. 가장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선수가 2, 3번을 단다. 2번은 1번 선수의 공격을 지원하고, 수비적인 역할도 담당한다. 3번은 팀의 에이스이자 필드의 사령관이다. 미식축구의 쿼터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이렇게 팀은 공격수와 수비수로 구성되지만, 필요에 따라 선수들은 포지션을 변경할 수 있다. 여러분이 번호가 새겨진 폴로셔츠를 갖고 있다면, 이를 확인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에이스의 번호인 3번이 보통 폴로 매장에서는 가장 많이 보인다. 폴로는 ‘처커(chukker)’라고 불리는 세트(7분)로 나뉘어 벌어진다. 경기에 따라 4~6번의 처커가 펼쳐진다. 처커 사이에는 3분의 휴식 시간이 있고, 하프 타임은 15분이다. 폴로에는 왕, 왕족을 포함한 관객들이 참여하는 ‘디보트 스톰핑(Divot Stomping)’이라는 유명한 전통이 있다. 경기 중 필드의 잔디는 말발굽에 의해 손상되므로, 하프 타임 때 관객들이 나와 필드를 발로 매끄럽게 다지는 것이다. 보통 샴페인 잔을 든 관객들은 필드에서 발을 맘껏 구르며 사교 활동을 펼친다. 전통적으로 폴로는 왕, 왕족, 상류층의 점유물이었다. 폴로가 ‘왕들의 스포츠(Sport of Kings)’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가진 자들만의 스포츠답게 폴로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경기 중 ‘폴로 포니(polo pony, 폴로를 위해 특별히 조련한 말)’는 최대 시속 56㎞로 달리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 따라서 경기 중 포니의 교체는 필수다. 경기당 선수 한 명이 최소 2~3마리의 포니가 필요하고, 엘리트 레벨의 폴로 경기는 선수 한 명이 보통 8마리의 포니를 갖고 있다. 게다가 말을 돌볼 전문가와 수의사, 경기장 확보와 토너먼트 운영에도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고난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폴로는 꽤 위험한 스포츠이다. 질주하는 말을 탄 선수는 상대방과의 접촉으로 인해 낙마할 때도 있다. 게다가 추락한 선수는 추가로 말에 밟히거나 차일 수도 있다. 이로 인해 골절, 뇌진탕, 심지어는 사망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폴로는 포니에게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다. 시속 145㎞로 날아가는 공을 눈에 맞아 실명한 포니도 있다. 또한 포니는 전력 질주에 이어 급정거나 회전을 할 때 다리가 골절될 때도 있다. 다리가 부러진 말은 회복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보통 안락사로 이어진다. 폴로는 BC 6세기~AD 1세기에 페르시아제국에서 기병들을 위한 훈련과 스포츠 목적으로 시작됐다. 그 후 폴로는 인도로 전파됐고, 19세기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군대는 이를 처음 접했다. 영국군은 그들의 용도에 맞게 폴로를 각색하여 기병대 훈련으로 사용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폴로 경기의 규칙이 제정됐고 유럽 대륙, 미국과 남미 등으로 퍼져 나갔다.흥미로운 점은 고대 폴로가 중앙아시아와 당나라를 거쳐 고구려, 신라에도 전파됐다는 것이다. 고대 폴로는 격구란 이름으로 고려시대 때는 귀족들의 스포츠였다. 조선시대에는 격구가 과거 시험의 하나인 무과의 최종 시험 과목이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여진족과의 마찰에 태조 이성계가 최우선으로 육성한 부대가 기병이었다. 당시 기마병은 격구를 통해 전술 훈련을 가장 효과적으로 익혔다고 한다. 용비어천가 44장에도 이성계의 놀라운 격구 실력이 묘사될 정도로 격구는 당시 기마병의 특수 무예였다. 격구를 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뛰어난 말과 안장이 필수 요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위를 자랑하기 위해 말과 안장을 귀금속과 최고급 비단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해, 과소비의 온상으로 비난이 제기된 적도 있다. 이에 대신들은 어전회의에서 격구가 너무 사치스러우니, 폐지하자는 주장을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은 “무예를 익히는 데는 격구가 최고”라며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서양의 폴로보다 격구가 우수하다는 주장도 있다. 폴로는 말렛으로 공을 치고, 쫓아가서 또 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에 반해 격구는 공을 칠 뿐만 아니라, 스틱 끝에 숟가락같이 생긴 곳에 공을 담아 이리저리 휘두르는 등 폴로보다 훨씬 화려하고 어려운 기술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격구가 벌어지면 많은 백성들이 구경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군대 스포츠였다.이러한 격구가 화약무기가 등장하면서 무예 시험에서 제외된다. 조선 기병을 대표하는 격구는 이렇게 사라졌다. 폴로는 올림픽 정식종목을 거쳐 현재 16개국의 프로스포츠이다. 그에 비해 폴로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겼던 격구를 알고 있는 현대의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1.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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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틱은 추모의 상징 ‘포피’를 왜 거부할까?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지난 11월 11일은 영국의 현충일인 ‘리멤브런스 데이(Remembrance day)’였다. 이날 저녁 런던의 로열 앨버트홀에서는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페스티벌 오브 리멤브런스’가 열렸다. 찰스 3세, 윌리엄 왕세자 부부 등 왕실 인사와 리시 수낵 총리를 비롯해 주요 정치인이 참석한 이 국가적인 행사를 BBC가 생중계했다. 특히 올해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한국전쟁의 전사자들을 가장 먼저 추모했다. 또한 한국전의 참전용사이자 영국의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2019년 우승한 콜린 새커리(93세)가 아리랑을 한국어로 불러 눈길을 끌었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영국은 1921년부터 참전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포피를 다는 전통이 생겼다. 1,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시작한 포피는 규모가 커져 현재는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이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희생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포피를 둘러싼 갈등도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구성하는 브리튼 바로 옆에는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섬이 있다. 12세기부터 무려 700여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는 1922년에 독립,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총 32개 카운티 중 26개만 독립에 성공했다. 17세기 초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이주한 신교도가 많은 아일랜드 북쪽에 위치한 얼스터 지방의 6개 카운티는 지금도 영국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가 바로 북아일랜드다.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교도와 신교도 간의 갈등이 뿌리 깊은 지역이다. 가톨릭교도는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공화주의자들로, 남북이 합쳐진 통일 아일랜드를 꿈꾼다. 그에 반해 신교도들은 자신을 영국인(British)과 연합주의자(unionist)로 인식한다. 영국 왕에 충성하는 이들은 북아일랜드가 영국(UK)에 남기를 희망한다.1960년대 말부터 1998년까지 이들이 벌인 갈등을 ‘The Troubles(북아일랜드 분쟁)’이라고 부른다. 남북 아일랜드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왕당파의 군사조직인 얼스터 의용군과 영국 정부군 등이 분쟁에 참여했다. 분쟁은 주로 북아일랜드와 수도인 벨파스트에서 벌어졌으나,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으로 확산된 적도 있다. 특히 필자가 학부 공부를 하던 1990년대에는 IRA가 런던에서 폭탄 테러를 종종 일으켰다. 한번은 수업 시간에 발표를 해야 하는데, 테러로 인해 지하철역이 폐쇄되어 지각한 적도 있었다. 당시 필자가 사과와 함께 IRA 핑계를 대니, 교수님과 동료 학생들이 모두 너그럽게 이해해 준 기억도 난다.분쟁 기간 중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의 데리(Derry)에서 벌어진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특히 유명하다. 영국 공수부대원의 일부가 시위 중이던 비무장 가톨릭교도를 항해 사격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14명이 사망했고 십수 명이 다쳤다. 이 사건 이후 북아일랜드 분쟁은 더욱더 격화된다.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의 멤버 4명은 모두 아일랜드 혈통을 갖고 있는데, 이 중 특히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각각 이 사건을 다룬 노래를 발표해 분노를 표출했다. 1998년 벨파스트 협정이 체결되며 북아일랜드 분쟁은 종결됐지만, 30여 년에 걸친 무력 충돌의 결과로 35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 선덜랜드, 위건, 웨스트 브로미치 등에서 뛰었던 미드필더 제임스 맥클린은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북아일랜드의 데리 출신이다. 맥클린은 “포피가 단순히 1, 2차 대전 희생자들에 관한 것이라면 (포피 셔츠를) 매일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피는 영국군이 관여해온 모든 갈등에 관한 것”이라며 포피 셔츠 착용을 거부했다. 그는 북아일랜드 분쟁에 참여한 영국군을 지지할 수 없다는 아일랜드인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일부 영국인들은 맥클린의 이러한 소신을 지지했다. 하지만 포피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는 상대팀 서포터스뿐만 아니라 일부 홈 팬들로부터도 오랫동안 야유를 받았다. 심지어 맥클린은 살해 위협을 받은 적도 있다.리멤버런스 데이 행사는 북아일랜드에서도 매년 열리지만, 현재도 대부분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와 공화당원은 추모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편 아일랜드 공화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아일랜드인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7월 자체적인 국가 기념일을 가진다. 영국의 주요 축구팀 중 유일하게 포피 셔츠를 거부하는 클럽이 있다. 바로 스코틀랜드의 명문 클럽 셀틱이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유산을 바탕으로 설립된 셀틱은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존중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또는 종교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중립적인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맥클린과 달리 포피 착용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아일랜드 출신 선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북아일랜드 출신의 마틴 오닐 감독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일랜드 대표팀에서 주장을 맡았던 로이 킨이다. 특히 킨은 지도자에서 물러난 후 스카이 스포츠 방송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포피를 꾸준히 착용해 고향 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포피는 영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에서 존경과 기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복잡한 역사와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지역과 사람에 따라 포피는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에 빨간색 포피 대신 평화를 상징하는 하얀색 포피를 다는 이들도 최근 늘어나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진정한 추모는 ‘강요’나 ‘의무’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포피는 비로소 추모의 상징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3.11.17 15:00
해외연예

톰 크루즈, 英 찰스 3세 대관식 참석…‘미션 임파서블8’ 촬영 연기

배우 톰 크루즈가 영국 찰스 3세 대관식 참석을 위해 ‘미션 임파서블8’ 촬영을 연기한다.지난 8일(한국시간) 영국 데일리 메일 등 외신에 따르면 톰 크루즈는 오는 5월 6일 찰스 3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션 임파서블8’ 촬영을 잠시 중단하기로 했다.영국 더 선은 “톰 크루즈는 찰스 3세 대관식 참석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것은 매우 권위 있는 행사이며 톰 크루즈는 윌리엄 왕세자, 케이트 미들턴과 가까운 사이다. 톰 크루즈는 주말 동안 대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감독들에게 ‘미션 임파서블8’ 제작을 잠시 중단해달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톰 크루즈는 최근 영국 왕실과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윌리엄 왕세자 부부를 영화 ‘탑건: 매버릭’ 프리미어 시사회에 초대하기도 했다.한편 톰 크루즈는 올해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개봉을 앞두고 있다.이세빈 기자 sebi0525@edaily.co.kr 2023.02.09 07:38
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잉글랜드 상대로 반란 꿈꾸는 웨일스

유럽에서 가장 큰 섬인 브리튼(Britain)에 영국이 있다. 브리튼 섬의 첫 주인은 기원전 5세기경 유럽에서 건너온 켈트족이다.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는 기원전 55년에 브리튼 섬을 처음 침공했고, 이후에도 여러 번 공격을 감행한다. 마침내 로마는 서기 43년 브리튼 섬 남쪽을 점령했다. 이후 로마는 400여년 동안 브리튼 섬을 지배한다. 켈트족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 문화에 동화된다. 하지만 쇠퇴하던 로마 제국은 395년 동서로 분열됐고, 410년 로마군은 브리튼 섬에서 철수했다. 로마군이 떠나자 섬의 북쪽, 지금의 스코틀랜드 지역에 살던 픽트족이 남쪽을 노린다. 이에 켈트족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유럽 대륙에서 용병을 데려온다. 이들 용병이 게르만의 일파인 앵글로 색슨족이다. 이들은 자기들 고향과 비교해 너무나 비옥하고 따뜻한 브리튼 섬에 매료된다. 이에 앵글로 색슨은 켈트족을 배신하고 이들을 공격한다. 결국 섬의 남쪽을 차지한 앵글로 색슨족은 일곱개의 왕국을 세웠다. 앵글로 색슨족의 공격을 받은 켈트족은 섬의 남서쪽인 현재의 웨일스 지역으로 피신한다. 웨일스(Wales)라는 단어는 고대 영어로 “외국인의 땅(land of foreigners)”을 의미한다. 켈트족은 귀네드 왕국과 여러 소국을 세워 명맥을 유지했다. 13세기 귀네드 왕국의 흘러웰린 왕은 웨일스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며 자신을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으로 칭했고, 당시 잉글랜드 군주였던 헨리 3세는 이를 승인했다. 헨리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브리튼 섬의 통일을 위해 봉신 관계에 있던 웨일스를 공격한다. 웨일스 공국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1301년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아들인 왕세자에게 웨일스 공 작위를 수여했고, 이로써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종속된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영국 왕 계승 예정자인 왕세자는 웨일스 공을 겸한다. 현재 웨일스 공은 찰스 3세의 장남 윌리엄 왕자다. 영국 국기인 ‘유니온 잭(Union Jack)’은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국기는 성(聖) 조지(잉글랜드), 성 앤드루(스코틀랜드)와 성 패트릭(아일랜드)을 상징하는 십자가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에 웨일스의 상징은 유니온 잭에 왜 반영되지 않았는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다. 이유가 있다. 웨일스 지역은 16세기에 잉글랜드와 완전히 병합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될 때,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당시 이들은 독자적인 국기도 없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연장선상에 불과했다. 웨일스는 1955년까지 수도가 없어, 런던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레드드래곤’이 들어간 현재의 웨일스 국기도 1959년에 만들어졌다. 전통적으로 웨일스를 상징하는 레드드래곤이 유니온 잭에 포함되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없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관계를 의붓아버지와 아들에 빗대는 이들도 있다.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원치 않은 아들이고, 웨일스는 의붓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없으나 약간의 돈을 받는 것에 만족하며 이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웨일스는 스코틀랜드와는 달리 영국에서 독립하겠다는 의지가 약하다. 강원도보다 약간 큰 면적에 320만 인구를 가진 웨일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럭비다. 웨일스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같은 럭비에서 세계 최강 팀 중 하나다. 웨일스는 1987년 시작하여 4년 주기로 개최되는 럭비 월드컵에 9번 모두 참여했고, 4강에도 3번 진출했다. 럭비에 비해 웨일스 축구는 유럽에서 변방에 가깝다. 웨일스의 월드컵 데뷔는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이루어졌다. 조별 예선을 통과해 8강에 진출한 웨일스는 이 대회의 우승팀이 될 브라질을 만나 선전했으나, 축구 황제 펠레에게 결승골을 내줘 0-1로 아쉽게 패했다. 웨일스는 1980년대에 마크 휴즈와 이안 러시라는 걸출한 스타를 앞세워 월드컵과 유로 대회 본선에 도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은 1990~2000년대에도 라이언 긱스와 크레이그 벨라미를 앞세워 부활을 꿈꿨으나 메이저 대회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2010년대 들어 가레스 베일과 아론 램지 등을 앞세운 웨일스는 메이저 본선을 다시 두드렸고, 결국 2016 유로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당시 잉글랜드는 인구 30만의 아이슬란드에 2-1로 지며 8강 진출에 실패한 데 반해, 웨일스는 4강에 진출했다. 웨일스가 잉글랜드와의 간접 대결에서 이긴 것이다. 웨일스는 2020유로 대회에서도 16강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6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1-0으로 꺾고 웨일스는 2022 카타르 월드컵 티켓을 거머쥐었다. 무려 64년 만에 웨일스가 두 번째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웨일스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잉글랜드, 미국, 이란과 함께 B조에 속해 있다. 만약 웨일스가 축구가 아닌 럭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만났다면 분위기가 크게 달랐을 것이다. 웨일스에서 럭비는 종교이고, 잉글랜드는 퇴마의 대상인 악마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2016유로에서도 웨일스는 잉글랜드와 B조에 같이 속했다는 것이다. 당시 웨일스는 세네갈이 2002 월드컵에서 프랑스를 꺾었듯이 피지배자의 반란을 꿈꿨다. 하지만 후반 추가 시간에 골을 허용한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1-2로 아쉽게 졌다. 6년 만에 메이저대회에서 다시 만난 웨일스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이번에는 반란에 성공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11.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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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 "충성심, 존중, 사랑으로 헌신"...10일 국왕 공식 선포

영국의 새 국왕인 찰스 3세가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평생 헌신하겠다고 약속했다. 찰스 3세는 9일(현지시간) 첫 TV 대국민 연설에서 “평생 헌신한다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약속을 오늘 여러분께 되풀이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충성심, 존중, 사랑으로 영국인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관해서는 "좋은 인생이었고 운명과의 약속을 지켰으며, 깊은 애도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장남 윌리엄은 이제 왕세자이며, 콘월 공작이자 웨일스공"이라고 말했다. 찰스 3세는 윌리엄 왕세자의 부인 캐서린 왕자빈을 '웨일스공 부인'이라고 불렀는데 영국 왕세자빈에게 주어지는 이 작위는 찰스 3세의 왕세자 시절 부인이자 윌리엄 왕세자의 어머니인 다이애나빈의 사망 이후 공석이었다. 이어 그는 부인 커밀라 왕비도 새로운 역할에 헌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왕실을 뛰쳐나가 갈등을 빚고 있는 둘째 아들 해리 왕자 부부에 관해서도 애정을 표했다. 그는 여왕을 '사랑하는 엄마'라고 표현하면서 가족을 대표해서 위로와 지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찰스 3세는 전날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여왕의 곁을 지킨 뒤 이날 오전 커밀라 왕비와 함께 런던으로 이동했다. 그는 리즈 트러스 총리와 첫 회동을 하는 등 국왕으로서 임무를 시작했다. 국왕으로 공식 선포는 10일에 이뤄진다. 찰스 3세 부부는 이날 버킹엄궁의 새 주인으로서 처음 입성했다. 버킹엄궁 앞에 모인 추모객들은 새 국왕에게 열렬한 환영을 보내고 국가인 '하느님, 국왕을 지켜주소서'를 부르기도 했다. 찰스 3세 부부는 당초 추모객들이 남긴 꽃만 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예정에 없이 대중에게 다가가 10여분간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눴다. 일부 여성들은 찰스 3세의 뺨이나 손에 키스하기도 했다. 김두용 기자 k2young@edaily.co.kr 2022.09.10 07:48
세계

'영국의 정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푸틴도 애도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로 서거했다. 영국 왕실은 여왕이 8일(현지시간) 오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여왕의 큰아들 찰스 왕세자가 즉각 찰스 3세로서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여왕은 밸모럴성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중이었었다. 지난 6일에는 웃는 얼굴로 신임 총리를 임명하며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7일 오후 왕실에서 여왕이 의료진의 휴식 권고로 저녁 일정을 취소한다고 전했다. 이어 8일 정오가 조금 지나 의료진은 여왕의 건강이 염려스럽다고 발표했다. 여왕의 재위 기간은 70년 214일로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63년 216일)을 훌쩍 넘어 영국 역사상 가장 길다. 세계적으로도 루이 14세 프랑스 국왕(72년 110일) 다음으로 두 번째다. 여왕은 재위 기간 해리 트루먼부터 조 바이든까지 미국 대통령 14명 중 13명을 만났다. 중국 등 세계 100여 개국을 방문하는 등 외교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99년에는 한국을 찾아 안동 하회마을 등에서 생일상을 받았고, 김대중·노무현·박근혜 대통령을 만났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찰스 3세 국왕에게 조의를 표하는 서한을 보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서한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세계 무대에서 권위와 함께 정당한 사랑과 존경을 누렸다"며 "나는 당신이 이 어렵고 회복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용기로 이겨내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성명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군주 이상이었다. 그는 시대를 규정했다"며 "지속적인 변화의 시대에 여왕은 영국인에게 안정과 자존심의 지속적 원천이었다"고 기렸다. 정길준 기자 kjkj@edaily.co.kr 2022.09.09 09:39
사회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서거… 차기 왕 찰스 즉위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연방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로 서거했다. 영국 왕실은 8일(현지시간) “여왕이 이날 오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외신에 따르면 사망 당시 여왕의 곁에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장남 찰스 왕세자와 부인 커밀라, 왕위 계승 서열 2위 윌리엄 왕세손 등이 곁에 있었다. 이날 오후 6시 30분 버킹엄 궁전은 조기를 게양해 여왕의 서거를 알렸으며 왕위 계승권자인 찰스 왕세자는 즉시 왕위를 물려받아 찰스 3세로 즉위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25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뒤 영국의 군주와 영연방의 수장 자리를 지켰다. 여왕은 이날까지 만 70년 127일을 재위해 영국 군주 중에서는 최장, 세계 역사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 통치한 군주로 남았다. 오랜 기간 재위하며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여왕은 즉위 70년 만에 임무를 내려놓게 됐다. 여왕은 지난해 4월 남편 필립공 사망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지난해 10월 병원에 하루 입원한 이후 외부 활동을 자제했다. 올해 2월에는 찰스 왕세자를 만난 뒤 코로나 19에 확진돼 한동안 외출을 못 하기도 했다. 이날 왕실이 여왕의 건강이 우려된다는 의료진의 판단을 공개한 후 왕실 직계 가족들은 밸모럴성에 모여들었다. BBC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여왕 관련 소식을 생중계로 전하는 등 영국 전국이 긴박하게 움직였다. 김다은 기자 dagold@edaily.co.kr 2022.09.09 09:18
스포츠일반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향수를 자극한 조지 왕자의 윔블던 데뷔

지난 10일(현지시간) 열린 윔블던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결승전의 승자는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였다. 그는 2018, 2019, (2020 대회는 코로나 때문에 열리지 않음) 2021년에 이어 윔블던 남자 단식에서 4회 연속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써 조코비치는 메이저 대회(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에서만 21회 우승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보다 메이저 대회에서 더 많이 우승한 선수는 라파엘 나달(22회)밖에 없다. 한편 올해 처음 도입된 윔블던 14세부 경기 남자 단식 챔피언에는 한국 테니스의 기대주 조세혁이 올랐다. 14일간 진행된 2022 윔블던 대회는 다양한 이야기와 화제를 만들었다. 필자는 올드팬의 향수를 자극할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장손으로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세손과 그의 부인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는 열렬한 테니스 팬이다. 윔블던 대회의 낯익은 풍경 중 하나가 윌리엄과 케이트가 직관하는 모습이다. 이 부부는 2022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에 뜻밖의 손님을 대동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장남이자 왕위 계승 서열 3위로 아홉 번째 생일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은 조지 왕자가 깜짝 등장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테니스 대회이자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은 엄격한 드레스 코드로도 유명하다. 대회에 참가한 모든 선수가 착용한 옷, 모자, 밴드, 신발 등은 흰색이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드레스 코드는 2014년에 도리어 강화되어, 선수들은 언더웨어마저도 흰색만을 입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윔블던의 드레스 코드는 관람객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주요 경기가 열리는 센터 코트와 1번 코트에서 경기를 관람하려면 일반 관객도 말쑥하게 차려입는 게 좋다. 또한 앰부시 마케팅(스폰서가 아니면서도 그러한 인상을 줘 홍보를 극대화하는 기법) 규제에 따라, 관객은 기업의 로고가 크게 들어간 옷을 입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윔블던의 센터 코트에는 1922년 만들어져 74개의 좌석으로 운영되는 로얄 박스가 있다. 초청장을 받은 유명 인사만이 앉을 수 있는 이곳에는 더욱 엄격한 드레스 코드가 적용된다. 남성은 정장 차림에 타이를 반드시 매야 한다. 역시 정장을 입어야 하는 여성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쓸 수도 없다. 다른 관객의 시야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결승전에 모습을 보인 조지 왕자도 규정에 따라 정장을 입었다. 하지만 아홉 살이 채 안 된 어린 왕자가 정장 차림으로 3시간이 넘게 경기를 지켜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런던 날씨답지 않게 그날 기온은 섭씨 29도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에 타이를 맨 조지 왕자는 부모에게 “too hot(너무 덥다)”고 말하며 이마의 땀을 연신 닦았다. 경기 후 이들은 윔블던 챔피언 조코비치와 만나 담소를 나눴다. 조코비치는 조지 왕자에게 우승 트로피를 들어보라고 건네주었고, 이에 왕자는 쑥스럽게 이를 들어 올렸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윌리엄 왕세손이 조지에게 “Don't drop it(트로피 떨어뜨리지 마)”라는 농담을 던졌다는 유쾌한 일화도 전해졌다. 사실 조지 왕자의 이날 윔블던 데뷔가 언론과 대중의 시선을 끈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1991년 당시 아홉 살이었던 윌리엄 왕자가 어머니인 다이애나와 여자 단식 결승전을 보며 윔블던 무대에 데뷔했던 장면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31년의 시차를 두고 거의 같은 나이의 두 왕자가 윔블던에 데뷔한 모습, 그리고 아직은 약간 어색하지만, 정장을 입은 앳된 모습의 두 왕자가 너무 비슷해 보여 화제를 모았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릴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스무 살이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남편 찰스의 마음은 딴 사람에게 이미 가 있었고, 가식적이고 체면만 내세우는 왕족들 사이에서 다이애나는 불행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들 윌리엄과 해리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부모의 불화와 이혼 등으로 외롭게 자랐던 다이애나는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두 아들을 사랑과 정성을 다해 키웠다. 장난을 좋아하고 잘 웃는 다이애나는 윌리엄에게 “You can be as naughty as you want, just don’t get caught(원하는 만큼 장난쳐도 되지만, 들키지는 마)”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아들에게 특별한 친구 같은 존재였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비의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왕족이라는 특권 의식을 내려놓고, 소탈하고 진심 어린 마음과 행동으로 국민을 대했다. 이에 다이애나는 영국민들로부터 ‘People's Princess(국민의 왕세자비)’로 불릴 만큼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다. 두 아들을 위해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15년간 지속했던 다이애나는 결국 1996년 8월 찰스와 이혼했다. 불과 1년 후 그녀는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 다이애나를 향한 윌리엄의 사랑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윌리엄은 어머니로부터 선물로 받은 낡은 오메가 손목시계를 지금도 거의 매일 찬다. 윌리엄은 매년 ‘어머니의 날’을 맞이할 때마다 그의 세 자녀(조지, 샬럿, 루이)에게 할머니 다이애나를 향해 편지를 쓰게 한다고 한다. 2021년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의 보도에 의하면 윌리엄의 장녀 샬럿은 편지에 “Papa is missing you(아빠가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어요)”라고 써,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지금도 매일 다이애나를 그리워한다는 윌리엄. 그리고 이 둘의 윔블던 장면을 기억하는 영국민들에게 조지 왕자와 함께 나타난 중년 윌리엄의 모습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7.20 06:00
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잉글랜드, 너만은 이기고 싶다

1707년 연합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를 하나로 묶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탄생시켰다. 법적으로 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스코틀랜드의 저항 정신이 쉽게 사라질 리 만무했다.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잉글랜드 의회와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이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킨 혁명) 이후 영국에는 스코틀랜드의 왕실이었던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주장한 자코바이트의 난(Jacobite rising)이 여러 차례 일어난다. 1745년 찰스 왕세자는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에든버러를 점령한 데 이어 잉글랜드의 더비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해 결국 퇴각했고, 이듬해 벌어진 컬로든 전투에서 패하며 자코바이트의 난은 막을 내린다.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아웃랜더(Outlander)가 이 시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잉글랜드는 반란의 씨를 없애고자 스코틀랜드 지역 사회에 잔혹한 탄압을 가했다. 많은 이들이 반역죄로 처형됐고,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백 파이프와 격자무늬도 금지됐다. 이들의 클랜(clan, 씨족) 제도도 잦은 반란의 근거로 여겨져, 1750~1860년에 걸쳐 고원지대의 인구를 대폭 줄이는 하이랜드 클리어런스(Highland Clearances) 정책이 시행되었다. 클랜의 붕괴로 많은 구성원은 고향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도시의 하층민으로 살 거나 신대륙으로 이민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두 나라는 피를 덜 흘리는 방법으로 싸우는 법을 찾아냈다. 축구를 통한 대결이 바로 그것이었다. 두 나라는 1872년 축구 역사상 최초의 국제 경기를 벌였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에서 치열하게 부딪힌 끝에 경기는 0-0으로 끝났다. 이듬해인 1873년 런던에서 다시 한번 두 나라의 경기가 벌어져, 잉글랜드가 4-2로 승리한다. 이후 두 나라의 경기는 매년 열렸다. 악감정이 남아있던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만은 꼭 이기고 싶어 했다. 언론은 이들을 ‘오래된 적(Auld Enemy, auld는 스코틀랜드 영어로 old를 의미)’으로 불렀다. 인구와 경제력에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훨씬 작은 나라다. 하지만 뛰어난 축구 기술로 무장한 이들은 라이벌에 당당히 맞섰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는 1880년부터 5연승을 거두는 등 초반 16경기에서 10승 4무 2패를 거두며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스코틀랜드가 29승을 거둔 데 비해, 잉글랜드는 19승에 그쳤다. 2차 대전 이후 판세는 바뀐다. 특히 잉글랜드는 1966 월드컵 우승에 이어 기세를 모아 19경기 무패 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기세등등했던 잉글랜드가 1967년 자신들의 성지 웸블리에서 스코틀랜드와 다시 만났을 때, 결과는 뻔해 보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가 3-2로 깜짝 승리를 거둔다. 승리에 고무된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비공식 세계챔피언’이 됐다고 농담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꾸준히 우위를 보였고, 결국 연례 경기는 1989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잉글랜드 입장에서 스코틀랜드는 경쟁 상대가 더는 아니었고, 새로운 라이벌로 부각한 아르헨티나·독일과의 경기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잉글랜드에서 열린 유로 96에서 다시 맞붙는다. 7년 만의 대결에 열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1996년 6월 15일 웸블리에서 열린 경기 전 스코틀랜드의 국가 ‘Flower of Scotland’가 연주되자, 잉글랜드 팬들은 엄청난 야유를 보냈다. 후반전 앨런 시어러의 골로 잉글랜드가 앞섰고, 키퍼 데이비드 시먼은 페널티 킥을 막아냈다. 이어 당시 스코틀랜드 클럽 레인저스 소속이었던 폴 게시코인이 그림 같은 슛을 성공하며 잉글랜드가 2-0으로 승리한다. 잉글랜드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를 만나 4-0으로 앞서다, 78분 패트릭 클루이베르트에게 골을 허용한다. 4-1로 끝난 이 경기에 잉글랜드 팬들은 특히 열광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네덜란드에 막혀 1994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 했던 잉글랜드는 2년 만에 대승으로 빚을 갚아준 것이다. 둘째 네덜란드의 이 한 골로 인해 결국 스코틀랜드가 8강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이들은 월드컵 예선과 유로 등에서 몇 차례 더 맞붙었다. 두 나라는 지금까지 총 115번의 공식 대결을 가졌다. 다른 어떤 나라도 이들보다 많이 만나지 않았다. 역대 전적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각각 48승과 41승을 거뒀고, 26번 비겼다. 아울러 1937년 경기에는 14만 9415명의 관중이 모여 유럽 축구장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 지난 1일 스코틀랜드는 우크라이나에 1-3으로 패하며 2022 카타르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다. 통산 8번 월드컵에 진출한 스코틀랜드는 본선에서 한 번도 조별리그를 통과한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은 것도 무려 24년 전이다. 그만큼 스코틀랜드도 2022 월드컵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국가 연주 때 스코틀랜드 팬들은 그들의 국가를 따라 불렀다. 팬들은 경기 후에도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와 격려를 보내줬다. 거대한 이웃 나라와 싸우고 있는 현재의 우크라이나를 바라보며,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유를 위해 싸웠던 자신들의 옛 모습을 본 것이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6.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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