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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마해영의 스승 '일발장타' 정현발 별세

깔끔한 스윙으로 일발장타를 뿜어냈던 1970~80년대 강타자, 정현발이 21일 영면했다. 향년 70세. 정현발은 경북고 시절인 1971년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화랑대기 등 5개 대회를 모두 휩쓴 고교야구의 슈퍼스타였다. 남우식, 천보성, 배대웅, 손상대 등과 함께 경북고의 주축이었다. 특히 정현발은 교과서적인 타격폼으로 유명했다. 팀이 우승하면 최우수선수상(MVP)은 대부분 그의 몫이었다. 고교 최고 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도 그해 수상했다.정현발은 경북고 동기들과 한양대에 진학, 대학야구 경쟁 구도를 바꿨다. 1976년에는 실업팀 롯데에 입단한 뒤 중심타자로 뛰었다. 정확하고 강렬한 '한발'을 날린다 해서 '정한발'로도 불렸다. 타격도 워낙 뛰어났지만, 정현발은 잘생긴 외모와 수더분한 매너로도 유명했다. 고교야구와 실업야구를 아울렀던 스타였다.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정현발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꿈을 키울 무대가 열렸으나 그의 나이 이미 서른 살이었다. 당시로는 노장 축에 속했고, 삼성의 외야진이 워낙 두꺼워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정현발은 재일교포 투수 김기태의 트레이드 상대로 1987년 청보 핀토스로 이적했다. 은퇴하고도 남을 서른다섯 살에 그는 프로 경력에서 가장 많은 103경기에 나서 KBO리그 홈런 5위(13개)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팀이 태평양에 인수 되고 선수단이 크게 바뀌면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군 통산 476경기 타율은 0.26ㅔ(1202타수 313안타) 46홈런 187타점 158득점 15도루·. 정현발은 은퇴 후 태평양 돌핀스와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에서 타격 코치를 맡았다. 마해영이 타격왕(0.372)에 오르는 등 롯데의 타격이 가장 뜨거웠던 1999년 선수들을 지도했다. 2005년 말에 창단한 경찰 야구단의 수석 겸 타격코치로 부임해 최형우(현 KIA)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정현발은 2014년부터 2년 동안 인천재능대 초대 감독을 맡았다. 그의 딸 정효진은 KBSN 스포츠에서 프로야구 중계방송 사상 최초의 여성 메인 디렉터다. 로 활동 중이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로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14호실. 발인은 23일. 김식 기자 2023.09.2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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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잠실] '브랜든 무실점 9K+김재환 부활포' 거침없는 이승엽 호, 창단 첫 11연승 질주

거침없는 질주를 이어가는 두산 베어스가 기어이 1982년 창단 이후 팀 최다연승 기록을 새로 썼다.두산은 2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3 KBO리그 정규시즌 롯데 자이언츠와 홈 경기에서 8-5 승리를 거뒀다. 이날 승리로 7월 1일 이후 월간 11경기에서 전승을 이어갔다. 시즌 성적은 44승 1무 36패를 기록, 같은 날 패한 1위 LG 트윈스와 승차를 4.5경기로, 2위 SSG 랜더스와 승차를 3경기로 줄였다. 두산과 달리 최근 3연패로 여름 이후 하락세가 이어진 롯데는 시즌 42패(39승)를 기록, KT 위즈에 밀려 리그 6위로 추락했다.이날 경기로 두산은 창단 후 첫 11연승 달성을 기어이 이뤄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창단한 두산이 5284경기 2707승 107무 2470패를 기록한 끝에 거둔 성과다. 지난 2000년 김인식 전 감독이, 2018년 김태형 감독과 올해 이승엽 감독이 10연승을 이뤄낸 적 있지만, 기록을 11연승까지 이은 건 이 감독이 처음이다.KBO리그 전체를 돌아봐도 11연승은 지난 2020년 NC 다이노스가 9월 20일 부산 롯데 자이언츠와 더블헤더 1차전부터 10월 1일 창원 SK 와이번스전까지 기록한 11연승 이후 1027일만의 기록이다. KBO리그 역대 최다 연승 기록은 SK가 2009년부터 2010년에 걸쳐 기록한 22연승이다. 단일 시즌 기준으로는 2009년 SK가 19연승을 남긴 바 있다.한편 이승엽 감독도 역대 국내 감독 데뷔시즌 최다연승 신기록 보유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종전 기록은 1997년 천보성 당시 LG 감독, 1999년 이희수 당시 한화 이글스 감독, 2000년 이광은 당시 LG 감독과 지난주까지 이승엽 감독이 기록했던 10연승이다. 외국인 감독까지 기록을 넓혀도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2008년 기록했던 11연승과 타이기록이다. 로이스터 감독의 기록을 5439일만에 재현한 셈이 됐다. 투타 모두 두산이 우위를 점한 경기였다. 두산 선발 브랜든 와델은 제구 난조로 5이닝 소화에 그쳤으나 5피안타 1볼넷 1사구 9탈삼진 무실점으로 시즌 3승을 기록했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종전 1.04에서 0.87까지 떨어졌다. 주자를 쌓고도 고비마다 탈삼진을 유도, 롯데 타선을 꽁꽁 묶는 데 성공했다.타선은 8안타 5볼넷을 기록한 가운데 타선의 장타가 돋보였다. 선취점은 주장 허경민이 만들었다. 허경민은 3회 말 정수빈이 출루해 만든 기회 때 좌익수 키를 넘어가는 대형 2루타로 선취 타점을 기록했다. 두산은 후속 타자 김재환이 롯데 선발 나균안의 초구 스플리터를 공략,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투런포를 터뜨렸다. 올 시즌 부진했던 그가 지난 4일 이후 21일 만에 기록한 홈런이다. 두산은 호세 로하스의 후속 적시 2루타까지 이어지면서 4-0으로 단숨에 리드를 벌렸다. 두산 타선은 5회 한 번 더 폭발했다. 흔들리는 나균안을 상대로 선두 타자 허경민과 김재환이 연속 안타로 기회를 만들었다. 롯데는 나균안을 강판하고 진승현으로 불을 끄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두산은 2사 후 양석환이 적시타를 터뜨렸고, 롯데 좌익수 신윤후의 실책이 더해져 앞선 주자가 모두 홈을 밟았다. 두산은 이어 7회 허경민의 희생 플라이로 다시 한 점을 더해 7-0으로 승기를 굳혔다.롯데는 7회 초에야 만회점을 얻었다. 6회부터 구원 등판해 있던 이영하를 상대로 선두 타자 김민석이 밀어쳐 좌전 안타를 뽑았다. 빗맞은 안타가 나오자 이영하는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며 흔들렸고, 이는 결국 실점의 빌미가 됐다. 후속 타자 니코 구드럼 타석 때 포일이 나왔고, 결국 구드럼이 2타점 적시타를 쳐 스코어보드의 0을 끝냈다.그러나 이미 뒤집어진 분위기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7회 초 1사 상황에 박치국을 올려 불을 끈 두산은 7회 말 양석환이 좌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솔로포로 팀의 최다연승 확정을 자축했다. 롯데는 9회 초 손성빈의 2타점 적시타, 안치홍의 희생 플라이를 더했으나 끝내 역전을 이루지 못하고 경기를 마쳤다. 연승의 새 역사를 향해 걸어가는 두산은 이제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이날 상위 팀이던 1위 LG와 2위 SSG가 패하면서 지난달 1위와 11.5경기까지 벌어졌던 승차가 4.5경기까지 좁혀졌다. 2위 SSG와 승차는 단 3경기에 불과하다.상승세를 이어갈 동력도 충분하다. 연승 기간 잦은 우천 취소 덕에 투수진 연투가 적고, 선발 투수들도 대부분 휴식일을 길게 가져간 덕에 체력 소진 없이 연승을 이어오고 있다. 연승이 꺾이더라도 분위기만 이어간다면 후반기 '미러클'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다.잠실=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3.07.2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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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의 곰, 기어이 10연승 채웠다…새내기 사령탑 새 역사 향하는 이승엽 호

두산 베어스가 후반기 첫 경기에서 기어이 10연승을 이뤄냈다.두산은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3 KBO리그 정규시즌 KIA 타이거즈와 원정 경기에서 5-2로 승리했다. 이로서 지난 1일부터 9연승을 달리다 전반기를 마쳤던 두산은 10연승을 이어갔다. 10연승은 김인식 전 감독 시절인 2000년, 김태형 전 감독 시절인 2018년 세운 구단 최다연승과 타이기록이다. 구단의 역사인 동시에 새내기 감독으로서 리그 역사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인 감독 중 부임 첫 해 10연승을 거뒀던 건 1997년 천보성 당시 LG 트윈스 감독, 1999년 이희수 당시 한화 이글스 감독, 2000년 이광은 전 LG 감독까지 총 3명 뿐이었다. 부임 첫 해 리그 최다연승 기록은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2008년 11연승을 달성한 바 있다. 두산이 오는 22일 KIA전까지 승리한다면 로이스터 감독과 나란히 서게 된다.이날 두산은 에이스 라울 알칸타라를 내세웠지만, 선취점은 KIA가 가져갔다. KIA는 2회 말 소크라테스 브리토의 2루타와 이우성의 우전 적시타로 한 점을 먼저 얻었다. 이후 KIA 선발 마리오 산체스의 호투 속에 5회 초까지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두산은 5회 말부터 산체스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먼저 5회 말 1사 상황에서 외국인 타자 호세 로하스가 우월 홈런을 쳐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4와 3분의 1이닝 동안 8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던 산체스는 피홈런 후 달라졌다. 6회 허경민에게 2사 후 역전 좌월 솔로포를 내줬고, 7회에는 양석환에게 2루타, 로하스에게 볼넷을 허용해 연이어 위기를 맞았다. 산체스를 믿었던 KIA는 뒤늦게 구원 투수 최지민을 등판시켰지만, 그는 첫 타자 박계범에게 사구를 던져 2사 만루 위기를 맞았다.연승 기간 콜업돼 타율 0.411 맹타로 9연승을 이끌었던 내야수 박준영의 방망이가 다시 터졌다. 박준영은 최지민과 풀카운트에서 이어지는 치열한 승부 끝에 싹쓸이 3루타를 터뜨리며 이날의 승기를 확실하게 굳혀냈다. 책임 주자 두 명이 모두 들어오며 산체스의 자책점은 4점으로 늘었다. KIA는 8회 소크라테스의 홈런으로 1점을 만회했지만, 두산의 10연승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두산 선발 라울 알칸타라는 6이닝 1실점으로 시즌 10승(3패)을 올렸다. 지난해 10승 투수가 아무도 없었던 두산이 2년 만에 배출한 첫 10승 투수다.투타 조화로 미소 지은 두산은 22일 KIA를 상대로 11연승에 도전한다. 외국인 에이스 알칸타라가 만든 10연승의 바통을 국내 에이스 곽빈이 잇는다. 그는 전반기를 8승 2패 평균자책점 2.08을 기록한 바 있다.한편 2위 SSG 랜더스와 3위 두산 베어스가 승리하고 1위 LG 트윈스가 패하면서 세 팀의 승차가 조금씩 좁혀졌다. LG와 SSG의 승차가 1.5경기, 두산과 승차는 5.5경기가 됐다.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3.07.2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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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40년 The moment] 해태의 마지막 우승, 라이언킹의 첫 포효

한국 프로야구가 올해로 출범 40주년을 맞이했다. 1969년 창간한 일간스포츠는 1982년 프로야구 태동을 현장에서 지켜본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지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프로야구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기록했다. 이 기간 여러 구단의 희비가 엇갈렸고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일간스포츠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KBO리그 역사를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①김현욱, 유일무이 '구원 20승' 달성 쌍방울 사이드암스로 김현욱은 1년 전 필승조로 성장한 데 이어 97년 최고의 투수로 성장했다. 구원으로만 20승을 올리며 다승, 평균자책점(1.88)과 승률(0.909) 등 투수 3관왕을 기록했다. 피안타율 0.204(2위), 탈삼진 135개(4위) 등의 기록도 뛰어났다. 다만 승수 몰아주기 논란이 일었다. 5회 종료 이전에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승리한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결국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는 해태 이대진에게 넘어갔다. ②김용수, 첫 500경기 출장 LG 김용수는 1997년 9월 11일 해태 타이거즈전에서 KBO리그 역대 최초로 투수 500경기 출장을 기록했다. 중앙대 졸업 후 실업야구 한일은행을 거쳐 1985년 MBC 청룡(LG의 전신)에 입단한 그는 첫해 6경기를 시작으로 이후 13년에 걸쳐 대기록을 작성했다. 500경기에 도달할 때까지 선발 79경기·구원 421경기에 등판, 96승 70패 195세이브 평균자책점 2.73으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③삼성 부정 배트 사건 삼성은 5월 4일 대구 LG전에서 불방망이를 휘두르다 논란을 빚었다. 삼성은 이날 경기에서 27-5로 대승했다. 역대 최초 연타석 만루홈런(정경배)을 앞세워 한 경기 최다득점과 역대 최다 득점차(22점) 신기록을 세웠다. 대패한 천보성 LG 감독이 다음 날 부정 배트 의혹을 제기했고, 김성근 쌍방울 감독도 가세해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조사가 시작됐다. KBO 측은 미국 조사기관에 배트의 재질과 도료 등에 대해 검사를 의뢰, 배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사건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④해태 왕조의 마지막 우승 시즌 전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해태 주전 선수들이 코치진과 갈등 끝에 훈련을 거부(하와이 항명 사건)했다. 우려 속에 시즌을 시작했지만, 단 한 차례도 3위권 밖을 벗어나지 않은 끝에 75승 1무 50패(승률 0.599)로 우승했다. 마무리 임창용, 중견수 김창희 등 세대교체에도 성공했다. 이종범이 30홈런-30도루, 이대진이 17승을 기록하는 등 기존 주축 선수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해태는 LG와의 한국시리즈(KS)에서 더 강력했다. 2년 연속 KS 1차전 선발투수로 나서 승리한 이대진이 4차전에서도 7이닝 2실점 승리를 기록했다. 임창용은 3세이브를 거뒀다. 우승 1주일 후인 11월 1일, 모기업 해태그룹이 부도 처리되면서 해태 왕조는 쇠락하기 시작한다. ⑤'아기 호랑이' 김상진의 KS 완투승 김상진은 해태 우승에 화룡점정을 찍은 주인공이었다. 1996년 해태에 입단한 그는 2년 차 때 9승 10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60으로 선발진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정규시즌보다 빛났던 건 KS였다. 2차전에 이어 5차전에 선발 등판했던 김상진은 9이닝 2피안타 1실점으로 완투승을 기록했다. 만 스무 살에 세운 KS 최연소 완투승 기록이다. ⑥바람의 아들은 해외로 마지막 우승을 이끈 건 역시 이종범이었다. KS 1차전부터 솔로홈런을 기록한 그는 시리즈 타율 0.294 3홈런 4타점을 거두고 MVP를 수상했다. 시즌이 끝난 후 이종범은 새로운 무대를 찾아 떠난다. 이종범은 12월 3일 이적료 4억4000만엔, 입단 보너스 5000만엔, 98년 연봉 8000만엔의 조건으로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 팀 선배 선동열과 다시 만났다. ⑦'적토마' 이병규의 질주 1997년 최고의 신인은 '적토마' 이병규였다. 단국대를 졸업한 그는 1년 전 박재홍이 받았던 신인 야수 최대 계약금(4억 3000만원)을 넘은 4억 4000만원을 받고 LG에 입단했다. 데뷔 시즌부터 중심타선에 입성한 이병규는 첫해 타율 0.305 7홈런 69타점 23도루로 활약했다. 시즌 종료 후 신인왕 투표에서는 75표 중 52표를 얻었다. ⑧'라이언킹' 이승엽, 첫 MVP 삼성 이승엽은 프로 3년 차인 1997년 만개했다. 직전 2년간 22홈런을 기록했던 그는 1997년 타율 0.329 170안타 32홈런 114타점으로 맹타를 휘둘렀다. 역대 최연소 홈런왕을 비롯해 안타·홈런·타점 3관왕에 올랐다. 그는 이후 리그를 대표하는 홈런왕으로 성장했다. ⑨외국인 시대 열린 KBO리그 1997시즌이 끝난 후 KBO리그는 새 시대에 접어든다. 11월 14일 사상 첫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가 실시됐다. 쌍방울을 제외한 7개 구단이 총 35명의 외국인 선수를 지명했다. 팀 별로 2명을 보유하고 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외환 위기의 영향으로 해태는 외국인 선수 계약을 포기했고, LG와 롯데는 각각 1명만 데려왔다. 차승윤 기자 사진=IS포토·한국프로야구 30년사 2022.12.2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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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프랜차이즈 출신 사령탑도 피하지 못했다…LG의 '감독 잔혹사'

류지현(51) 감독이 LG 트윈스 유니폼을 벗는다. LG는 지난 4일 "이번 시즌을 끝으로 임기가 만료되는 류지현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류지현 감독은 2년 계약을 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다. LG는 28년째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다.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우승 트로피들 들어 올리지 못해 사령탑 교체가 잦은 편이었다. 가장 최근 재계약에 성공한 사령탑은 1990년대 후반 천보성 감독이었다. 1996년 말 정식 지휘봉을 잡은 천보성 감독은 1997년과 1998년 2년 연속 LG를 한국시리즈 진출로 이끌었다. 당시 해태와 현대에 각각 1승 4패, 2승 4패로 패해 정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2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하지만 천보성 감독도 재계약 첫 시즌인 1999년 팀이 6위로 떨어지자 계약 1년을 남겨두고 경질됐다. 우승 사령탑도 성적 부진으로 지휘봉을 오래 잡진 못했다. 1990년 LG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백인천 초대 감독은 1991년 6위에 그치자 재계약에 실패했다. 1994년 LG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이광환 감독은 우승 직후 3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러나 1996년 7월 팀이 7위로 부진하자 임기 도중 경질됐다. 2000년 이후에는 재계약에 성공한 감독이 한 명도 없다. LG는 2000년 MBC 청룡-LG를 거친 이광은 감독을 신임 사령탑에 앉혔다. 하지만 2001년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김성근 감독이 대행을 거쳐 2002년 정식 지휘봉을 잡아 한국시리즈 진출까지 이끌었지만, 구단과의 마찰 속에 팀을 떠났다.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이광환 감독을 2003년 다시 모셨지만, 1년 만에 작별했다. 후임 이순철 감독도 3년 계약을 채우지 못하고 2006년 도중 자리를 떠났다. LG는 '우승 청부사' 김재박 감독을 영입했다. 김 감독은 현대 유니콘스 11년 동안 4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LG에선 계약 기간 3년 내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이듬해 LG는 박종훈 감독과 파격적인 5년 계약을 맺었으나 성적 부진으로 2년 만에 경질했다. 이후 김기태 감독이 지휘봉을 잡아 2013시즌 11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으나 이듬해 시즌 도중 자진 사퇴했다. 이후 LG는 양상문 감독을 거쳐, 삼성 시절 5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을 이끈 류중일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으나 역시나 정상 등극에는 실패했다. 류중일 감독은 2020시즌 준플레이오프 탈락 다음 날 구단 사무실을 찾아 먼저 작별 인사를 했다. 2020년 11월, 류지현 감독은 LG의 첫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사령탑이 됐다. 앞서 이광은, 김재박 등 MBC 청룡에서 전성기를 보낸 감독도 거쳤지만, LG 트윈스에서 성장한 사령탑은 그가 처음이다. 류지현 감독은 올 시즌 LG를 정규시즌 2위로 이끌어 재계약이 무난할 것으로 점쳐졌다. 하지만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서 정규시즌 순위가 낮았던 팀에 무릎을 꿇었다. 선수 육성과 체력 안배를 통해 장기 레이스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능력을 선보였다. LG는 팀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승률(0.613)을 달성했다. 우승에 목마른 LG는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 성과가 극명하게 다른 류지현 감독의 재계약을 고민했다. 결국 구단 최고위층에서 사령탑 교체를 결정했다. LG의 감독 잔혹사는 계속 이어졌다. 이형석 기자 2022.11.05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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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원년 개막전 '신 스틸러' MBC 청룡 유승안…"이종도 끝내기 만루포는 내가 실수한 덕"

"제가 없었다면 스토리 진행이 안 되잖아요." 39년 전 봄을 돌아본 유승안(63) 전 경찰야구단 감독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혈기 왕성한 20대 중반. 전 국민의 시선을 모은 프로야구 출범 무대에서 대통령의 시구를 받은 그는 삼엄함 뚫고 공을 건네는 '관례'를 지켰다. 경기에서도 거침없었다. 4번 타자로 나섰고, 소속팀 MBC 청룡이 3점 뒤진 경기 후반 동점 홈런을 때려냈다. 프로 야구 출범 3호 홈런이자 1호 동점포였다. 그러나 그는 경기 뒤 그는 내쉬었다고 한다. 유 감독은 "충신이었다가 역적이 됐다"고 했다. 연장 10회 말 1사 2·3루 유리한 볼카운트(3볼)에서 투수 앞 땅볼로 물러났다. 3루 주자는 홈에서 아웃된 것. 그 유명한 원년 개막전 끝내기 만루포는 이 땅볼 아웃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사자가 웃으며 그 시절을 돌아봤다. 극적인 드라마의 복선이나 다름없었다. 유 감독은 '욕심' 많은 선수 역할로 개막전을 빛낸 조연이었다. MBC 청룡 선발 포수로 나선 유 감독에게 역사적인 첫 경기와 1982년 그와 MBC 청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프로 무대가 정립되지 않은 그 시절을 '혼란기'로 규정했다. - 프로야구 출범 소식을 들었을 때 심경을 기억하나. "당시 나는 실업 야구팀 한일은행 소속이었다. 26살로 기억한다. 20대 후반이면 은퇴 수순을 밟던 때다. 프로 무대 출범에 설렘이 컸고 '딱 5년만 뛰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평생 야구판에서 있게 될 줄 몰랐다." - 프로 무대 도전을 포기한 않은 실업 선수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은퇴하면 은행 업무를 해야 했다. 적성에 맞았겠는가. 장효조, 김용달, 유두열 등 내 또래들은 그저 프로가 생겨서 좋아했다. 그러나 망설임이 있던 선배들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 장효조, 유두열은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멤버다.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대회 전념 차원에서 프로 입단이 유예됐다) "김재박 선배, 김시진, 임호균 그리고 최동원 등 당시 대표팀 선수들은 1983년부터 프로 무대에 합류했다. 그래서 윤동균, 김우열 선배처럼 실업 야구 스타 플레이어의 원년 합류는 희소식이었다. 일본 프로 리그에서 활약하던 백인천 감독이 우리 팀(MBC 청룡)에 와서 감독 겸 선수로 뛴 것도 많은 관심을 유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원년 무대 MBC 청룡의 전력은. "OB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롯데도 괜찮았다. 삼성이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에도 스타 플레이어던 배대웅, 천보성, 김한근 선배가 있었다. 삼성이 원년 개막전을 장식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 역사적인 개막전에서 4번 타자 겸 포수로 선발 출장했다. "개막 전 캠프, 훈련에서 컨디션이 좋았다. 장타력도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오래 지키지는 못했다. 부상도 있었고, 백인천 감독과 갈등도 있었다. 그래도 시즌 초반 4번 출전은 주효한 게 아닐까. - 개막전이자 출범식이었다. 당시 대통령의 시구를 받았는데. "경호가 철저했던 기억이 난다. 관중 입장 전에 관중석에 미리 자리한 사람들이 있었다. 경호원이었을 것이다. 심판 복장,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배치된 경호원도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범 기념구를 전달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가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 어떻게 됐나. "결국 건넸다. 막는 사람들에게 '이건 야구에서 관례다'고 설명했다. 젊은 시절이었다." - 당시 정순명, 하기룡 투수가 더 좋은 투수로 평가됐다. 이길환 투수가 MBC 청룡 선발 투수로 나선 배경이 있나. "백인천 감독이 일본 리그 출신 아닌가. 언더 핸드 투수가 성적을 내는 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수준급 잠수함 투수의 공은 당시 생소했고, 공략이 어려웠다. 이길환의 공도 좋았다." - 유종겸 투수와 배터리 호흡을 맞춘 5회 초, 선두 타자 이만수에게 출범 최초 홈런을 허용했다. "이만수가 펄쩍거리며 뛰어서 그라운드를 돌던 기억이 있다. 야구도 잘했지만, 그때부터 흥이 많던 친구다. 최초 홈런을 맞았던 상황에 볼 배합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이만수의 성향은 또렷이 기억난다." - 어땠는가. "당시에는 포수와 타자, 심판이 대화도 많이 하던 시절이다. 일종의 견제였다. 그런데 이만수는 타석은 매우 과묵한 편이었다. 자신도 포수였고, 다른 팀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시끄럽게 굴었으면서 말이다. 내가 계속 말을 걸면 '조용히 하세요'라며 쏘아붙이고 타석에 집중했다. 그 친구가 타격 쪽에서 일가견이 있고 성적도 좋았던 이유는 타석에서의 진지함이 아닐까." - 유 감독도 응수했다. MBC 청룡이 4-7로 뒤진 7회 말 동점 3점 홈런을 쳤다. "삼성 투수는 좌완 황규봉 선배였다. 나는 우투수보다 좌투수 공을 더 잘 쳤다. 묵직한 공이 들어왔지만 조금 높았다. 운이 좋았다. 그래도 오른쪽 담장을 넘긴 것은 자부심이 있다. 당시에는 밀어서 담장을 넘기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 손목 힘은 인정받았다. 4번 타자니까 일발 장타를 기대받았고, 욕심을 내봤다." - 이 홈런은 이만수, 백인천에 이어 역대 3호였다. 최초 홈런 욕심은 없었나. "그때는 기록의 중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프로 야구가 출범했지만, 실업 야구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실업 야구 때도 많은 관중 앞에서 항상 축제처럼 경기를 치렀다. 평균 기록, 누적 기록이 갖는 의미는 나중에야 알았다." - 이 경기는 역사에 남았다. 유 감독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드라마다. "이종도 선배가 영웅이 된 건 내 도움이다. 나는 역적이 전락했고. (웃음)" - 유 감독은 10회 말 1사 2·3루 볼카운트 3볼에서 투수 앞 땅볼을 쳤더라. "이선희 선배가 나를 (볼넷으로) 거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4구째 공이 포수 머리 높이로 오더라. 내 몸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투수 키를 넘길 수 있었는데 글러브에 잡혔다. 3루 주자가 홈에서 아웃됐다. 백인천 감독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더라." - 덕분에 이종도에게 타석이 이어졌다. "삼성은 그 경기에서 홈런까지 친 백인천 감독을 당연히 고의4구로 걸렀다. 만약 내가 볼넷으로 출루했다면 이종도 선배까지 타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백 감독이 해결했겠지. 이런 상황에서 기가 막힌 홈런이 나왔다. 내가 없었으면 스토리 연결이 안 되는 경기였다. 나는 경기 뒤에 한숨만 나왔다." - 원년 기억을 조금 더 떠올려보자.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꼽는다면. "OB 투수 박철순의 공이 정말 좋았다. 원년에 22연승을 거둔 투수 아닌가. 미국 유학파였고 그가 던지던 너클볼은 정말 치기 어려웠다. 빠른 공 체감 구속은 시속 145㎞ 정도. 이후 최동원, 선동열이 프로 무대에 진입했다. 원년 최고 투수는 박철순이었다." - 배터리 호흡을 맞춘 투수(MBC 청룡 소속) 중에 꼽는다면. "원년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된 좌완 유종겸이다. 동기고 호흡이 잘 맞았다. 원년 얘기는 아니지만, 유종겸이 장효조에게 매우 강했던 기억이 난다. 장효조가 누구인가. 한국 야구 통산 타율 1위(0.331) 아닌가. 좌투수와 좌타자 대결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유독 강했다." - 원년 일상도 궁금하다. 이동과 숙박은 어땠나. "굳이 비교한다면 지금은 KTX, 당시는 시외버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길도 안 좋은 시대였다. 이동은 피로했다. 버스는 기억에 남는다. 이동하면서 회의나 담화를 나누라고 맨 뒷자리에 원형 테이블을 설치해줬다. 항상 좋은 숙소를 쓴 것은 아니다. 품위 유지에 신경을 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관에서 잘 때도 있었다. - 룸메이트는 누구였나. "정확히는 기억은 안 난다. 지금은 선배와 후배가 한방을 쓰지 않나. 원년에는 그냥 마음에 맞는 동료끼리 합의한 뒤 매니저한테 얘기했다." - MBC의 1982년을 돌아본다면. "솔직히 팀 워크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모래알 같았다. 좋은 선수는 있었지만, 개성이 강해서 따로 노는 편이었다. 융화되지 못하기도 했다. 6팀 중 3위였는데, 좋은 성적이라고 볼 순 없었다." - 유승안의 1982년은. "팀과 비슷했다. 정신없었다. 프로라는 환경 변화에 완벽한 적응 못 했다. 혼란기였다. 갑자기 좋은 대우를 받고, 관심을 받는 것을 잘 흡수하지 못했다." - 39년이 지난 현재, 포수 유승안은 경찰야구단 감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경찰야구단은 지난해 7월, 창단 14년 만에 해단했다) "아들들(KT 유원상, KIA 유민상)까지 야구를 시킨 사람이다. 한국 야구에 애정이 깊고, 걸어온 길에 자부심이 있다. 그가 중에서도 경찰야구단을 맡은 건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이다. 한국 야구 토양을 다지는 데 조금은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 향후 계획도 궁금하다. "여전히 야구 저변은 넓어져야 한다. 프로팀, KBO의 육성 정책 활성화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 프로 선수를 현역으로 경험했고, 지도자도 했다. 한국 야구 전반에 대해 진단을 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목소리를 내고 싶다." - 현재 KBO리그에서 유 감독의 눈길을 끄는 선수는 있나. "아들들은 요즘 빌빌댄다. 아무래도 경찰야구단 출신 선수들의 행보에 관심이 많이 간다. 실력이 늘어서 소속팀으로 돌아간 양의지, 허경민 등이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KT 이대은과 롯데 안치홍이 갑자기 슬럼프가 와서 안타깝다. 두산 박건우는 지금도 잘하지만,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우타자로 성장할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한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관련기사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원년 첫 안타, 첫 홈런 '개막전 사나이' 삼성 이만수…"최동원 때문에 타율 많이 까먹어" 2020.09.2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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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원년 첫 안타, 첫 홈런 '개막전 사나이' 삼성 이만수…"최동원 때문에 타율 많이 까먹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성 라이온즈에는 스타플레이어가 즐비했다. 1970년대 대구·경북 지역이 경북고-대구상고(현 상원고) 중심으로 아마야구 전성기를 누리면서 유능한 선수들이 꽤 많이 발굴됐다. 그 흐름이 구단으로 연결돼 창단 당시 삼성은 투타 밸런스가 가장 안정적인 팀이었다. 투수 이선희와 권영호, 야수 배대웅, 천보성, 서정환, 정현발 등 선수층이 유독 두꺼웠다. 많은 전문가가 프로야구 원년 우승 후보로 삼성을 점찍었던 이유다. 이만수 전 SK 감독은 '스타 군단' 삼성의 핵심이었다. 실업야구팀에서 온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1982년 3월 27일 열린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도 주전 마스크를 썼다. 당시 삼성은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MBC를 상대했는데 이 전 감독은 1회 초 2루타로 KBO리그 통산 첫 안타의 주인공이 됐다. 이어 5회 초에는 사상 첫 홈런까지 때려내며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개막전 사나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활약이었다. 마지막에 웃진 못했다. 삼성은 개막전 초반 5-0으로 크게 앞서 손쉽게 승리를 따내는 듯했다. 그러나 7-4로 앞선 7회 말 유승안에게 동점 스리런 홈런을 맞고 승부가 연장으로 흘렀다. 결국 10회 말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 홈런을 허용해 무릎을 꿇었다. 만루 홈런을 내준 투수 이선희와 개막전 배터리 호흡을 맞춘 이 전 감독은 "그런 드라마는 글로 쓰려고 해도 쓰기 힘들다"고 회상했다. 원년 첫 경기를 역전패로 마무리한 삼성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도 웃지 못했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OB 베어스에 무릎 꿇었다. 이만수 전 감독은 삼성의 '시작'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는 레전드다. 그는 "겉은 프로지만 돌아가는 내용은 사실 아마추어에 가까웠다"며 1982년을 돌아봤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하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을 갖고 야구를 계속했는데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생긴다고 해 그 꿈을 접었다. 한양대를 졸업하기 전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얘길 들었다. 미국에서 야구 경기를 하나 한국에서 하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미국에 가지 않고 남기로 결정했다. 현역 시절에는 일본에 진출할 기회도 있었다. 프로에서 활약하는 걸 보고 제의가 오더라.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도 물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어디서 야구를 하든 똑같다고 생각했다." -삼성의 지명을 받았을 때는 어땠나."너무 좋았다. 왜냐면 내가 대구 출신 아닌가. 그때는 고등학교 연고(대구상고 졸업)를 기준으로 프로에 갔으니까 대구가 연고인 삼성에 갈 수밖에 없었다. 프로야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고향 팀에 가니까 더 좋았다." -프로야구 원년 전지훈련은 어떻게 진행했나."1982년은 거제도에서 했다. 삼성이 운영하는 조선소 안에 야구장이 아닌 축구장이 있었다. 거기서 훈련하다가 마산으로 넘어가고 그랬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지훈련을 하러 해외에 간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후 삼성이 국내 구단 중 처음으로 미국 LA에서 전지훈련을 했지만, 원년은 아니었다. 정말 추워서 죽는 줄 알았다. 정신력으로 버텼는데, 지금이라면 아마 다 도망갔을 거다. (웃음) 환경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개막전 떨리지 않았나."전두환 대통령이 시구하지 않았나. 당시 삼성의 초 공격이어서 MBC 청룡 포수였던 유승안이 시구를 받았던 거 같다. 역사적인 순간이었고 야구인 중 한 명으로서 감사했다. 너무 기뻤다." -개막전에서 역사적인 KBO리그 첫 안타를 때려냈는데."상황이 생생하다. 1회 초 2사 2루에 투수가 이길환이었고 주자는 함학수 선배였다. 풀카운트에서 2루타를 때려내 첫 안타와 첫 타점을 동시에 올렸다. 유종겸 선배를 상대로 친 첫 홈런(5회 초)도 다 기억난다. 당시만 하더라도 첫 안타와 타점, 홈런에 대한 중요성이 크지 않았다. 프로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다. 아마추어를 오래 하다 보니까 오랫동안 프로야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기념이 될 만한 걸 모아놓거나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첫 안타와 첫 홈런, 더 기억에 남는 건."솔직히 홈런이다. 안타도 좋았지만, 홈런을 친 뒤 베이스를 돌 때의 그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내가 펄쩍펄쩍 뛰면서 지금은 돌아가신 서영무 감독님을 안고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개막전 상대 MBC에는 백인천 감독이 있었는데."고등학교 3학년 때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발탁돼 일본 가고시마에 갔었다. 거기에서 백인천 감독과 장훈 선배가 경기하는 걸 직접 봤다. 우상 같았던 선배 중 한 명이 백인천 감독이었다. 프로야구를 하면서 함께 경기한다니까 어땠겠나. 쉽게 말해 백인천 감독은 대학생이고 우리는 초등학생이나 다름없었다. 상상을 해보면 된다. 4할 타율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났다. -그 실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활약이 대단했는데."대학교 때 백호기라는 대회가 있었다. 백호기는 대학팀과 실업야구팀이 모두 출전해 함께 경기하는 대회였다. 그때 실업야구는 김우열, 윤동균 선배 등 멤버가 쟁쟁했다. 초창기 대학팀은 실업야구팀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후 대학팀이 우승했는데 내가 대학생(한양대) 때는 결승에 올라가고 그랬다." -원년 개막전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7-7로 맞선 연장 10회 말 이선희 선배가 이종도 선배한테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고 울었던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 그때 내가 포수였다. (웃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프로야구 붐업을 시킨 주역이 이선희 선배와 이종도 선배라고 생각한다. 만약 삼성이 경기 전 예상대로 이겼다면 보는 사람마다 '아, 야구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을 했을 거다. 그런데 끝내기 만루 홈런이 나왔으니 그 짜릿함은 말로 다 표현을 못 하지. 당시에는 개막전이 TV로 중계됐었는데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을까. 한 사람은 눈물을 흘렸고 한 사람은 영광의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두 선수가 프로야구 흥행을 이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드라마는 글로 쓰려고 해도 쓰기 힘들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그 당시만 해도 김우열 선배, 윤동균 선배, 김봉연 선배 같이 야구 잘하는 선수가 정말 많았다. 그런데 내가 포수니까 그분들이 타석에 들어서면 일본말로 이런저런 얘길 많이 했다. (웃음) 지금은 프로야구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때는 가능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겉은 프로지만 돌아가는 내용은 사실 아마추어에 가까웠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얼마나 말을 많이 했냐면…그것 때문에 선배들과 많이 다투기도 했다. 백인천 감독은 직접 그라운드에 나와서 '이만수 입 좀 닫게 해달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상대하기 어려웠던 '천적'이 있었나."선동열(해태·1985년 데뷔)은 뒤늦게 들어왔는데, 초창기 최동원(롯데·1983년 데뷔) 때문에 타율을 정말 많이 까먹었다. 최동원만 아니었어도 통산 타율(0.296)이 3할이 됐을 거다. 그다음에는 롯데에 박동희(1990년 데뷔)라고 있었다. 선수 생활하면서 공이 그렇게 빠른 투수는 처음 봤다. 당시 구속이 최고로 빨랐던 투수였다. 그리고 이강철(해태·1989년 데뷔), 조계현(해태·1989년 데뷔) 같은 투수 때문에 타율이 또 많이 떨어졌다. 그 시절 해태에는 정말 좋은 투수가 많았다." -당시 룸메이트는 누구였나."선수 생활하면서 가장 길게 룸메이트를 했던 건 4년 뒤에 입단한 성준(1986년 데뷔)이다. 한 6~7년 정도 했던 거 같다. 원년에도 선배랑 후배가 2명씩 잠을 잤는데 투수랑 포수가 짝을 이뤄 투수였던 이선희 선배랑 했었던 거 같다. 1년 뒤에 김시진이 입단해 그때는 김시진이랑 했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원년 사령탑이셨던 서영무 감독님이 정말 무서웠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화가 나셨는지 고속도로를 가다가 선수들에게 내리라고 하고 그냥 가버리셨다. (웃음) 버스를 저 멀리에 주차하고 선수들을 기다리고 계셨는데 그러면 거기까지 막 뛰어가고 그랬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정말 많았다." -아쉽게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놓쳤는데."그때 우승을 하지 못하면서 그 이후 계속 어렵게 됐던 거 같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우승하는 데 오랜 시간(삼성·2002년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 걸렸다." -최근 프로야구에서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사실 요즘에는 야구를 잘 보지 못했다. 이정후(키움)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이 잘하더라. 한동민(SK)이 잘했으면 좋겠는데…(웃음)"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관련기사 [창간특집]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2020.09.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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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대전 현장] 류중일 감독의 1987년 추억, "지환아, 수비만 신경써"

1987년 삼성 신인 류중일은 입단 첫해부터 주전 유격수로 뛰었다. 그해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명 유격수'의 계보를 알렸다. 경북고에 재학 중이던 1982년 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잠실구장 개장 1호 홈런의 주인공'이라는 특별한 기록도 남겼지만, 프로 입단 초반 1군에서 방망이는 영 신통치 않았다. 당시 삼성에 몸담고 있던 천보성 코치가 '신인' 류중일에게 "수비만 잘하면 된다"고 부담을 덜어줬다. 류중일은 그해 타율 0.287로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다. 33년이 흘러 류중일(57) LG 감독은 오지환(30)을 떠올렸다. 자신과 같은 유격수 포지션에서 활약하는 오지환이 시즌 초반 극심한 타격 슬럼프에 빠져 있어서다. 류 감독은 최근 코칭스태프와 점심을 먹는 동안에 오지환에게 전해달라며 메시지를 주문했다. 23년 전 자신이 코칭스태프에게 들은 조언과 마찬가지로 "수비만 잘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오지환은 개막 3주차까지 타율이 0.175에 그쳤다. 규정타석을 채운 60명 중 58위. LG는 이천웅-김현수로 구성된 테이블세터진과 로베르토 라모스를 필두로 한 중심타선이 초반 뜨거운 공격력을 자랑했지만, 오지환이 포진한 하위 타선에는 아쉬움이 컸다. 수비력은 이미 인정받았다. 수비 범위가 넓고 어깨가 강하다. 26일 대전 한화전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호수비도 선보였다. 2-0으로 앞선 6회 1사 후 한화 정은원의 타구를 역동작으로 슬라이딩 캐치해 1루로 던져 아웃 처리했다. 정은원이 좌타자로 빠른 발을 갖췄음을 고려하면 내야 안타 혹은 좌중간으로 빠져나가는 타구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오지환이 안타를 삭제한 것이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메이저리그급 호수비이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누구보다 마운드에 서 있던 선발투수 타일러 윌슨이 가장 놀라운 표정으로 고마워했다. 윌슨은 "내가 KBO 리그에서 본 야수 중 수비가 가장 훌륭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1987년 '신인 류중일'과 2020년 '프로 12년 차 오지환'을 비교하면 프로 경력에 큰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타격에서의 기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오지환은 이번 겨울 LG와 4년 총 40억 원에 FA(프리에이전트) 계약을 맺어 더욱 그렇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큰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 개인 통산 100홈런을 돌파한 장타력을 갖춘 유격수로 기대하는 바가 크다. 오지환이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이유다. 그래서 류중일 감독으로선 오지환에게 부담감을 줄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수비 기본에 충실하면서 타격 페이스까지 올라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류 감독은 경기 전 오지환을 언급하며 "방망이가 잘 맞으면 수비도 잘 된다. 그런데 타격이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수비에도 지장이 가기 마련이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오지환은 이를 비껴갔다. 타격은 부진해도 수비에서만큼은 탄탄함을 보여왔다. 슬럼프에 빠져있던 오지환의 방망이가 이제 깨어나기 시작했다. 27일 한화전 한 경기에서 두 개의 홈런을 쏘아 올렸다. 2016년 9월 9일 두산전 이후 991일 만에 멀티 홈런을 기록했다. 더불어 이날 이번 시즌 개인 한 경기 최다인 3안타·3타점 경기를 펼쳐 2할대 타율(0.210)에 진입했다. 최근 4경기 연속 안타로 타격 페이스를 끌어올린 모습이다. 류중일 감독은 27일 한화에 15-4로 크게 이긴 뒤 "그동안 타석에서 조금 아쉬웠던 오지환과 유강남이 좋은 타구를 만들어 고무적이다"고 반겼다. 대전=이형석 기자 2020.05.2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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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2000년대 사령탑, 재계약 감독이 없다

2000년대 LG 감독 중 재계약에 성공한 사령탑은 단 한 명도 없다.LG는 3일 "신임 사령탑에 류중일 감독을 선임한다"고 밝혔다. 전임 양상문 감독은 단장직으로 옮긴다.2000년대 LG 사령탑은 '독이 든 성배'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재계약에 성공한 감독이 단 한 명도 없고 계약 기간을 못 채운 사령탑도 꽤 있기 때문이다. 1999시즌을 앞두고 재계약한 천보성 감독이 가장 마지막 사례다.1994년 LG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이광환 감독은 재계약에 성공했으나, 1996년 7위로 부진하자 시즌 도중에 경질됐다.감독대행을 거쳐 1997년 정식 감독에 선임된 천보성 감독이 가장 최근 재계약에 성공한 사령탑이다. 1997~1998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로 LG와 재계약했다. 하지만 1999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자 역시나 경질됐다.2000년 LG 사령탑에 오른 이광은 감독은 한 시즌 반 만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고,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끈 김성근 감독도 그해 시즌 종료 뒤 LG를 떠났다. 그러자 LG는 이광환 감독에게 다시 지휘봉을 맡겼으나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물러났다.2004년부터 LG 사령탑에 오른 이순철 감독도 2006년 6월 성적 부진으로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팀을 떠났다.LG는 2007년 현대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 4회를 이끈 김재박 감독을 영입했다. 김 감독은 3년 동안 포스트시즌에 단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하면서 재계약에 실패했다.이후 LG는 초보 사령탑 박종훈 감독과 파격적인 5년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박 감독이 2년 연속 6위에 그치자 팀을 떠났다. 지휘봉을 넘겨 받은 김기태 감독은 2013년 11년만에 LG를 포스트시즌에 올려놨으나 이듬해 5월 갑자기 사퇴했다.양상문 감독이 사령탑에 올라 꼴찌였던 팀을 포스트시즌에 올려놨다. 2015년 9위에 그쳤으나 지난해 가을야구에 진출, 플레이오프까지 올랐다. 하지만 올 시즌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자 감독 재계약에 실패했다. 다소 드물게 곧바로 단장을 맡았다.어찌됐든 2000년대 LG 감독 중에 재계약에 성공한 사령탑은 단 한 명도 없다. 1994년 이후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는 LG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이형석 기자 2017.10.03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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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김경문·추신수…대통령배 MVP를 거쳐간 스타들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는 스타의 등용문이었다.대통령배는 1967년 초대 대회부터 2010년까지 매년 4월에 개최됐다. 전국 대회 가운데 가장 먼저 열렸다. 프로나 대학 입성을 앞둔 '예비 스타'들이 팬들 앞에 첫선을 보이는 기회였다.대통령배가 만든 첫 스타는 1967년 1회 대회 최우수선수(MVP)상을 수상한 왼손 투수 임신근이었다. 경북고 2학년이던 임신근은 선린상고와 결승전에서 완봉승을 올렸다. 이듬해 2회 대회에서도 경북고를 다시 우승으로 이끌면서 MVP를 2연패했다. 그해 경북고는 '야구 천재' 임신근의 활약 속에 전국 대회 7관왕에 올랐다. 당시 선린상고 4번 타자였던 김우열은 실업 야구 통산 최다 홈런(124개)을 때려 냈다. 만 34세였던 1982년 OB 원년 멤버로 입단해 초창기 프로야구의 간판 거포로 이름을 날렸다.경북고는 1971년 '철완' 남우식을 앞세워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남우식은 1970년과 1971년 대통령배 MVP를 연속 수상했다. 스피드건이 없던 시절이지만, 당시에는 보기 어려웠던 시속 150㎞ 강속구를 던졌다는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남우식 외에도 천보성, 배대웅, 정현발이 1971년 경북고 우승 멤버. 1972년에는 이선희와 황규봉이 다시 경북고의 우승에 앞장섰다. 유일한 대통령배 3연패 기록이다.10회 대회 결승전에서는 대구상고 선발 김시진이 8회까지 군산상고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러나 9회 김종윤에게 3루타를 맞고 포수 이만수가 다음 공을 놓쳐 결승점을 내줬다. 아픈 기억을 공유한 김시진과 이만수는 프로야구 삼성에서 최강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다. 나란히 프로야구 감독까지 역임한 스타플레이어가 됐다.1977년 대통령배 MVP는 공주고 포수 김경문이었다. 1980년엔 광주일고 선동열이 MVP에 올랐다. 두 선수는 차례로 고려대에 진학한 뒤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김경문은 두산과 NC 지휘봉을 잡고 당대의 명장으로 우뚝 섰다. 선동열은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남았다. 선동열과 함께 광주일고 우승을 이끌었던 허세환은 2007년 모교 감독이 돼 다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2000년대 대통령배 최고 스타는 부산고 추신수다. 1999년과 2000년 연속 MVP와 우수투수상을 휩쓴 뒤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추신수는 2000년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경기고 오승환과 맞대결했다. 당시에는 추신수가 마운드, 오승환이 타석에 서 있었다. 추신수는 오승환을 범타로 막았다. 둘은 2016년 6월 19일(한국시간) 16년 만에 다시 만났다. 무대는 메이저리그였다. 배영은 기자 2017.07.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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