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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 파이트클럽] '30년 프로레슬링 인생' 타지리, 그가 여전히 링에 오르는 이유

프로레슬러 타지리(53·본명 타지리 요시히로)는 현역 일본 레슬러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172cm 83kg의 작은 체격에도 날카로운 킥과 화려한 공중기술로 일본은 물론 프로레슬링의 본고장 미국 무대를 주름잡았다. 심지어 세계 최고의 프로레슬링 단체인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며 챔피언을 6차례나 지냈다.타지리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누린 이유는 강력한 악역이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눈매와 인상, 상대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반칙에 능했다. 결정적 순간 입에서 정체모를 녹색 액체를 내뿜는 이른바 '그린미스트' 기술은 상대 선수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린미스트를 맞은 상대는 눈을 뜨지 못한채 멘붕에 빠진다. 타지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머리쪽에 강력한 킥을 날려 승리를 따냈다.필자는 최근 타지리를 한국에서 직접 만났다(참고로 그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레슬러 중 한 명이다). 1970년생으로 5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근육질 몸매나 매서운 인상은 여전했다. 밖에서 만나는 자리였지만 그는 자신의 캐릭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천생 프로레슬러였다.1994년 대학 아마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다 프로레슬러 길로 뛰어든 타지리는 지금도 현역이다. 2000년대 초중반 미국 WWE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그는 이후에도 간간이 WWE 초청을 받아 경기에 나섰다. 2016년에는 10여년 만에 WWE에 공식 복귀했지만 무릎 부상 때문에 길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뒤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단체에서 팬들과 만나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소규모 대회에도 참가하면서 젊은 후배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다.타지리에게 자신을 상징하는 대표 기술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그린미스트'라고 했다. 화려한 공중기술이나 타격기를 자랑하는 그가 직접 꼽은 대표 기술이 반칙 기술이라니. 처음에는 의외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됐다. "나는 프로레슬러는 운동선수가 아니라 표현자(performer)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싸우는지를 표현하는 아티스트입니다. 저는 프로레슬링이 다른 스포츠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레슬링은 보여주는 스포츠입니다. 상대를 때리거나 던지는 기술은 다른 스포츠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린미스트는 프로레슬링에서만 있는 동작입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말이 안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동시에 가장 프로레슬링다운 기술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기술을 가장 좋아하고 나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5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도 타지리는 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자주 경기를 치르고 있다. PWS라는 국내 단체에서 올해만 수 차례 경기에 나섰고 챔피언까지 올랐다. 사실 한국 프로레슬링은 적으면 몇 십명, 많아야 100~200명 관중 앞에서 대회를 치른다. 수만 명 관중 앞에서 경기를 치렀던 '레전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무대일지 모른다.하지만 타지리는 관중수나 경기장 크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솔직히 프로레슬링을 통해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고 돈도 벌 만큼 벌었다"며 "프로레슬링 자체의 흥미는 많이 떨어졌다"고 털어놓았다.그럼에도 이처럼 활발하게 링을 누비는 이유는 뭘까. 그는 대신 프로레슬링을 하는 사람에게흥미를 느낀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대회를 열고, 부상을 무릅쓴채 몸을 날리는 후배들을 격려하고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단다. 심지어 그들의 생활을 더 많이 알리기 위해 프로레슬링을 소재로 한 소설도 여러 편 출간했다. 소설 제목은 '프로레슬러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프로레슬러는 세계를 도는 유랑 예술인', '소년과 링스태프' 등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일본내 베스트셀러가 됐다. 타지리는 최근 프로레슬링을 꿈꾸는 젊은 선수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보라고 말합니다. 해보고 안되면 그만두면 되니까 그냥 해봐라. 될지 안될지는 해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래서 일단 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타지리는 한국 프로레슬링에 대한 인연도 깊다. 지금을 세상을 떠난 김일, 이왕표 선생과 자주 만나 프로레슬링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김일 선생의 추모 경기에도 여러차례 출전했다. 그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명맥을 이어가는 한국의 젊은 선수들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그들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건넸다."앞으로 김일 선생이나 이왕표 선생 같이 전국민이 아는 슈퍼스타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건 프로레슬링 인기가 높은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신 지금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SNS 등이 발달된 시대입니다. 전국민의 영웅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자기를 좋아하는 팬들을 만나기에는 좋은 시대가 됐습니다. 열심히 팬들과 직접 만나고 소통하면서 조금씩 지명도를 올린다면 머지않아 인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23.09.15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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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 파이트 클럽] 48세 프로레슬러 김남훈, 그가 계속 링에 오르는 이유

1974년생 프로레슬러 김남훈은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고 있다. 2001년 과천경마장에서 열린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데뷔한 뒤 23년째 사각의 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사실 김남훈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일단 책을 10권 이상 낸 유명 작가다. 오래전부터 여러 매체에 자신의 이름을 건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지상파 라디오 DJ를 맡기도 했다. 현재는 개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 기업과 학교, 공공기관을 상대로 강연도 활발하게 한다. 미국 종합격투기 UFC나 프로레슬링 WWE 같은 격투스포츠 해설도 오랫동안 하고 있다. 그가 해왔던 일을 나열하지만, 손가락 열 개로 한참 모자란다. 그런데 김남훈을 대표하는 직업은 프로레슬러다. 우리말 사전에 정의된 직업의 의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종사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프로레슬러는 직업으로서 자격이 없다. 이걸로 먹고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은 힘 빠진 지 오래다. 과거 김일, 이왕표로 이어졌던 전성시대는 옛 추억일 뿐이다. 지금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이다.김남훈의 프로레슬링 경력은 몰락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한국 프로레슬링과 겹친다. 어릴 적 AFKN 등을 통해 봤던 미국 프로레슬링에 매료돼 꿈을 갖게 됐다.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던 시절 무작정 프로레슬링 도장에 들어간 게 20년을 훌쩍 넘겼다. 멀쩡한 일을 안 하고 프로레슬링을 한다며 무시도 참 많이 당했다.사실 몇 번 프로레슬링을 그만두려고 했다.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 보니 다른 일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지. 마치 마약처럼 프로레슬링을 끊을 수 없었다. 잠시 정신을 내려놓으니 어느덧 링 위에 서 있었다. 경기복을 입고 상대와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악역 레슬러답게 철제 의자 같은 반칙 무기도 늘 그 옆에 있었다. 김남훈은 얼마 전 일본 원정경기를 치렀다. 규슈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규슈 프로레슬링 창립 15주년 대회’에 참가했다. 후쿠오카 국제센터 대회장에 4000명이 넘는 관중이 몰렸다. 프로레슬링이 활성화된 일본에서도 큰 규모로 열린 대회였다.김남훈은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 출신 레슬러와 함께 팀을 이뤄 WWE 출신 타지리 등 일본 레슬러들과 3대3 경기를 치렀다. 외국에서 온 악역 역할을 톡톡히 했고, 마지막에 승리까지 따냈다. 이 경기는 김남훈이 무려 10년 만에 따낸 일본 원정경기 승리였다. 경기 후 라커룸에서 김남훈은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프로레슬링은 각본이 있는 스포츠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승패를 이미 알고 있다. 진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다. 상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꺼이 망가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프로레슬링이 더 매력적이고 특별하다. 김남훈도 자신이 이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김남훈에게 프로레슬링이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그는 인생의 최후 방어선이라고 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다 흔들릴 때 자신을 지탱해 줄 마지막 보루라는 것이다. 프로레슬링마저 못하게 되면 그때는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단다.그래서 김남훈은 최대한 오래 프로레슬링을 하려고 한다. 환갑 때도 링에 올라 젊은 선수들을 손봐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오십 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다양한 운동을 소화한다. 매일 복싱, 킥복싱, 가라테 훈련을 하면서 자신을 단련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사회인 복싱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20~30대보다 더 훈련량이 많다고 너스레를 떨었다.운동하다 보면 아들뻘 되는 동료에게 굴욕을 당할 때도 있다. 그래도 계속 버티니까 괜찮다고 한다. ‘버틴다’는 김남훈이라는 인물을 정의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김남훈은 “어떤 분야든 맷집이 중요하다. 일단 버티고 최후 방어선을 사수하면 언젠가 잠깐이라도 인정받는 날이 온다”고 믿는다. 마흔여덟 살의 그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링에 여전히 오르는 이유다. 2023.08.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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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 파이트클럽] 한 식구가 된 UFC와 WWE,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코너 맥그리거와 존 시나가 옥타곤이나 사각의 링에서 대결하는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최근 세계 스포츠 산업을 뒤흔들만한 큰 사건이 일어났다. 종합격투기와 프로레슬링의 세계 최대 단체인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와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가 한 식구가 된 것. UFC의 모기업인 엔데버(Endeavour) 그룹은 지난 2일(현지시간) WWE의 지분 51%를 인수한다고 공식발표했다.엔데버 그룹의 인수 작업은 올해 말에 마무리 될 전망이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면 공식적으로 WWE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향후 UFC와 WWE를 통합한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 주식시장에 상장한다는 계획이다. WWE의 CEO였던 빈스 맥마흔이 새롭게 만들어질 회사의 회장을 맡게 된다. 기존에 UFC를 책임졌던 데이나 화이트 회장과 WWE의 공식적인 대표인 닉 칸 회장은 그대로 양 단체를 이끌게 된다. 엔데버 그룹의 CEO인 아리 엠마누엘이 두 단체의 운영을 총괄적으로 관리할 계획이다.엔데버그룹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비버리힐즈에 위치한 초대형 스포츠&엔터테인먼트 그룹이다. 2009년 거대 연예 기획사였던 엔데버(Endeavor)와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William Morris Agency)가 합병하면서 지금의 엔데버 그룹으로 발돋움했다.영화, TV, 음악, 디지털 미디어, 출판, 공연 등에서 큰 성공을 거둔 엔데버 그룹은 최근 들어 스포츠 산업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2013년 스포츠 매니지먼트 그룹인 IMG를 22억 달러에 인수 합병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2016년에는 '카지노 업계 큰 손'인 퍼티타 형제(프랭크 퍼티타-로렌조 퍼티타)가 소유했던 UFC를 40억 달러(약 5조3000억원)에 인수해 업계를 발칵 뒤집었다.엔데버 그룹이 인수한 뒤 UFC는 눈에 띄게 성장했다. 코너 맥그리거, 존 존스, 론다 로우지 같은 슈퍼스타들을 앞세워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격투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론다 로우지는 현재 WWE에서 활동 중이다). 7년 전 엔데버 그룹이 40억 달러에 인수했던 UFC의 기업 가치는 현재 121억 달러(약 16조원)로 3배 이상 늘어났다.UFC를 통해 큰 재미를 본 엔데버 그룹이 다시 눈을 돌린 것이 바로 WWE였다. 프로레슬링은 오늘날 가장 무섭게 성장하는 스포츠 분야다. 과거에는 실전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당했던 프로레슬링은 WWE를 통해 전세계가 열광하는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 및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 WWE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시간으로 지난 2일과 3윌 미국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의 소파이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레슬매니아 39'는 역대 최대 규모인 2160만달러(약 285억원)를 벌어들였다. 글로벌 시청률과 스폰서십 판매, SNS 콘텐츠 소비량도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대회 관련 동영상은 주말 동안 온라인 상에서 1100만 시간의 시청시간과 5억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는 세계 최대 단일 스포츠이벤트로 인정받는 북미미식축구(NFL) 결승전 '슈퍼보울'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이번 엔데버의 인수 계약으로 2021년 40억 달러 수준이었던 WWE의 기업 가치는 대략 93억 달러(약 12조원)으로 치솟았다. 기존 121억 달러(약 16조원)인 UFC와 합병하게 되면 214억 달러(약 28조원) 규모의 초대형 스포츠 기업이 탄생하게 된다.그렇다면 UFC와 WWE가 한 식구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두 단체의 합병 이후 벌어질 사건들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코너 맥그리거 같은 UFC 파이터들이 프로레슬링에 등장하고 존 시나나 더 락 같은 프로레슬러들이 실제로 싸울지 모른다는 생각이다.실제로 UFC와 WWE는 오랜 시간 경쟁을 해온 동시에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어왔다. UFC는 WWE의 극적인 요소를 상당부분 차용했다. 인터뷰나 SNS를 활용해 선수들끼리 독설을 주고받으며 대립 및 갈등관계를 고조시켰다. 이는 팬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WWE에서 오랫동안 해왔던 것들이다. WWE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무대효과 등도 UFC가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WWE는 팬들의 몰입감을 높이고자 UFC의 실전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UFC에서 챔피언까지 지냈던 브록 레스너나 론다 로우지는 현재 WWE에서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프로레슬링과 종합격투기를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시도하기도 한다.다만 WWE와 UFC가 당장 한 식구가 됐다고 해서 당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전망이다. 종합격투기와 프로레슬링은 닮은 듯 하면서도 전혀 다른 형태 산업이기 때문이다. 종합격투기는 실전을 바탕으로 한 진지함이 매력이다. 스포츠의 순수한 재미를 줘야 한다. 반면 프로레슬링은 많은 볼거리를 선물하고 극적인 재미를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자칫 어설픈 결합이 UFC의 실전성, WWE의 오락성을 해칠 수도 있다. 오히려 WWE 팬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WWE와 거리를 두는 듯 보였던 빈스 맥마흔의 영향력이 이번 합병을 통해 더 커졌다는 점이다. 빈스 맥마흔은 지난해 회사 내에서 불륜관계였던 전 여직원에게 비밀 유지 조건으로 수십억대 합의금을 지불한 사실이 밝혀져 물의를 빚었다. 이로 인해 WWE 관련 모든 직무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WWE 팬들은 빈스 맥마흔의 그런 퇴장을 반가워했다. 그의 독선적인 경영 방식과 시대에 구태 의연한 사고 방식이 WWE의 재미와 발전을 막는다고 생각해서다. 빈스 맥마흔이 물러나면서 WWE에 새로운 시대가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빈스 맥마흔이 일선에서 손을 떼면서 WWE는 시청률 등 각종 지표에서 다시 인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인수를 통해 새로운 합병 회사 회장을 맡게 되면서 빈스 맥마흔의 파워는 더욱 강력해졌다. WWE가 새 주인을 맞이했다고 하지만 팬들은 오히려 예전으로 돌아갈까봐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이석무 이데일리 기자 2023.04.0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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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의 파이트 클럽] '프로레슬링의 슈퍼볼' 레슬매니아, 스포츠 이벤트 역사를 바꾸다

"내 최고의 창조물, 레슬매니아!"월드레슬링엔터테인먼트(WWE)를 세계 최고의 스포츠 메가 이벤트로 만든 빈스 맥마흔(78)은 2010년 미국 애리조나주 글렌데일에서 열린 레슬매니아 26에서 캐나다 출신 레슬러 브렛 하트(66)와 경기를 앞두고 마이크를 잡은 채 이렇게 말했다. 맥마흔은 WWE 이벤트에서 거만한 악덕 기업주 캐릭터를 연기했다. 하지만 각본과 별개로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레슬매니아의 탄생은 빈스 맥마흔의 작품이었다. 이는 프로레슬링을 넘어 세계 스포츠 이벤트 역사를 바꾼 엄청난 사건이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포브스'는 "레슬매니아가 미식축구 결승전인 슈퍼볼을 뛰어넘었다"고 소개했다. 슈퍼볼은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경기 스포츠 이벤트다. 이 분야에 관한 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 슈퍼볼을 레슬매니아가 이겼다니 무슨 얘기일까.포브스는 2022년 텍사스 댈러스의 AT&T 스타디움에서 이틀에 걸쳐 열린 레슬매니아 38이 역대 가장 많은 관중(15만6352명)을 동원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소셜미디어(SNS) 참여, 동영상 조회수 및 시간 등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덧붙였다.심지어 그해 열린 슈퍼볼의 각종 수치도 뛰어넘었다. 레슬매니아는 동영상 조회수에서 약 11억뷰를 기록, 약 6억뷰를 기록한 슈퍼볼을 월등히 능가했다. 동영상 시청 시간은 레슬매니아가 1310만 시간인 반면 슈퍼볼은 356만 시간을 기록했다.물론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레슬매니아는 이틀에 걸쳐서 열렸고 슈퍼볼은 하루에 모든 행사가 진행됐다. 이벤트가 끝나고 추산된 경제효과에서도 슈퍼볼은 5억7000만달러(약 7428억원)인 반면 레슬매니아는 2억4800만달러(약 3232억원)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티켓 가격의 차이가 컸다.하지만 변두리 스포츠였던 프로레슬링이 슈퍼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이벤트로 성장했다는 점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인 2019년 포브스는 레슬매니아를 슈퍼볼, 하계올림픽. 미국 대학농구, 월드컵 축구, 미국 대학 풋볼에 이어 스포츠 이벤트 브랜드 가치 6위로 평가했다.맥마흔 본인이 밝힌 대로 레슬매니아는 그의 야심작이었다. 많아야 1000~2000명, 적으면 수십, 수백 명 관중 앞에서 경기를 펼치던 프로레슬링을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 경기장에서 치른다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는 당시 마흔 살도 채 되지 않았던 젊은 맥마흔이었기에 가능했다.당시 관계자들은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아버지 맥마흔 시니어의 뒤를 이어 WWE(당시는 WWF) 회장직에 오른 맥마흔은 생각이 달랐다. 프로레슬링을 전국적인 사업으로 키우기 위해 '프로레슬링 버전의 슈퍼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5년간 준비 끝에 1985년 '미국 스포츠 성지'라 불리는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레슬매니아 첫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레슬매니아 1, 2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맥마흔은 1987년 엄청난 결정을 내린다. 9만명 이상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 폰티악 실버돔에서 레슬매니아3를 열기로 한다. 맥마흔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거대한 경기장이었던 실버돔 관중석을 메우기 위해 특별한 경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대 최고 스타였던 헐크 호건과 안드레 더 자이언트의 대결을 완성했다.미국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미국 영웅 캐릭터였던 호건이 프랑스에서 왔고 230㎏이 넘는 '거인' 안드레 더 자이언트를 번쩍 들어 메치는 장면은 프로레슬링 역사를 바꾼 가장 빛나는 명장면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경기를 통해 레슬매니아는 단숨에 전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빅이벤트로 떠올랐다. 당시 30대 초반으로 무명 기타리스트 출신이었던 헐크 호건은 1980년대 프로레슬링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자으로 대중문화의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WWE는 이후 1990년대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 2000년대 더 락, 2010년대 존 시나라는 간판스타를 앞세워 레슬매니아 대회의 전통을 이어갔다. 지난해까지 38번의 이벤트를 개최했고 올해 39번째를 맞이하는 2023년 레슬매니아는 한국 시간으로 4월 2일과 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잉글우드의 소파이스타디움에서 열린다. 2020년 개장한 신식 경기장인 소파이스타디움인 각종 첨단 장비가 설치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경기장으로 유명하다.7만 명 넘게 수용하는 대형 경기장에서 이틀 동안 열리게 될 2023년 레슬매니아는 역대 각종 흥행 기록을 뛰어넘을 것이 확실하다. 레슬매니아는 길거리의 서브컬쳐로 정도로 취급됐던 프로레슬링의 대변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짜고 치는 가짜 스포츠'로 무시당했던 과거의 이미지는 더 이상 없다. 프로레슬링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중요하지 않다. 보는 사람들은 철저한 각본에 의한 스포츠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보고 재미있으면 문제가 없다. 새로운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시대를 활짝 연 것이 바로 레슬매니아다. 2023.03.3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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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의 파이트 클럽] 프로레슬링에 진심인 사람들...그들은 왜 무모한 도전을 할까

“솔직히 어떻게 발전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재밌게 놀 생각입니다.” 한때 프로레슬링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적어도 1960~70년대에는 그랬다. ‘박치기왕’ 김일이 거구의 외국 선수들을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모습에 다들 열광했다. 동시에 힘겨웠던 삶의 무게를 이겨내는 데 프로레슬링은 큰 힘이 됐다. 하지만 1980년대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프로레슬링은 빠르게 쇠퇴했다. 안 그래도 ‘레슬링 쇼’ 논란으로 큰 몸살을 겪었던 프로레슬링이었다. 야구, 축구 등 구기 스포츠 프로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국민들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김일이 2006년 지병으로 별세한 뒤 프로레슬링은 그의 수제자였던 이왕표가 2010년대까지 명맥을 이었다. 이왕표는 몰락하는 프로레슬링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2018년 담낭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한국에서 프로레슬링 시대는 저무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 프로레슬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수만 명의 팬이 모이는 으리으리한 대회를 열지는 못해도 어디에선가 선수들은 몸을 던지고 팬들은 환호를 보낸다. 지난달 30일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올스타디움이라는 곳에서 ‘AKW 더 인베이전’이라는 대회가 열렸다. AKW는 ‘전한국프로레슬링(ALL-KOREA WRESTLING)’의 약자다. 2021년 4월 공식 출범한 뒤 올해 4월 첫 대회에 이어 두 번째 대회를 개최했다. 공연기획홍보 전문가이자 열혈 레슬링 팬인 이해동(35·활동명 헤이든) 씨와 미국 출신 베테랑 프로레슬러 브라이언 레오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그냥 보더라도 대회는 초라하다. 헬스와 격투기를 겸업하는 체육관에 150~200명 정도 관중이 찾아와 경기를 관전했다. 물론 이들은 열렬한 마니아들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메이저 단체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은 열리고 있었다. 미국 WWE에서나 볼 법한 사다리나 테이블, 철제의자를 이용한 공격도 펼쳐졌다. 심지어 압정이 링 바닥에 깔린 가운데 그 위로 선수가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장면도 연출됐다. 현재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을 산업이라 표현하기 어렵다. 선수들이 프로레슬링으로 먹고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들 평소에는 본업에 열중한 뒤 틈틈이 시간을 내 프로레슬링을 연습하고 대회를 준비한다. 현재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을 제대로 훈련받고 경기를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대략 20명 정도라고 한다. 대회를 개최하고 단체를 이끄는 헤이든 대표에게 물었다. 왜 한국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프로레슬링을 하는지. 공연 기획과 연출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그냥 제가 좋아하니까 막연하게 한번 해보자 생각했죠. 그동안 연국, 뮤지컬 등을 준비하면서 프로레슬링도 잘 만들면 재밌는 콘텐츠가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되더라구요. 많지는 않지만, 어느 분야보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팬층도 있어요.” 헤이든 대표는 AKW 프로레슬링을 철저히 콘텐츠 비즈니스 측면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프로레슬링이 각본에 의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 그렇다면 아예 더 재밌게 만들어 확실한 볼거리를 주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는 WWE의 방향과도 일치한다. “저희는 프로레슬러들을 단순히 선수가 아닌 아티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우리 콘텐츠를 오프라인(경기장)은 물론 온라인(유튜브, SNS)으로도 빛내주는 아티스트입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재밌게 만들어 보여주자’라는 생각으로 함께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심지어 재밌는 콘텐츠를 위해 헤이든 대표는 자신의 실제 결혼식까지 이용했다. 결혼식이 한창 진행 중인데 악역 프로레슬러들이 방해하기 위해 난입한 것. 헤이든 대표 말에 따르면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은 물론 아내조차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다고 한다. 그 장면은 AKW 유튜브 영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내에게 허락은 받았나’라고 질문하자 헤이든 대표는 “제가 아내한테 계속 잘해야죠”라며 고개 숙였다. 아직은 초보 단계다. 여전히 프로레슬링에 대한 편견은 흥행에 큰 걸림돌이다. 미국, 일본의 메이저 단체와 비교되는 점도 부담스럽다. 그래도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조금씩 앞으로 가려고 한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거나, 큰 성공을 바라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재밌게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고 아이디어를 모으면서 조금씩 반응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제발 프로레슬링을 살려주세요’라고 부탁하지 않습니다. 대신 ‘재밌으면 팬들이 보러온다’는 믿음을 갖고 새로운 콘텐츠를 열심히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2022.11.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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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①] '박치기왕' 김일에 열광하고 양정모 첫 올림픽 금에 환호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②] '슈퍼스타' 차범근·선동열·최동원…서울올림픽 감동에 푹[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③] 스포츠 영웅들, 국민에게 희망을 안기다[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④] 2002년 '붉은 물결' 대한민국을 휩쓸다[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⑤] 김연아·이상화·손흥민…천재들의 시대가 열리다 2019.09.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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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0 특별기획]한국스포츠 50년, 슈퍼스타 50인, 환희의 50신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 <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89~1999 :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 희망을 안긴 영웅>1997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실의와 고통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안긴 스포츠 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가 곧 희망이자 위로였다. -박찬호(야구)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그는 IMF 위기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긴 영웅이었다.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1997년 14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1998년 15승을 수확하며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2000년 18승을 달성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아시아 최다승이다. 또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동메달 등을 이끌며 야구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세리(골프)IMF 위기의 시절 국민들을 위로했던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박세리다.미국 LPGA 개척자. 1998년 LPGA 무대에 뛰어들었고, 데뷔 4개월 만에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US오픈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특히 US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한 장면은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박세리의 모습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LPGA 25승으로 한국인 최다 우승자 역시 박세리다. -황영조(마라톤)'몬주익의 영웅'의 등장으로 한국 육상은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쳤다.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린 뒤 홀로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힘차게 들고 골인했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육상 첫 올림픽 금메달.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금메달 이후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이후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다시 한 번 포효했고, 1994년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당시 한국 최고 기록인 2분8초09를 기록했다. -심권호(레슬링)심권호라는 이름은 세계 최고라는 의미다.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48kg급 금메달을 목에 건 뒤 1995년 프라하세계선수권,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까지 정상을 차지했다. 48kg급이 폐지되자 54kg급으로 체중을 늘려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를 밟았다. 1998년 예블레세계선수권·1998년 방콕아시안게임·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금메달을 일궈냈다. 하계올림픽 최초 올림픽 2연패, 한국 올림픽 사상 첫 두 체급 석권 그리고 세계 레승링 최초 두 체급 그랜드슬램 달성.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기영(유도)한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는 유도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전기영이다.유도 천재, 업어치기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20세의 나이로 참가한 1993년 해밀턴세계선수권 78kg급에서 우승했다. 한국 역대 최연소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5년 지바세계선수권에서는 86kg급에 도전해 금메달을 차지, 두 체급을 석권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는 1회전을 제외하고 모두 한판승으로 이기며 정상에 섰다. 1997년 파리세계선수권에서도 1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다. -박주봉(배드민턴)배드민턴의 교과서 박주봉.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 배드민턴의 전설이었다.1980년 17세의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됐고, 1982년 덴마크오픈에서 이근구와 한 조로 역대 최연소로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1985년 캘거리세계선수권 우승·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1989년 자카르타세계선수권 금메달·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1991년 코펜하겐세계선수권 1위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6년 '배드민턴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허버트 스칠 상을 수상했다. -전이경(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라 불리는 유일한 선수, 전이경이다. 그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1988년 12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000m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석권, 2관왕에 올랐다. 이어 1995년 요빅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1996년 헤이그, 1997년 나가노까지 개인종합 3연패를 일궈냈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도 1000m와 3000m 계주를 석권하며 한국 여자 최초로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품었다. -허재(농구)농구대통령이 당선됐다. 농구 9단이라 불리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 허재다.중앙대 1학년 시절 농구대잔치에 나서 평균 24득점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어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자 기아 왕조가 구축됐다. 기아의 에이스로 농구대잔치 5연패 등 7회 우승을 일궈냈다. 3번 MVP를 수상했고, 베스트 5에 6회 포함됐다.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1990년 아르헨티나세계선수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넣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홍명보(축구)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다.그는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해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 최초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품었다. 이후 일본 J리그에서 진출하며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한국 대표팀 전설이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 최초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홍명보는 A매치 136경기 출전으로 한국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씨름)이만기를 1인자에서 내려앉히고 새로운 1인자로 등극한 괴물, 강호동이다.이만기의 은퇴는 곧 강호동이라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과 연결된다. 1989년 일양약품에 입단한 20세 강호동은 첫 백두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4강에서 이만기와 첫 공식전에서 맞붙어 2-0으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1990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천하장사에 올라섰다. 이후 백두장사 7회, 천하장사 5회를 차지했다. 최단기간 천하장하 5회라는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이 은퇴하자 씨름의 황금기도 끝났다. <1999~2009 : 불모지에서 태어난 올림픽 스타 그리고 붉은물결 2002년>불모지 한국. 그동안 한국에서 약했던 종목에서 슈퍼스타들이 등장해 행복했던 시기다. 또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박태환(수영)박태환의 등장. 한국스포츠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수영 불모지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15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따더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400m 정상에 섰다. 200m에서도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2011년 상하이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00m, 2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장미란(역도)한국 역도 역사의 새로운 신화, 장미란이 썼다.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5년 카타르세계선수권부터 2006년 산토도밍고·2007년 치앙마이·2009년 고양까지 4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역도계에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압권이었다.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 kg·용상 186 kg·합계 326kg을 기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했고, 2위와 격차가 무려 49kg이나 났다. 압도적인 우승, 압도적인 선수였다. -진종오(사격)한국은 세계최고의 권총 사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진종오가 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2연패를 달성하더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일궈냈다. 2010년 뮌헨·2014년 그라나다·2018년 창원 등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로 김수녕과 함께 역대 한국인 올림픽 최다 메달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승민(탁구)한국 탁구의 마지막 자존심, 유승민이다.2000년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승민은 2004년 이집트오픈에서 우승하며 기대를 받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 금메달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등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의 간판 역할을 했다. 유승민 이후 한국은 단 한 번도 올림픽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승엽(야구)국민타자. 이승엽이 아니면 붙을 수 없는 이름이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홈런왕. 1999년 54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한국 역대 최다인 56홈런을 때렸다. KBO 통산 465개의 홈런으로 역대 1위에 오른 이도 이승엽이다. 타점(1495점) 득점(1351점) 등도 1위다. 홈런왕 5회·MVP 5회·타점왕 4회·골든글러브 10회 등 기록이 이승엽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기도 하다. -안현수(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가 전이경이라면 황제는 안현수다.많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선 경험이 있지만 안현수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선수. 16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3년 바르샤바부터 2004년 예테보리·2005년 베이징·2006년 미니애폴리스·2007년 밀라노까지 세계 최초로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1000m·1500m·5000m 계주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500m 동메달도 추가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메달 신기록이다. -김세진(배구)한국 배구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스타, 김세진이다.1995년 실업배구 삼성화재의 창단멤버로 합류해 삼성화재 왕조를 이끈 스타였다. 김세진이 활약하던 시기 배구는 폭발적 인기를 받았다. 김세진을 앞세운 삼성화재는 리그 9연패를 일궈냈다. 배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2001년 창원아시아배구선수권과 2003년 톈진아시아배구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 월드리그에서 베스트 6에 오르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장훈(농구)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빅맨, 단연 서장훈이다.1994년 연세대를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 때부터 그는 국보급 센터였다. 공격과 수비 외곽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 1998년 청주SK 입단 후 서울 삼성·전주 KCC·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다. 1999년 리바운드 상 수상. 프로농구 사상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왕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프로통산 1만3231득점·5235리바운드 기록, 역대 1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이 이끄는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경주(골프)한국 남자 골프의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 최경주다.1999년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PGA투어 자격을 획득했다.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뉴올리언즈 콤팩 클래식에서 한국 첫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2승을 챙겼다. 이후 AT&T 내셔널 등 PGA에서 6회 우승을 더 차지하며 통산 8회 우승을 기록했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잡초 골퍼라 불리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한국 골프의 자존심을 높인 영웅이다. -박지성(축구)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환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그 중심에는 두개의 심장을 가진 박지성이 있었다.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을 꺾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성적인 4강에 진출했다. 거리는 붉은물결르 뒤덮혔고, 선수들은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중 핵심은 박지성. 그는 2005년 잉글랜드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 최초의 잉글랜드 진출. 이때부터 맨유는 국민클럽이 됐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리그 우승 4회 등 총 13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했다. <2009~2019 : 동계스포츠의 비상 그리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과거 한국의 동계스포츠는 쇼트트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종목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프로스포츠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연아(피겨)한국 동계스포츠의 역사는 김연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눌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김연아가 나온 건 기적이다.김연아는 한국을 넘어 세계 피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하이라이트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김연아는 쇼트 78.50점, 프리 150.06점 총합 228.56점으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올림픽·세계선수권·4대륙 선수권·그랑프리 파이널 등을 모두 제패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역사에 기록됐다. 11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상화(스피드스케이팅)'빙속여제' 이상화를 빼놓고 한국 동계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2010년 밴쿠버올림픽 여자 500m에서 76초09로 우승, 한국 여자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74초70, 올림픽 신기록으로 2연패에 성공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3개 대회 연속 메달을 딴 선수로 남았다. 2013년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나온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윤성빈(스켈레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썰매 종목 금메달을 딴 주인공, 윤성빈이다.한국 스켈레톤의 간판인 그는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1∼4차 레이스에서 무려 3차례나 트랙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1∼4차 합계 3분20초55로 정상을 차지했다. 한국과 아시아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켈레톤 불모지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윤성빈. 그의 헬멧에 그려진 아이언맨처럼 그는 한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다. -양학선(체조)한국 체조의 새로운 역사, 도마의 신이 창조했다. 양학선이다.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2011년 도쿄세계선수권 우승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양학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신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구에서 단 한 명만 할 수 있는 최고난위도 기술 '양학선'을 앞세워 도마 금메달을 차지했다. 16.533점. 압도적 우승이었다. 한국 체조 역사상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2013년 앤트워프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황경선(태권도)태권도 종주국 한국. 수많은 선수가 세계 정상에 섰다. 그중 가장 많은 최초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이는 '태권여제' 황경선이다.18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67kg에 나서 동메달을 차지한 그는 2005년 마드리드세계선수권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그리고 2007년 베이징세계선수권까지 재패한다. 남은 건 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멈추지 않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태권도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최초의 올림픽 3회 연속 진출을 일궈냈다. -박인비(골프)미국 LPGA에는 한국 여성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 최선봉에 자리를 잡은 스타, 박인비다.골프 여제의 2008년 US오픈 우승. 박세리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깨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US오픈 총 2회 우승 등 메이저대회에서 7회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최고 기록이다. LPGA 통산 19승으로 박세리에 이은 2위다. 56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유지했고, 4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아시아 최초로 달성하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 역시 박인비 품에 안겼다. -정현(테니스)2018년 1월, 한국에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그 바람은 정현이 일으켰다.정현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2018년 호주오픈 1~3라운드에서 미샤 즈베레프·다닐 메드베데프·알렉산더 즈베레프를 연이어 꺾으며 기대를 받았다. 16강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노박 조코비치.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 한국에 정현 신드롬이 일어났다.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마저 넘으며 4강에 올라섰다. 4강에서 로저 페더러를 만나 부상으로 기권했다. -김연경(배구)한국 여자배구에 이렇게 독보적인 선수는 없었다. 김연경이다.흥국생명에 입단한 2005년. 득점상·공격상·서브상·신인왕·정규리그 MVP·챔피언결정전 MVP까지 싹쓸이한다.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인 지 알 수 있는 기록. 이후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올랐다. 2009년 일본 JT마베라스 유니폼을 입은 뒤 2011년 터키 페네르바체로 이적했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다. 가는 팀마다 우승으로 이끌면서 가치는 올라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배구대표팀에서도 기둥이었다. -류현진(야구)21세기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류현진이다.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자마자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석권한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가 됐다.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로 이적한 첫해 14승 올리며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후 꾸준함을 보이다 2019년 평균자책점 전체 1위를 기록, 올스타전 선발로 나서는 등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야구대표팀 역사와도 함께 했다. -손흥민(축구)지금 한국 축구는 '손흥민의 시대'다.2010년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레버쿠젠을 지나 201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세계 톱클래스 공격수로 거듭났다. 특히 2018~20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우승후보 맨체스터 시티를 침몰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손흥민을 앞세운 토트넘은 최초로 결승에 올랐다. 축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주인공.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2019.09.23 06:00
스포츠일반

메인 이벤트 6시간 전부터 줄서기… 1만1000명 넘는 구름 관중

싱가포르 기반 종합격투기 원 FC(원챔피언십) 사상 첫 일본 대회에 만원 관중이 몰렸다. 원 챔피언십은 31일 일본 도쿄의 국기관에서 '원: 새로운 시대(a new era) 대회(JTBC3 FOX Sports 중계)'를 개최했다. 이날 국기관 앞에는 메인 이벤트 시작 6시간 전부터 구름떼 관중이 몰려 입장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오후 12시30분부터 이미 수백여 명이 줄지어 기다리기 시작했고, 오후 2시가 지나면서 그 수는 수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메인 이벤트 시작 시간은 오후 6시30분, 메인 이벤트 제외 사전 경기 오후 3시30분이었다. 오후 4시가 넘어가면서 암표상까지 등장했다. 원 챔피언십 관계자는 "역사적인 일본 대회가 예상보다 훨씬 더 뜨거운 관심"이라면서 "일본 격투기 팬 1만1000명 이상이 경기장을 찾았다. 입장권은 일찌감치 매진됐다"라고 밝혔다. 원 챔피언십에게 일본 대회 흥행은 의미가 있다. 이번 대회는 원 챔피언십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이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달 28일 열린 대회 공식 기자회견에는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약 200여 명의 취재진이 몰려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대회 장소인 국기관에서 대회를 연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1985년 개장한 국기관은 일본의 전통 씨름인 '스모의 성지'다. 국기관은 스모 대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는 프로레슬링과 격투기 대회, 콘서트 등이 치러지기는 있지만, 외국 격투기 대회를 위해 개방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원 챔피언십의 인기에는 화려한 면면의 메인 이벤트 출전자들이 있다. 미국 UFC 플라이급 챔피언 출신 드미트리어스 존슨, UFC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에디 알바레즈(이상 미국)가 나란히 대회 데뷔전을 치렀다. 메인 이벤트 7경기 중 4경기를 타이틀전으로 구성하는 승부수도 걸었다. 여기에 지난해 12월 UFC를 떠나 원챔피언십과 계약한 추성훈(일본이름 아키야마 요시히로)도 참석해 경기를 지켜봤다. 원 챔피언십 관계자는 "대회명을 '새로운 시대'로 정했지만, 의미는 단순히 이번 대회에 국한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더 적극적인 투자와 마케팅으로 세계로 진출하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쿄=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2019.04.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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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서울 에듀테크 밋업 시즌2서 자란다 장서정, 맥킨리&라이스 석승현, 케이엠에스 김정하 강연

스타트업 관계자들의 정보 교환 및 네트워크 구축의 장 ‘캠퍼스서울 에듀테크 밋업’이 지난 9일 오후 7시 서울특별시 강남구 영동대로 오토웨이타워 캠퍼스서울 (구글에서 만든 스타트업 공간) 지하 2층 메인 이벤트홀에서 열렸다. 에듀테크 컨퍼런스가 주최한 이번 밋업은 ‘장서정’ 대표와 ‘석승현’ 이사, 케이엠에스 김정하 대표가 연사로 초청되었다. 캠퍼스서울 에듀테크 밋업 사회로는MC 김주원이 진행했다. 사회자 김주원은 강연 소개 및 연사와의 질의응답, 참석자 엘리베이터 스피치 및 자유로운 네트워킹 시간을 능숙하게 이끌며 강연자와 참석자 간 원활한 소통을 이끌어냈다. 베테랑 MC김주원은 지역축제 및 체육대회, 대학교 축제, 시상식, 전야제 등 다수의 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 아나운서, 개그맨, 각종 이벤트 MC와 의전, 모델, 가수, 버스킹 밴드, 공연팀 등 행사 필수인력 공급 에이전시업무를 하고있다. 또한 대형 박람회퍼레이드,기업 행사, 체육대회 등 기획과 대행 업무도 병행 중이다. 팟캐스트 라디오인 잡쇼의 메인MC, 사회자로 채널을 운영 중이며, 프로레슬링 장내 아나운서로 활동 중인 김주원은 라디오 방송 게스트 유명 드라마에도 다수 출연하며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 첫 강연자 장서정 대표는 아이 돌봄 및 교육매칭 플랫폼 ‘자란다’를 소개하며 2017년 5월 정식 출시 후 누적 방문 교육 3만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게 된 경험을 공유하고 설명했다. 앞으로 ‘자란다’는 직장여성이 육아와 일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받는 보육 절벽 해소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주)케이엠에스 김정하대표는 수학과 과학 융합교육 교구재 개발사업을 소개했다. 케이엠에스는 전기전자회로 학습용 장치 개발을 통해 국내 대학이나 연구소진출로 매출을 올리는 한편, 해외수출도 꾀하는 스타트업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위한 창의융합형 인재 육성을 위한 에듀 테크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과 인도, 한국 간 개발자 인력풀을 구축한 스타트업 ‘맥킨리&라이스’ 석승현 (한국 총괄 CMO) 이사는 초기 스타트업과 개발자 사이의 발생하는 여러 문제점과 이에 대한 해결방법 모색을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스타트업과 개발자 간 깊이 있는 사업 철학과 긴밀한 소통이 필요함을 언급하며 명확한 비즈니스모델 구축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평소 에듀테크에 관심있는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찾은 가운데 진행된 ‘캠퍼스서울 에듀테크 밋업’은 한상혁 (하이노마드), 김정하(주 케이엠에스), 강다은 (예술혁신연구소), 최완택(해피스마일) 대표가 주최했으며 GCC Inc. (지씨씨 아이엔씨)의 후원을 받고 있다.GCC Inc.(지씨씨 아이엔씨) 황수현 회장은 “미래를 이끌 젊은 스타트업의 노력이 인상깊다”며 “앞으로도 혁신적인 스타트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에듀테크 밋업은 캠퍼스서울과 에듀테크 컨퍼런스의 한상혁 (하이노마드), 김정하 (케이엠에스), 강다은 (예술혁신연구소), 최완택 (해피스마일) 대표가 주최하며 매 월 다채로운 강연이 진행 되고 있다. 이승한기자 2018.11.16 18:16
스포츠일반

1세대 격투기 키드, 로드FC 수장 됐다...김대환 대표 인터뷰

"아직 적응 기간입니다. 배우고 알아야 할 것들이 생각보다 무척 많네요. 하하"해설자에서 국내 최대 격투기단체 로드FC 수장으로 변신한 김대환 대표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최근 서울 논현동 로드FC 체육관에서 만난 김 대표는 멀리서 봐도 격투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왼쪽으로 휜 콧등 때문이다. "코가 정확히 6번 부러졌어요. 처음엔 콧대를 바로 세우려 했는데, 자주 다치다보니 아무리 세워도 함몰되더라고요. 익숙해진 거죠. (웃음)"올해부터 로드FC 대표직을 수행 중인 그는 취임 후 첫 해외 대회 참석을 앞두고 있다. 로드FC는 12일 중국 베이징에서 샤오미 로드FC 047 대회를 연다. 무제한급 8강 네 경기가 가장 관심을 모으는 경기다. 김 대표는 "처음이라 떨린다"면서도 "대표직을 맡으면서도 어려움을 겪을텐데, 여러 번 경험하면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세대 격투기 키드김대환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주한미군 방송인 AFKN에서 프로복싱과 미국프로레슬링(WWE) 중계를 보고서 격투기에 빠졌다. 당시엔 보기 드물었던 1세대 격투기 키드였던 셈이다. "지금은 전설인 된 타이슨과 헐크 호건의 화려한 경기를 보면서 단번에 빠져들었어요. 그때는 편성표라는 것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매주 토요일 무작정 TV 앞에 앉아 호건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낮엔 어린이 신문·잡지를 뒤져 가면서 '타이슨 주먹이 몇 톤이고, 목둘레는 몇 cm'라는 기사를 스크랩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죠."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170cm·70kg였던 그는 TV로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본격적인 격투기 배우기에 나섰다. 중2 때 합기도 체육관을 처음 찾아간 것을 시작으로 유도·킥복싱·종합격투기 등 다양한 격투기를 섭렵했다. 그는 "운동을 배우러 체육관을 다니면서 왜소한 체형을 가진 격투기의 고수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운동을 하면서 겸손한 마음도 배웠다. 또래보다 덩치가 컸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친구들에게 싸움을 걸지는 않았다"고 말했다.격투기에 빠져살았지만,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전 충남고 시절 내내 시험 점수가 5등 안에 든 그는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말그대로 낮엔 격투기 배우고 밤엔 공부하는 '주격야독'이었습니다. 건설회사를 다녔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이공계 학과를 염두해두고 공부를 했는데, 적성과 잘 맞지 않았거든요. 문과로 바꾸고 3수 끝에 대학 문턱을 밟았습니다." ◇인기 해설자, 영어 인터뷰 하고 펀치도 날렸다그는 대학 시절 전공보다 영어 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외국인 교수의 영어 강의만 골라서 들었다. 영어로 레포트를 작성하느라 매번 수일간 낑낑대기 일쑤였다. "1학년 때 맞았던 학사 경고를 두 차례가 제대 후엔 뼈 아프게 돌아왔어요. 이런 가운데 영어 하나는 잘 하고 싶었더라고요. 그래서 원어민 수준의 실력을 가져야 따라갈 수 있는 강의에 도전했습니다. 3년간 목숨을 걸고 영어만 판 셈이죠. 덕분에 비싼 돈 들여 미국 유학을 다녀온 효과를 거뒀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두 번 다신 못할 짓이죠.(웃음)"2003년은 김대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의경 복무 제대 직후 한 케이블 방송의 격투기 해설자 공개 오디션에서 합격했다. 시행착오를 거친 김대환은 단기간에 인기 해설자 반열에 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쌓은 해박한 지식은 격투팬들의 호평을 받았다. 대학 시절 공부한 영어도 도움이 됐다. 중계방송 중 외국 선수들의 인터뷰를 동시 통역하는 김대환이 유일했다. 당시 국내에서 격투기의 인기는 대단했다.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을 선봉으로 격투기는 탄탄한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김대환은 용돈벌이로 시작한 해설을 직업으로 삼았다. 그는 "격투기 인기가 워낙 좋다보니 중계도 10년간은 안정적으로 될 것 같았다. 원래는 대기업 입사가 목표였다. 그런데 고민 끝에 제일 좋아하는 일을 선택했다"고 했다.그러나 격투기 전성시대는 금세 저물었다. 방송사들이 차례로 중계를 포기하면서 김대환을 찾는 곳도 줄어들었다. "시한부 인생처럼 사니까 불면증에 걸렸습니다. 수입이 없다보니 대학생 때처럼 번역 아르바이트 하고 대치동 학원가에서 영어 강사로도 일했어요. 격투기 중계가 다시 안정기 접어들기까지 몇 년간은 그렇게 버텼는데, 그땐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습니다." 심도있는 해설을 위해 2012년엔 체육관을 차렸고, 1년 뒤엔 직접 링에 오르기도 했다. 김대환은 10전의 파이터다. 2013년 영국 이스트코스트파이트팩토리(ECFF)가 주최한 대회에서 데뷔전을 치른 뒤 9승1패를 기록 중이다. 그는 "해설자 관점에서 보면 운동신경이 특출한 것도 아니고 경기가 화려하지도 않다. 참 재미없게 경기를 풀어가는 선수"라면서도 "그래도 펀치 한 방은 있다. 지독한 노력파"라고 자평했다. ◇로드FC 수장, 격투기 대중화 꿈꾼다김대환은 올해부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정문홍 전 대표의 부탁으로 국내 최대 격투기 단체 로드FC의 대표직을 맡았다. 정 대표는 오랜 해설자 생활로 다져진 격투기계에 대한 이해도, 직접 파이터로 나설 만큼 넘치는 열정 그리고 유창한 영어 실력까지 갖춘 스펙을 높게 평가했다. 대표직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정중하게 거절했다. "정 대표님이 저를 처음 부른 건 3년 전이었어요. 후임이 돼 달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너무 놀라서 손만 가로지었죠.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까'라고 생각했거든요. 현재 잘 하고 있는 해설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고요."그러던 중 정 대표의 말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난 15년간 격투기를 통해 받은 사랑 격투기로 보답하라'고 하셨어요. 생각해보니 백번 맞는 말씀이더라고요. 더 이상은 거절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수락했습니다." 김대환 대표는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여러가지 있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하나만 꼽아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답했다."격투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격투기를 직접 즐기고 재밌게 보는 시대가 왔으면 합니다."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2018.05.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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