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봄은 아무래도 조금 늦다. 그래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다. 지난 겨울 산문 출입을 자제하면서 수행에 정진하는 사이 숨죽이고 있던 대지는 살며시 새 생명을 잉태했다. 그리고 많은 봄의 전령들이 스쳐지나간 지금에야 생명을 세상 밖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산사의 봄 역시 남쪽에서 출발했다. 때문에 요즘 남도 사찰의 봄 풍경이 볼 만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지금 전북 부안 내소사와 고창 선운사만큼 향기를 진하게 내뿜는 곳은 흔하지 않다. 내소사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벚꽃이 한창이고, 선운사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동백이 살포시 꽃망울을 내밀고 있다.
400m 전나무 숲 지나 하얀 벚꽃 천국 `딴 세상`
■ 꽃비 휘날리는 내소사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언제일까. 대지의 정기를 흠뻑 받고 활짝 만개한 때, 또는 향기를 내뿜기 위해 봉오리를 살포시 내미는 모습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할 일`을 다하고 생명을 내준 대지로 돌아가는 순간이 아닐까.
지금 내소사는 벚꽃이 한창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일부는 꽃잎을 떨구고 푸른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아직 순백의 향연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주말이면 모두 푸른 옷으로 갈아입을 듯싶다.
천년 고찰 내소사 가는 길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일주문 앞 상가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다. 약 50m에 이르는 상가의 모든 상점에서는 길가에 좌판을 깐 채 전어를 굽고 있었다. 이 냄새가 바람을 타고 신성한 도량까지 미치지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다.
이 같은 우려는 매표소를 겸한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로 접어들 때까지 계속됐다. 다행히 조금 걷자 전어 굽는 냄새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전나무가 뿜어내는 상큼한 공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이 길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수령 100년 안팎의 전나무가 약 400m에 걸쳐 뻗어 있는데 아기자기한 모습이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길의 웅장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시원한 삼림욕을 즐기는 전나무길이 끝나면 시야가 확 트인다. 사천왕문으로 통하는 길 양편에는 벚나무가 단풍나무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채 하얀 꽃잎을 사방으로 흩날리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절반은 솜뭉치 같은 꽃잎을 붙들고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사이 나머지 절반은 푸른 잎이 나뭇가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한 비경은 경내에 숨어 있었다. 천왕문을 지나 수령 1000년이 됐다는 당산목을 지나자 별유천지가 펼쳐진다. 아름드리 벚나무가 새하얀 꽃잎으로 시야를 점령했다. 몇 그루 되지 않지만 홍매화.목련 등과 어울리면서도 각기 영역을 확보한 채 뽐내는 자태에 절 뒤 능가산의 기암괴석과 장중한 대웅보전이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진작가들은 렌즈를 들이대기 바쁘다. 일반 관람객도 뒤질새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정신이 없다. 대웅보전 처마에 매달린 풍경마저 그 아름다움에 넋이 빠진 듯 소리마저 죽인 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여행메모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서해안고속도로 줄포IC에서 나오면 내소사로 향하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약 20분 소요. 버스는 부안에서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30분~1시간 간격으로 출발한다. 약 40분 소요.
500년 된 동백 3000그루 꽃망울 툭툭
■ 새색시 붉은 입술 닮은 선운사 동백은 한겨울 추위를 이겨낸 채 가장 먼저 꽃을 피워 내기 때문에 봄의 전령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하지만 꽃의 자태는 벚꽃처럼 화려하지도, 요즈음 꽃망울을 터뜨린 라일락처럼 강렬한 향기를 뿜어내지도 않아 이름만큼 대우받지는 못한다.
오히려 처연함의 상징에 가깝다. 눈물나도록 붉디붉은 꽃을 남 몰래 피운 다음 꽃잎이 시들기도 전 꽃봉오리 전체를 떨어뜨려 발 밑을 붉게 물들이기 때문이다. 모란이 뚝뚝 떨어지는 날 봄을 여읜 슬픔에 잠긴다고 노래했지만 오히려 동백이 지고 나면 계절이 끝나는 것은 아닌지.
가장 나중에 피는 선운사 동백. 남녘을 출발한 붉은 여행은 여기서 가을을 기약한다. 이제 여름의 길목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미당 서정주는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리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라고 선운사 동백을 노래했다. 실제 선운사에 가면 동백이 부끄러운 듯 짙은 녹색의 잎 사이로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5000여 평에 터전을 마련한 선운사 동백의 평균 수령은 약 500년이다. 대웅전 뒤로 6m 높이의 동백나무 3000여 그루가 매년 4월 말이면 절집을 온통 태울 듯 붉은색으로 장관을 이룬다. 바로 이번 주말부터다.
▲ 여행 메모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IC에서 나와 약 13㎞ 가면 된다. 버스를 이용하면 고창에서 직행버스를 이용(약 30분 소요)하고, 열차 편이라면 정읍역에서 하루 4회 있는 직행버스 편이 있다. 약 50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