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53>
늘 말하지만 스승 역도산은 내 인생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의 삶 절반은 스승 거나 다름없다. 스승을 그림자처럼 모셨던 난 스승의 사생활과 성격 그리고 스승이 추구했던 이상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1963년 12월 스승이 타계한 후 스승과 조금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은 저마다 스승에 대해 평가를 달리했다. 자고로 영웅이 가면 그럴 수 있다지만 출판·언론 보도·그리고 영화 등은 스승에 대한 왜곡과 억지 해석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난 스승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승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젠 스승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과 스승의 사상과 철학을 밝히고 싶다.
1923년 함경남도 출신인 스승은 1940년 관부연락선을 타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17세는 요즘 같으면 고등학생으로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학교와 학원을 다닐 나이다. 스승은 그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원대한 꿈을 품었다.
스승에 대해 얘기할 때면 "왜 조선인이면서 이를 숨기고 살았는지"라는 물음이 나오곤 한다. 난 그런 사람들에게 "만약 당신이 그때 일본에 살았다면 그런 말이 나오겠는가" 반문한다. 그렇다고 내가 스승이 국적을 숨기고 산 것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는 말이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은 겪어 보지 못했던 사람은 모른다. 그때 당시 일본은 재일 한국인에게 어떠한 나라였을까. 국교도 수립되지 않아 한국과 왕래조차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김치 냄새를 무척이나 싫어한 일본인들이 한국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기묘한 눈으로 쳐다보던 시대다.
스승에 대해 너무 세세하게 밝히면 자칫 스승 삶의 이야기로 흐를 수 있기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말하지 않겠다. 다만 중요한 것은 스승은 그런 차별과 역경을 딛고 일본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스승은 명예만 움켜쥔 것이 아니다. 부까지 욕심냈다. 스승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1961년 리키 스포츠 팰리스 오픈은 그런 점에서 스승이 일본에서 성공시대를 연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레슬러로서, 프로모터로서, 그리고 사업가였던 스승은 동경 아카사카에 호화스런 리키아파트와 수영장이 달린 리키맨션도 보유했다. 당시만 해도 맨션이란 말이 전혀 생소한 시절이었다.
가나가와현 아브라츠보항에 요트 항만, 사가미 호반에 골프장과 레저랜드의 계획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 프로레슬링협회를 창설해 이끌었던 스승은 리키 복싱 클럽의 회장을 겸임했으며, 리키 스포츠·리키엔터프라이즈·리키 관광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하코네와 미우라 반도에 광대한 토지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미에도 10만 평의 토지를 가진 대지주였다. 시대를 앞서 가는 실업가였다. 당시 대스타이자 영웅이었던 스승은 천하무적이었다.
스승이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남녀노소가 없었다. 고급 술집과 카바레에 들어가면 여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와" 하며 스승이 있는 곳으로 몰려든다. 심지어 남자 친구와 함께 온 여자들도 스승에게 흥미를 보이며 손을 내민다. 그럴 때면 남자 친구는 "역도산이 뭔데"라며 괜한 화풀이를 스승에게 한다.
이는 남자들의 질투심이다. 그중에서 힘 좋고 과시욕이 강한 사내들은 일부러 스승에게 시비를 건다. 스승은 힘 좋은 사내들의 시비 대상이었다. 당대의 영웅 역도산 앞에서 어깨를 벌리고 큰소리 한 번 치고 싶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다음날 친구들에게 입에 거품을 물고 사실을 왜곡시켰다는 점이다. "나와 역도산이 술집에서 어깨를 부딪쳤는데 내가 '너(역도산) 사과해' 했더니 역도산이 '미안합니다'며 싹싹 빌더라"라고 확대 과장한다. 특히 야쿠자들은 더했다. <계속>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