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선생. 내 이야기 다 들으려면 3박 4일 가지고 모자라. 낚시만 가지고도 2박 3일은 이야기할 수 있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뜨듯하게 데운 정종 한 컵을 들이킨 이덕화(54)는 연신 성이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날(20일)의 만남에 할애한 시간이 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며칠 전 사전 미팅까지 가졌건만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라고 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그에게는 부족한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화끈한 사나이였다. 지면에 들어갈 옛 사진을 부탁했더니 탱크같이 두툼한 옛 앨범 세 권을 통째로 신문사에 보내왔다. 얼마나 열정적인가? 몇 장의 사진을 들고 나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낡은 앨범들 속에선 54년에 걸친 그의 삶이 개성파 배우로 유명한 아버지 이예춘. 중학교 시절의 자살 기도. 하이틴 영화의 스타. 3년의 청춘을 앗아간 오토바이 사고. 드라마 <사랑과 야망> 의 주인공. 모스크바 영화제 남우 주연상. 낚시광. 정치와의 인연을 계기로 8년에 걸친 연예계 공백 등 크고 작은 사건과 맞물리며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최근엔 탤런트로서 용광로와 같은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요즘 매일 TV에 등장한다. 현재 KBS 2TV 시트콤 <웃는 얼굴로 돌아보라> (월~금)에서 아내와 사별한 동네 개인 병원 의사로. KBS 1TV <대조영> (토·일)에서 당나라 장수 설인귀로 동시에 주인공을 맡고 있다.
지난해 MBC TV <제5공화국> 에 이어 연속 주인공 퍼레이드다.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지난달 <대조영> 촬영장에서 녹화 중 이빨 네 개가 부러지고 왼팔과 코뼈에 금이 가는 대형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다음날 스케줄 뺄 테니 또 보자. 그런데 술 없이 어떻게 이야기하겠나”는 열정을 맞이한 기자의 취재 수첩에는 한 인간의 일생을 담은 검은 글씨가 어지러이 흩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팔 부러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야기의 첫 주제는 최근의 대형 사고였다. <대조영> 을 찍으며 땅바닥에 거꾸로 쳐박혀 전치 8주 진단을 받았다. 1970년대 중반 오토바이 사고로 3년 동안 누웠던 이래 최대 사고라 할까. 그는 옥수수 알갱이처럼 후두두 떨어져 나간 한가운데 아랫니 네 개의 자리에 박힌 의치를 보여 주었다. 바로 옆에서 흔들리고 있는 송곳니 하나도 조만간 뽑아야 것처럼 보인다.
“사람 사는데 엔딩 장면 따로 있나? 연극으로 치면 마지막 장이다. 잘해 보려다가 개망신당한 것”이라며 그는 그날의 사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배역은 대조영 맞은편에 있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 거란족 출신으로 일자무식이지만 불타는 충성심으로 당 태종 이세민의 오른팔이 된다. 사고 당일 촬영분은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의 철궁에 황제기가 쓰러지면서 당 태종이 얼굴에 부상을 입자 설인귀가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당 태종을 구하기 위해 마차로 뛰어드는 장면이었다.
“설인귀도 내 맘에 안 찬다. 대본 읽으면서 주인공(대조영) 배역을 보고 있다”라고 할 정도로 의욕에 불탄 그는 설인귀의 캐릭터라면 말 위에서 바로 황제의 마차로 날아들 거라고 생각하고 PD에게 그 연출을 종용했다. “감독. 내 오늘 한 번 보여 줄게”라고 큰소리치고 촬영 당일 아침부터 몇 차례 사전 답사를 했다. 말 위에서 점프해 황제 마차 위의 각목을 잡고 체조하듯 안으로 뛰어들면 됐다.
문제는 각목이었다. 65㎏의 몸무게가 순간적으로 압력을 가하자 각목은 나무 연필처럼 부러졌다. 3~4m 높이에서 머리부터 땅으로 떨어졌다.
“속수무책이었다. 사고가 그렇게 나도 얼굴은 안 다쳤었는데. 코피가 펑펑 났다. 그나마 땅이 잔디인 것이 다행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다. 이 사고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오랜 연예계 공백(1993년~2000년) 끝에 복귀한 그의 마음 자세를 잘 보여 준다. 그는 “팔 하나 부러진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몸이 부서져도 좋다. 나름대로 반세기 연기 내공을 가지고 있다. 무사가 칼 무뎌졌다고 정육점 주인은 안 한다. 크든 작든 배역을 맡으면 전력투구한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아버지의 뒷모습에 눈물 펑펑
정종을 들이킨 그는 아버지 이예춘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했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두 번 봤다. 명절에 가끔 한 번 보고. 옛날 배우들의 삶이 그랬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애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의 성격은 아버지의 것처럼 불 같다. 에피소드 하나. 서울사대부중에서 서울사대부고로 진학에 실패한 그는 자신을 집·학교·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꼈다. ‘화끈하게 죽어야지’라고 마음먹고 새벽 4시에 목욕탕에서 배갈(고량주) 네 병을 한 대접에 부어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물 한모금 마시니 머리가 핑 돌았다. 칼로 왼쪽 손목을 마구 그었다.
“깨어 보니 살아 있었다. 동맥을 가르고 뜨듯한 물에 담가야 하는데 그걸 몰랐다.”
호통 한 방에 담 넘어 도망갈 정도로 무서웠던 아버지였건만 나이가 들면서 끈끈한 낚시 친구가 되었다. 말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아버지(77년 사망)는 파로호로 들어가 요양차 낚시로 여생을 보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가 싼 도시락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배를 타고 ‘9만리 길’이었다. 내가 토요일 밤에 찾아뵙는다고 하면 그 반신불수 양반이 수요일부터 면도하고. 흰머리 치고. 모시 적삼에 풀 말리고. 흰 고무신을 닦고. 흰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맨 채 떡밥까지 개어 놓고 낚시터를 반질반질하게 만들어 놓았다. 내가 가면 낚시터에 꼭 신선처럼 앉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나를 보면 꼭 한마디만 했다. ‘그래. 애썼다. 집에 별일 없지. 건너가 낚시 해라.’ 새벽이면 물안개가 떴다. 그러면 저기서 삐걱삐걱 배 젓는 소리가 났다. 그때도 한마디였다. ‘좀 나오냐?’ 아들에게 커피 한 잔 주려고 배를 몰고 나왔다. 몸 왼쪽이 안 좋으니 배가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는데. 아버지의 배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펑펑 울었다.”
■정치계에 연루된 일 아쉬워
그는 93년부터 2000년까지 연예계 활동을 거의 못했다. 배우로서 황금 같은 40대 나이의 대부분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 시기의 전반부는 대통령 선거전 지원과 국회의원 출마 등으로 보냈고. 그 나머지 시기는 차기 정권의 미움을 받아 출연을 전혀 못한 채 낚시로 소일했다. “그 시기가 제일 아쉽다. 연예인으로서 내 시간이 없어졌다.”
그가 정치계에 연루된 것은 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LA 흑인 폭동이 일어나면서 우연히 이주일·코리아나와 함께 LA 공연을 갔다. 공연을 하고 있는데 웬 여자가 찾아왔다. 초등학교 동창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큰딸이었다. 아버지가 야당 총재니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갔다. 서울에서 우연히 통화했다가 김 전 대통령의 캠프에 얽매이는 처지가 됐다.
“정치는 모르지만 내 성격이 그렇다. 그냥 친구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도와 주게 됐다. 친구 아버지니까 조건 없이.”
화끈한 성격의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유세에 앞장섰다. 차와 비행기를 타고 유세장 일흔 군데 이상을 돌았다. 이덕화와 코리아나는 유세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두고두고 김 전 대통령의 정적들에게 공격당했다. 해 준 만큼 상대방에게 욕 먹었다. 그 타격이 엄청났다. ‘저 자식. 정치인인데’라는 꼬리표가 붙으면서 2000년까지 내 연예계 생활이 없어졌다.”
95년도 신한국당 지구당 위원장으로 광명시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게 결정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자네. 나가게’하고 한마디하고 사라지는데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6개월 동안 별짓 다했다. 선거에서 떨어지고 돈도 다 까먹었다. 아무 보상도 없고. 그후 몇 년 동안 전국의 낚시터를 떠돌며 ‘수업료는 어디서 찾나?’라고 생각했다.
그거야 나중에 벌어도 되지만 연예계에서 최고로 지낼 10년이 날아갔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지금쯤 후배들 양성하고. 양로원 하나 지어 주고 해야 할 시점인데.”
천신만고 끝에 연예계로 복귀한 그는 삶의 깨달음을 들려주었다. “여러 가지로 지금이 좋다. 행복하다. 이미 여러 번 죽은 몸. 더 이상 두려운 것도 없다. 배우로서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사랑스럽다. 내가 죽어 있을 때 도와 준 평범한 사람들이 많다. 이덕화 걱정해 주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다.”
■아이들 꼭 배우로 만들고 말겠다
그는 큰 아들 태희(27)와 딸 지현(22)을 연예인으로 만드려고 한다. 딸의 경우 연예계에 모습을 비추었지만 내공을 쌓을 수 있도록 천천히 수업을 시키고 있다.
“저놈들이 뭘 전공하든 둘 다 연예인 시키려 한다. 배우 3세가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지금의 연예인은 배운 것도 많고 머리도 비상해야 한다. 둘 다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아들은 지금 당장 연기를 해도 잘할 녀석이다. 문제는 그 애가 공부는 잘하는데 키가 작다. 키 작은 배우는 안 통한다. 그래서 고민이다.”
아들이 지금 딴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언젠가 아들을 연예인으로 만들기 위해 작품 제작이라도 직접 하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다.
딸의 경우 완전히 익힐 때까지 기다리도록 했다. “어쭙잖한 것은 시키지 않으려 한다. 시작이 좋아야 한다.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조급해 하면 이렇게 말해 준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이주일은 마흔에 데뷔했어’라고. 열심히 공부해 준 애들이 고마울 뿐이다.”
▲ 1. 52년 동대문구 보문동에서 찍은 백일 사진. 갓난아이 사진으로 유일이다. “피난 시절이니까 사진이 있다는 것만 해도 기가 막히다”라고 말했다. 2. 다섯 살 무렵 아버지(이예춘)·어머니(강원숙)와 함께했다. 재미있는 것은 50년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컬러라는 점. 당시 사진관에서 흑백 사진에다 컬러처럼 칠해 주었다. 이덕화는 아버지와 악극을 같이 한 어머니가 동네에서 파마를 처음으로 해서 외할버지에게 내쫓긴 일화를 이야기하며 웃었다. 3. 국산 공기총이 처음 나온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용인으로 사냥을 나갔다. 한 번에 참새 수십 마리씩 잡곤 했다. 4. 영화 <진짜 진짜 잊지마> 시리즈 1편(73년). 당시 중학교 3학년쯤 된 임혜진과 처음으로 함께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덕화는 이 작품을 계기로 임혜진과 20여 편의 하이틴 영화를 찍었고. 방송국 엑스트라에서 일약 영화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상대역이 안 온다고 투덜거리고 있는데 벌써 왔다는 거였다. 한 시간 전 중학교 여자애가 지난간 것밖에 생각 안 나는데 …. 그 애가 임혜진이었다. 우리 집사람 안 만났으면 그 애하고 결혼했을 수도 있다. 지금도 친척이나 여동생 보는 기분”이라며 임혜진과의 인연을 설명했다. 5. 90년대 초 정치 모임에서 사회를 보는 모습. 정치인 시절의 이덕화를 보여 주는 사진이다. 6. 90년대 후반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에 자리한 대관탈도에서 흑돔을 잡아 올리며 환호하고 있다. 연예계에 복귀하기 전 놀면서 낚시로 울분을 달랬다. “그때 낚시 안했으면 죽었을 듯 싶다.” 진짜>
■이덕화는 누구?
생년월일: 1952년 5월 8일 출생지: 서울시 중구 봉래동 체격: 173㎝. 65㎏ 혈액형: B형 가족: 아내 김보옥씨와 1남(태희) 1녀(지현) 학력: 서울 동신초-서울사대부중-경희고-동국대 연영과 취미: 낚시 데뷔: TBS 공채 13기(1972년) 작품: 드라마 MBC TV <사랑과 야망> . KBS 1TV <한명회> . KBS 2TV <웃는 얼굴로 돌아보라> . KBS 1TV <대조영> 등. 영화 <추억의 이름으로> · <개벽> · <접시꽃 당신> · <살으리랏다> 등.
글=장상용 기자 [enisei@ilgan.co.kr] 사진=양광삼 기자 [yks01@jesnews.co.kr] 살으리랏다> 접시꽃> 개벽> 추억의> 대조영> 웃는> 한명회> 사랑과> 대조영> 대조영> 제5공화국> 대조영> 웃는>사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