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70년대 최고의 프로 스포츠는 복싱과 프로레슬링이었다. 김기수는 1966년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며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이 된다.
복싱의 인기는 홍수환-김태식-박찬희-김철호-유명우 등으로 이어졌지만 1990년대 이후 점차 인기가 시들해졌다.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헝그리 복서는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요즘 복싱 체육관은 뱃살을 빼기 위한 여성들의 다이어트 열풍에 편승해 힘겹게 생존해 나가고 있다.
지금은 K1. 프라이드 등 이종격투기가 인기지만 과거에는 프로레슬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김일의 박치기는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청량제 구실을 했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1965년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한국 레슬링 장영철의 폭로 이후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현란한 몸동작으로 1970년대 까지도 어느정도 팬들을 확보했던 프로 레슬링은 1980년대 초반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생기면서 크게 위축됐다.
1980년대는 한국 프로스포츠가 본격화된 시기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며 정책적으로 스포츠를 육성시켰다. 스포츠·스크린(영화)·섹스를 이용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는 우민화 정책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가 차례로 출범했다. 프로야구가 막을 올리며 1970년대까지 인기가 높았던 고교 야구는 ‘황금시대’의 막을 내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도 한국 스포츠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엘리트 체육으로 집중 육성된 한국 스포츠는 단기적이고 효율적인 성과를 냈지만 생활체육으로 저변을 넓혀나가는 건전하고 안정된 발전의 기틀을 다지지는 못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못지않게 1980년대에는 농구와 배구에 대한 팬들의 관심도 높았다. 프로농구가 1997년 출범하고 프로배구가 2006년 닻을 올렸지만 여전히 그 시절 농구대잔치와 배구 슈퍼리그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매년 신년 초 열렸던 프로농구 삼성전자와 현대건설의 대결은 두 재벌가의 맞대결로 관심의 초점이 됐다.
1990년대부터는 국내 스포츠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돼며 스포츠 시장의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1978년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지만 정보 전달력이 떨어져 그 파급 효과가 국내 축구에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찬호는 1994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며 팬들의 눈길을 단숨에 국내 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돌려놓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2002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가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있는 프로스포츠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야구와 마찬가지로 축구 역시 박지성·이영표·설기현 등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의 경기가 실황중계되며 K리그의 인기를 위협하고 있다.
또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는 종목 사이의 내부 경쟁 이외에도 영화·게임·방송 등 다양한 문화 영역과도 경쟁을 벌이며 생존의 길을 모색해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