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연인끼리 여행을 해도 트러블이 생기게 마련인 법. 낯선 남과 여가 떠난 일주일간의 여행. 그들은 과연 여행지 곳곳에서 태클 거는 힘든 암초들을 이겨내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로맨스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도대체 뭘 버릴게 그렇게 많다는 거야?” H씨가 물었다. 난 그저 버릴 게 많다는 말로 대답했다. 복잡한 감정을 하나 둘 내려 놓으며 타이산 정상에 오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어느 블로거의 글.
그리고 정상에서 힘겨운 산행의 피로를 한꺼번에 날릴 수 있다는 음식 젠빙(煎餠)에 대한 환상. 게다가 민박집에서 만난 L군은 중국의 타이산만은 야간에 가야 한다고 했다. 길마다 촛불이 다 켜져 있어서 그 풍경이 예사롭지 않은 데다 명산의 백미는 일출이라나.
민박집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6시간 동안 기차를 달려 타이산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다섯살짜리 꼬마에서부터 팔십은 돼 보이는 할머니까지 플래시를 손에 들고 산을 오르는 중국 사람들을 보니 이 산을 왜 영산이라 하는지 알 것 같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H씨의 핀잔을 무시한 채 끊임없이. 아무말도 없이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구름 속의 일출과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젠빙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하지만 야간 산행의 낭만은 채 두 시간을 넘지 못했다. 아직 중간밖에 못 올라왔는데 거의 기절 상태다.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하는 상황. 차가운 돌덩어리 위에서 졸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시원한 생맥주 . 시원한 사이다 ” 군대 유격에서 산악구보를 할 때 조교들이 붙였던 구호라나? “조금만 더. 다 왔어. 어이쿠 잘한다. 안 올라오면 확 굴려버린다.” 눈물겹도록 집요한 H씨의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새벽 5시가 되어 겨우 케이블카 타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엄청난 입장료를 내고 올라간 정상은 그야말로 젠빙을 먹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둥그런 판이 돌아가고 얄팍한 옥수수 밀가루 반죽이 턱 하고 올려지면 거기에 대파 넣고 자장 비슷한 검은 소스를 쭉 뿌리면 끝. 그다지 신기하고 진기한 맛은 없을 것 같은 음식 과정. 역시나 거창한 소문은 진실과 다르다.
결국 소중하게 준비해온 ‘신라면’을 꺼내들고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비장하게 국물을 마셔댔다. 중국인들의 황당해 하는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또 줄넘기를 꺼내들었다. 멀찍이 떨어져 내 모습에 창피해 하던 H씨도 결국 나의 협박에 못이겨 줄넘기에 동참했다. 그렇게 우리는 타이산에서의 뒤통수 뜨거운 일출을 맞이했다.
■H씨의 숨겨진 로맨스 전략
버릴 것이 많다는 둥 유난을 떨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항상 의욕만 넘치는 J양이 타이산에서 기절했을 때는 정말 같이 굴러 내려가고 싶었다. 데리고 올라가기에는 너무 힘이 들고.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 세 칸만 더. 네 칸만 더 하며 험난한 계단길을 어르고 달래며 올라가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오죽하면 시원한 생맥주까지 나왔을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J양은 언제 힘이 솟았는지. 정상에 올라가자 마자 여지없이 줄넘기를 꺼냈다. 내가 좋아하는 팥양갱만 준비하지 않았어도 줄넘기는 하지 않았을 텐데.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조그만 선물이라며 내주는 센스. 정말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사실 J양이 덜컥 내놓은 23가지 미션을 모두 다 수행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일주일동안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고. 그 시간이 아주 즐거웠다는 점이다. 그녀가 하고자 했던 모든 일이 내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J양과 함께 한 일주일은 나의 여행에도 새로운 자극제가 됐다.
J양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타이산에서부터 달라 보였다고 했다.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누군가 구해줄 수도 없는 극한 상황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외치며 다그치지 않고 여유를 보였던 모습에 완전 신뢰감이 들었단다.
여자에게 여행은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힘에 부칠 때가 많다. 물론 이런 상황에선 남자도 힘들다. 하지만 남자는 이럴 때 좀 더 여유있는 모습으로 듬직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여행지에서 베푸는 작은 배려와 친절이 다양한 로맨스를 만들어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죽기전에 꼭 가봐야할 세계의 명산 Best 5
1. 민족의 영산. 백두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오르고 싶은 곳. 요즘은 사실 백두산에 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여전히 중국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아쉬운 일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 때문에 맑게 개인 천지를 보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하지만 힘든 계단길을 따라 정상에 올라서면 왜 이곳을 민족의 영산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 신이 만든 산. 중국 타이산
타이산은 중국인들에게 예부터 영혼이 깃든 산이라 불리며 고대 제왕의 봉선 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산이다. 해발 1545m의 타이산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중국 사람들은 매일 밤마다 이 산을 오른다. 지루한 계단이 이어져 젊은 사람도 올라가기 힘든 험난한 길이지만. 나이 든 할머니부터 어린 아이까지 중국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챙겨 들고 잘도 올라간다.
3.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네팔 히말라야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이 사는 곳’이란 뜻.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로체. 안나푸르나…. 인간의 눈으로는 한번에 담을 수 없는 거대함을 지닌 히말라야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천천히 여유를 즐기며 히말라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트레킹을. 짧은 시간에 히말라야의 모든 봉우리를 보고 싶은 사람은 마운틴 플라이트를 추천한다.
4. 별을 따라 오르는 순례자의 길. 이집트 시나이산
모세가 십계를 받은 시나이산은 그리스도교의 성지다. 해발 2285m의 웅장한 높이. 시나이 반도의 흙빛을 머금은 붉은 바위산. 수도사들이 하나하나 쌓아 올린 3750개의 가파른 돌계단…. 무엇보다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아름답다는 장엄한 일출을 보기 위해 수많은 성지 순례자와 일반 여행자가 밤마다 이곳을 오르고 있다.
5. 유럽의 최고봉. 스위스 융푸라우
해발 4158m의 융프라우를 보기 위해서는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인터라켄에서 하루에 몇 차례씩 산을 오르는 등산 열차를 타야 한다. 묀흐·아이거 등 알프스 최고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것도 즐겁지만. 겨울철 이곳을 간다면 스키·스노보드·패러글라이딩·번지점프 등 다양한 레포츠를 즐겨보도록 하자.
■다음주 예고
동행 여행에서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H씨와 J양. 그리고 또다시 다가오는 이별의 그림자. 긴 여행을 위해 잠시 헤어져야 하는 남과 여의 심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만난 공포의 불심검문. 그리고 H씨에게 나타난 쭉쭉빵빵 러시아 미녀들과의 새로운 로맨스와 J양의 복잡한 삼각 관계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