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현판은 화재가 번지자 소방관이 고가 사다리를 타고 떼어낸 덕분에 가까스로 화마를 피했다. 주요 문화재의 현판에는 어떤 사연들이 얽혀 있을까.
잘 알려지다시피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세로로 씌어져 있는 숭례문 현판의 글씨는 태종의 큰아들로 한때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양녕대군은 풍류를 즐길 줄 알고 특히 서예에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양녕대군의 현판은 공교롭게도 ‘불’과는 악연을 지니고 있다. 양녕대군은 태종 12년(1412년) 경복궁 내에 경회루(慶會樓)가 조성되자 태종의 명을 받들어 경회루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물론 이 때는 가로로 썼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경회루가 불타면서 양녕대군이 직접 쓴 현판도 함께 불타고 말았다. 숭례문 현판이 바닥으로 떨어져 일부 파손된 것이 안타깝지만 불타 없어진 경회루 현판보다는 나은 처지다.
고종 4년(1867년) 지금의 경회루가 중건됐지만 현판 글씨는 복원되지 않았다. 지금의 경회루 현판은 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외교관으로 유명한 신헌의 글씨다.
숭례문의 붕괴로 도성 4대문 중 흥인지문(興仁之門)만이 유일한 현판으로 남아 있다. 흔히 동대문이라고 부르는 흥인지문은 이름에 갈지(之)자를 넣어 동대문이 위치한 낙산의 약한 기운을 보완했다. 네 글자인 흥인지문은 두 자씩 두 줄로 써넣었다. 이는 조선 중기의 문인인 이황의 글씨체다.
현재 복원이 진행중인 광화문(光化門)의 현판은 1968년 콘크리트 건축물로 중건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한글 친필이 걸려 있었다. 2005년 초 문화재청은 광화문 복원 계획을 밝히면서 한자로 새 현판을 만들기로 했다. 정조의 친필로 집자하는 방안, 1867년 경복궁 중건 때 임태영이 쓴 글씨, 서예가의 새 글씨 등으로 논의되다 광화문 복원 뒤 결정하기로 미뤘다.
조선의 명필로 유명한 석봉 한호와 추사 김정희는 현판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한호는 1575년 선조의 어전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을 썼다. 선조가 왼쪽부터 거꾸로 원(院), 서(書), 산(山)을 한 자 한 자 불러주다 마지막 도(陶)를 부르자 도산서원 현판임을 뒤늦게 알아채고 놀라는 바람에 도를 약간 삐뚤게 썼다고 한다.
전국 주요 사찰의 현판을 쓴 김정희는 부친인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해인사를 중창했는데도 현판을 쓰지 않았다. 이는 팔만대장경 때문이다. 김정희는 경판의 글씨를 보고 “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서 쓴 것 같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대신 김노경은 김정희로 하여금 해인사 건립을 위한 권선문(勸善文:시주를 권하는 글)과 건물의 상량문(上樑門)을 짓게 했다. 1856년 김정희가 타계하기 사흘 전에 쓴 봉은사의 판전(版殿)은 그의 대표적인 현판으로 꼽힌다.
한편 현존 최고(最古)의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이 썼다고 하는 충남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그런데 그 진위는 불확실하다. 이를 제외하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북 안동군청 청사에 걸려있는 안동웅부(安東雄府)의 현판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모두 고려 말 공민왕이 직접 쓴 글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