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간된 <크기의 과학> 이란 책을 보면 '크다는 것은 상대를 주눅들게 하는 무기다. 하지만 크다고 능사는 아니다. 공룡은 사라졌지만 가장 작은 생물인 세균은 아직도 살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우리 속담처럼 작은 것도 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야구에서 크다는 것은 강점이다. 랜디 존슨(208㎝)이 마운드에 오르면 타자는 엉거주춤 한발짝 물러선다. 그러나 김병현(179㎝)이 던지면 방망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같은 배트라도 배리 본즈가 쥐면 나무 젓가락처럼 보인다. 반면 에디 가이델(1951년에 뛴 난장이 타자로 키가 109㎝였다)은 힘겨웠을 것이다.
코치들도 ‘땅꼬마’를 보면 ‘저 체구갖고 어떻게…’라며 무시한다. 덩치가 크면 ‘괜찮네. 한번 키워볼까’라며 한번 더 눈길을 준다. 어쩔수 없다. 인지상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164㎝ KIA 고졸신인 김선빈의 활약이 눈에 띈다. 그는 역대 최단신이다. 게다가 지난해 드래프트서 43번째로 프로 유니폼을 입은 무명이라는 점도 이야깃 거리다. 흔해 빠진게 억대 계약금인데 그는 3000만원을 받았다. 지난달 12일 시범경기서 처음 봤을 때 ‘프로선수 맞아’라며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안타를 치고 베이스를 도는 모습에 생각이 바뀌었다.
‘좀 하네. 센스가 있는데.’
결국 신인이지만 김선빈은 개막 엔트리에 들었고 지금까지 1군에 살아 남았다. 대형신인 나지완도 2군으로 내려갔지만 여전히 1군에서 선발과 후보로 번갈아 16경기에 나가 2할6푼5리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뛰어난 성적은 아니지만 팀 평균타율 2할5푼4리 보다 높다. 무명 신인으로써 자신의 몸값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그의 성공시대 1막 1장이 살짝 열리는 느낌이다.
김선빈의 모습은 토론토의 데이비드 엑스타인을 연상시킨다. 그 또한 메이저리그 최단신(168㎝)이다. 간신히 프로 유니폼을 입은 것도 비슷하다. 엑스타인은 97년 드래프트서 19라운드로 보스턴에 지명됐다.
581번째로 뽑혔다는 것은 빅리그 진출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계약금도 1000 달러였다. 그는 골리앗들이 판치는 빅리그에서 살아남은 다윗이다. 본즈의 평생 소원인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두개나 꼈다. 2006년 월드시리즈에서는 MVP도 받았다.
하느님은 공평하다. 키가 작은 핸디캡을 준 대신 장점도 여럿 줬다. 빠른 발·좋은 선구안·방망이 능력·근성·투지 등등….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성공 신화를 쓸 수 없다. 눈물겨운 노력이 뛰따랐다.
“포기하는 게 어때?”라는 비아냥이 들렸을 때 입술을 깨물었다. 남들이 배트를 한번 휘두를 때 두번 돌리고, 한발짝 움직일 때 뛰고 또 뛰었다. 빅리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볼넷을 얻고서도 1루까지 빠르게 뛰었다. 허슬플레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젠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김선빈은 투수출신이기에 엑스타인보다 강한 어깨를 가졌다. 하지만 걸음마를 시작한 김선빈에게 ‘한국판 엑스타인’이란 닉네임을 붙여주기는 이르다. 승부는 이제부터다. 오랜만에 팍팍한 그라운드에 훈훈한 드라마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