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용산 e스포츠 전용 스타디움. 무대 위 세워진 두 개의 투명 경기 캡슐 안에 낯익은 남녀가 각각 헤드셋을 쓰고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프로게이머가 아닌 여성 최초 프로바둑 9단 박지은과 꽃미남 바둑기사 프로 6단 허영호였다.
돌 놓는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방안에서 두는 것으로 인식되던 바둑이 젊은층을 찾아 왁자지껄한 게임 대회장으로 나왔다. 프로 바둑기사들의 이 같은 외출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바둑에 젊은 인구를 끌어들이며 e스포츠의 새 장을 열었다” “평면 바둑을 3차원 공간으로 올려놓았다”는 호평과 “국보급 기사인 조훈현·이창호가 헤드셋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슬프다”는 바둑 팬들의 비난도 나왔다.
■ “e스포츠 경기장에 40대들이 찾아오다니…”
이날 열린 ‘바투인비테이셔널’ 결승에선 허영호가 박지은을 누르고 우승했다. 이 대회에는 조훈현·이창호·유창혁·박진솔·김형우·한상훈·구리·창하오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한중 대표 프로 기사 10명이 참가했다. 경기장의 모습도 확 달라졌다.
10대 위주의 소위 ‘오빠부대’들이 채웠던 기존 관객들과는 달리 경기장에 40·50대 중년층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3대가 함께 관람하는 등 연령대도 어린이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해졌다. 각 지역 바둑교실을 비롯한 다음 프로바둑사랑동호회·이창호 팬클럽 두터미·이화바둑 동아리 등 단체에서 관람 문의도 쇄도했다.
논란의 핵심은 한 판 하는데 15분~30분 정도 걸리는 경기 방식이다. 지난해 12월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 공개된 게임 ‘바투’(이플레이온 개발)는 e스포츠 중계를 염두에 뒀다.
19줄 바둑판을 11줄로 축소하고,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 한 수인 ‘히든’ 등 허를 찌르는 룰이 적용된다. 또한 3개의 돌을 먼저 놓고 시작하는 베이스빌드, 위치에 따라 가치가 다른 플러스·마이너스 좌표 등 게임 요소를 가미했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은 “재밌는 시도”, “바둑을 저급화했다”등 엇갈린다. 대회 주최측인 온게임넷은 “바투는 4000년 역사의 바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두뇌전략 게임”이라며 “스타크래프트를 잇는 차세대 e스포츠로 육성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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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면 공간 3차원으로 승화” vs “정통성 유지해야”
결승전 내내 관람석 앞줄에 앉아 경기를 지켜본 조훈현 9단은 “요즘 아이들이 바둑 배우기를 어려워하고 지루해한다. 바투라는 게임이 등장해서 ‘놀이’로 접하며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며 “바투를 잘 하려면 바둑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바둑 저변 확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경기장에서 만난 한 팬은 “체면을 무릅쓰고 조훈현 같은 천재가 직접 나선 건 평면의 바둑을, 젊은이들이 친숙한 사이버에 3차원으로 구현하고 싶어서일 것”이라고 지지 입장을 표했다.
한국 기원은 “바투가 바둑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 바둑 종가에서는 정통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일부 기사들은 “바둑 인구가 점점 줄고 있다지만 제도를 개혁해야지 바투가 정답이냐?”며 아예 바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케이블 TV로 경기를 지켜본 한 팬은 “바투의 성공은 결코 바둑의 성공이 아니다. 한국은 물론 세계를 대표하는 조훈현 국수가 캡슐에 들어가 헤드셋을 쓴 모습을 보니 슬프다. 연민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치문 중앙일보 바둑 전문 기자도 “바투가 ‘친구인가 적인가’를 당장 가리기는 어렵다. 새로운 바둑 인구가 유입되고 있는지, 기존의 바둑 인구만 잡아먹는 것인지 차분히 한두 달 지켜봐야 한다. 일시적인 것인지 지속적인 생명력이 있는지 곧 판정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