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3일째의 메인이벤트 남자 110m허들 경기가 끝난 29일 밤 스타디움에는 환호와 탄식이 교차했다. 가장 먼저 골인한 세계기록 보유자 다이론 로블레스(25·쿠바)의 타이틀 방어, 제이슨 리차드슨(25·미국)이란 신예의 등장, 4년 만에 메이저대회 시상대로 복귀한 '황색탄환' 류샹(28·중국)까지. 해피엔딩이었다. 셋은 국기를 들고 트랙을 돌며 입상을 자축했다.
하지만 경기 후 트랙 밖의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사무국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중국대표팀이 IAAF에 공식항의했다. 류샹이 로블레스의 방해로 경기진행에 지장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선수는 경기 후 30분 안에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내용이 경기규정(146조 2항)에 명시돼 있다. IAAF는 즉시 상소심판위원회를 구성하고 비디오 판독에 들어갔다.
로블레스와 류상이 9번째 허들을 넘는 순간 상소심판위원회의 핵심인물 이모레 마트리치(헝가리) IAAF 기술국장의 눈은 예리하게 빛났다. 로블레스의 오른손이 류샹의 왼손을 잡아채는 장면이 TV 영상에 그대로 잡혔다. 움찔한 류샹은 로블레스를 쳐다봤다. 트랙을 디딘 발이 휘청거렸다. 레이스 중반부터 로블레스를 따라잡은 류상의 가속엔진은 기어가 잘 못 들어간 듯 요동을 쳤다. 마지막 허들을 넘고 골인지점으로 쇄도하는 상황에서도 같은 장면이 포착됐다.
중국의 이의제기는 합당했다. 마트리치 국장은 7명의 상소심판위원들에게 규정위반 사항을 설명했다. 육상규정 163조 2항, '트랙 경기 또는 경보 경기 선수가 다른 선수의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 밀거나 방해할 경우 그 종목에서 실격된다'. 로블레스가 위반한 조항이다.
마트리치 국장의 설명은 이어졌다. '고의성 여부는 상관이 없다. 로블레스의 행위로 류샹이 놀라 중심을 잃었고 그로 인해 스피드가 떨어졌다'. 상소심판위원회는 현역심판이 아닌 IAAF 집행위원이 돌아가며 맡는다.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만큼 홀수로 정해 최종투표로 상소를 처리한다. 이번 사안은 투표로 갈 것까지도 없었다. 만장일치로 실격판정이 내려졌다.
마트리치 국장은 상소심판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로블레스를 불러 실격 사실을 전했다. 하지만 로블레스는 불복했다. 쿠바대표팀 역시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있었다. 다시 한 번 상소심판위원회의 논의가 이어졌지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의제기는 기각됐다.
류샹은 경기 후 "로블레스가 절대 고의로 내 손을 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며 친구의 행위를 변호했다. 로블레스와 쿠바대표팀은 과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아직 공식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구본칠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경기국장은 "고의성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류상의 팔을 치는 행위로 로블레스가 이득을 본 건 명백하다. 하지만 고의적인 행위로 확인하기 어려워 추가징계를 줄 사안은 아니다"고 했다.
대구=장치혁 기자 [jangt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