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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163. 겨울에 떠난 남자
“법사님,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합니다.” 후암 가족 중 나를 열심히 따랐던 A씨가 얼마 전 영계로 떠났다. 서둘러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영정사진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문득 재작년 가을, 그와 함께 낙엽 지던 비원을 걷던 일이 떠올랐다. 가을 정취가 유난히 아름다웠던 날이었다. 참가자 백여 명은 어렵게 비원 단체 관람을 허락받고 문화재알림이의 도움을 받아 방문할 수 있었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비원의 산책길은 한걸음, 한걸음이 생의 자취를 밟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날 참석자들과 나눴던 대화, 웃음소리, 단풍을 즐기는 여유 있는 시선들까지.
안타깝게도 A씨와의 산책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비원 산책엔 A씨와 각별한 사이였던 B씨도 참석했었다. B씨는 다섯 번째 백일기도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부인의 손을 꼬옥 잡고 참석했었다. 기도가 있는 날이면 1층부터 선원이 있는 6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걸어 올라왔다. 그런 B씨가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아는 분은 많지 않았다.
B씨는 몇 개월 남지 않은 생을 후암과 함께 했다. 비원을 산책하는 날에도 웃으며 “담배를 조금 일찍 끊을 걸 그랬습니다”라며 남은 생을 아쉬워했다. 다섯 번째 백일기도 때에는 말기암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앉은 법당에 꼿꼿하게 앉아 기도하곤 했다. 내가 환자라고 특혜를 줄 수도 없는 입장이라 힘들면 말하라고만 당부했을 뿐이었다.
그해 겨울 흰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선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병원에서 그는 앉은 채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큰 고통 없이 떠나셨습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기암 환자의 몸으로 낙엽 지는 비원을 산책하며 끝까지 삶의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했던 B씨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제 B씨와 가까웠던 A씨마저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A씨는 불과 몇 달 전 유성 산신법회에도 씩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작년 10월 2일에는 나를 따라 차일혁 경무관님 묘소 참배에도 참가했다. 그런 그가 옆구리에 담이 걸린다며 자꾸 아파하기에 나는 “빨리 병원에 가봐라. 가서 많이 놀라지 마라”라고만 말했다. 그때부터 A씨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검사 결과 폐암 말기였다. 폐에 암 덩어리가 너무 커져 옆구리에 담이 걸린 것처럼 아팠던 것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일곱 번째 백일기도에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겨우 한 달 사이에 그의 병세는 급속히 나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겨울에 떠나갔다.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종교단체보다 많은 공부를 하는 선원이지만 가까웠던 가족들과 이별하는 일만은 매번 고통스럽다.
하루도 한생이요, 하루를 잘 살아야 한생을 잘 사는 법이다. 아침엔 태어나는 연습, 출근할 땐 이별하는 연습, 저녁에 돌아오면 만나는 연습,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인생을 살면서 세 번 태(胎)를 끊어야할 때가 찾아온다. 첫 번째는 태어나는 순간이다. 자궁 속 탯줄은 따뜻하게 숨 쉬고 영양을 공급받는데 유용했지만 자궁 밖으로 나오면 빨리 끊어야 한다. 끊지 않으면 어머니도 자식도 죽는다. 두 번째는 자식이 성인이 된 순간이다. 열아홉이 넘어 성인이 된 자식과 영혼의 태를 끊지 않으면 자식은 생존능력을 잃게 돼 세상에서 도태되고 만다. 세 번째는 죽는 순간이다.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태를 끊지 않으면 다음 생까지 업(業)만 잔뜩 끌어안고 갈 뿐이다.
평소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던 B씨는 죽은 뒤 자신의 존재를 엘리베이터로 알렸다. 이번에 떠나간 A씨도 엘리베이터 장난으로 영혼의 존재를 알렸다. 선원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면 롤러코스터처럼 흔들리면서 층층마다 멈춘다거나, 자기 마음대로 1층부터 7층까지 올라가버렸다. 놀란 탑승자들은 공포에 질려 다시는 엘리베이터를 안탄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 영정 앞에서 나훈아의 '홍시'를 기막히게 잘 불렀던 그의 노래 솜씨가 문득 그리워진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