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배우들이 역사왜곡 논란에 휘말린 '기황후' 등 퓨전사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지상파 사극 시간대에는 아이돌 배우나 달콤한 멜로, SF등의 장르 혼합 등을 내세운 퓨전사극들이 득세하고 있다. 문제는 기황후 등 역적에 가까운 인물까지 '당차고 진취적인 여성상'으로 포장하는 등 역사 왜곡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것. 이런 추세 속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이 거둔 성과는 주목할만하다. 지난 9일 오후 방송된 '정도전'은 16.5%(닐슨코리아, 전국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8일 방송분보다 1.1%포인트 소폭 상승한 수치이자 자체최고 기록. '정통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상승세를 보여 방송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주 시청층인 중장년층 뿐 아니라 회를 거듭할수록 역사에 관심이 많은 젊은층까지 끌어들이며 '정통사극은 진부하다'는 편견을 보기좋게 깨버렸다. 세련된 영상미와 세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대본, 유동근(이성계)·조재현(정도전)·박영규(이인임)·서인석(최영)등의 명품연기가 합쳐져 '시청료가 아깝지 않은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의 눈에 30%대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중인 MBC '기황후'는 어떻게 비쳐질까. 10일 경기 수원시 팔달구 KBS수원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정도전'의 서인석 ·조재현 등 배우들은 "사극에서 그 시대에 놀고 먹고 연애질 하는 것만을 그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천편일률적인 퓨전사극이 기록하는 수치와 '정도전'의 시청률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없다"며 '정통'사극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자체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소감을 말해달라.
"우연히 최고시청률 찍은 바로 다음날 이런 자리를 가지게 됐다. 어제 KBS 2TV '개그 콘서트'(이하 '개콘'. 9일 시청률 15%)는 우리에게 시청률 밀렸다며 따로 언급도 해주더라. '개콘' 팀에 감사드린다(웃음). 그간 분명 대중들의 호응이 있는 것 같았는데, 매스컴에서는 '정도전'에 대한 반응이 없어 조금 서운했다. 지금은 기쁘다."(강병택 PD)
-대하사극 출연진으로서의 고충은 없나.
"드라마 현장은 힘들고 열약하다. 사람이 8시간 일하면 쉬어야 하는데, 주야를 막론하고 '노가다'판이다. 아마 노동법에도 걸릴 것이다(웃음). 그나마 시청률이 조금 올라가서 다행이다. 요새는 예쁘고 잘생긴 젊은 연기자들이 나오는 퓨전사극이 많다. 시청률이 잘 나오다 보니 그것이 정통인양 여겨진다. 사극에는 선조들이 살았던 과거의 좋은점과 나쁜점을 현실의 교본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 단지 그 시대 놀고 먹고 연애질 하는 것만이 사극의 의미는 아니다. 픽션도 어느 정도의 틀 안에서 활용해야지, 사실을 왜곡하거나 선조를 비하하는 등 재미 위주로만 가면 안 된다. 정통사극에서 선조들의 모습을 그들보다 더 멋지게 그려내고 싶다. 커리어 30~40년 이상의 조금은 중후한 어른들이지만, 많이 격려해 달라. 열심히 노력한 보람을 느끼고 싶다."(서인석)
-권력자인 이인임 캐릭터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극중 요새 정치인이 들어도 될 만한 명대사가 있다면.
"지난 주말에 '내가 하루 먼저 죽는 것보다 권력 없이 하루를 더 사는게 더 두렵다'는 대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정치가 이전에 배우로서도 공감이 많이 가는 대사였다. 나 스스로도 '연기에 몰입되지 못하고 어설프게 하루를 더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라는 해석을 해 봤다."(박영규)
-대본이나 연기 외에도 '정도전'의 성공 비결이 있다면.
"극중 600년 전 조선시대의 상황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낮다보니 드라마 속 상황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다. 결국 새로운 정치를 열어줄 누군가를 기대하는 심리가 통한 게 아닐까. '정도전'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조재현)
"결국 기획의 싸움이라고 본다. 예전의 인물과는 조금 다른 인물을 그려낸 점이다. 요새 사극이 상업화 경향이 강하고, 보기좋고 재미있는 이야기의 퓨전 작품이 많다. 사극의 본질을 찾기 힘든 상황에 오히려 정통사극의 진심이 시청자들에게 먹힌 것 같다."(강병택 PD)
-그럼에도 '기황후'같은 퓨전사극의 시청률이 더 높은 상황이다.
"요새는 시청률의 가치를 너무 따진다. 경쟁사회에서 다들 장사꾼 스타일로 나가는 것 같다. 장사 잘해오면 예쁜놈이고 아니면 잘라버리라는 식이다. 아마 배우들 다수는 시청률 높은 곳에 가고 싶을 것이다. CF도 들어오고 부가수입도 있고 매스컴 관심도 많이 받지않나. 하지만 TV드라마에는 예술성을 위한 자리도 있어야 한다. '기황후'가 시청률 높은 것은 시청자들의 몫이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투표 시간을 젊은층 많은 시간에 할애해야 한다든지, 비가 와야 한다든지 하는 변수를 많이 쓰지 않나."(서인석)
"'기황후'와 '정도전'의 시청자층은 많이 다른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엔 남자밖에 없다. 그래서 극중 이인임한테 과부 한 명 붙여달라고 제작진에게 요구했는데 안된다더라(웃음). 자장면이 있으면 짬뽕도 있어야 한다. 시청률은 조금 딸리지만 임팩트나 집중력, 작품에 대한 가치관이나 철학에서는 '정도전'이 뒤지지 않는다. '정도전'은 '정도전'이 필요한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방송이 되고 있는 것이다."(박영규)
-'정도전'의 주인공을 맡게 된 과정에서 어떤 사명감이 있었나.
"사명감까지는 아니지만 '정도전'이 드라마의 다양성을 높여주는데 일조할 것이라 봤다, 공영방송인 KBS에서 그런 다양성을 무시하고 시청자 기호에만 쫒아가는 작품을 제시했다면, 혹은 '정도전'을 다른 퓨전 사극처럼 포장했다면 이 역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받는 시청률보다 지금 '정도전'이 기록한 시청률이 훨씬 의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