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까지 와서 경기장에서만 축구를 보고 가는 건 참 억울한 일이다. 지난달 30일 오전 1시(한국시간)에 브라질 포르탈레사에서 열린 네덜란드와 멕시코의 16강전은 경기장이 아닌 벨루오리존치의 '팬 페스트(Fan Fest)' 현장에서 관전했다. 브라질이 왜 '축구의 나라'이자 '축제의 나라'인지 알 수 있었다.
팬 페스트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도해 2006 독일월드컵 때부터 하나의 이벤트로 키워낸 행사다. 대회 조직위가 만들어놓은 장소에 팬들이 모여 여러 명이 경기를 함께 보며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12개 개최도시마다 특징 있는 장소를 정해 팬 페스트를 열고 있다. 바다를 끼고 있는 리우 데 자네이루는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팬 페스트를 연다. 밀림의 중심에 위치한 마나우스는 아마존 강변에서 한다.
"팬 페스트에는 특색 있는 유니폼을 입고 가는 게 좋다"는 주변의 조언을 듣고 벨루오리존치를 연고로 하는 명문 클럽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유니폼을 구매했다. 현재 미네이루에는 한때 세계 최고의 스타였던 '외계인' 호나우지뉴(34)가 있다. 그의 이름과 등번호 10번이 새겨진 검은색과 흰색 줄무늬 유니폼을 골랐다. 벨루오리존치의 팬 페스트 장소는 도시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엑스포미나스(Expominas)다.
팬 페스트 현장의 보안은 월드컵이 열리는 경기장 수준이었다. 군인과 경찰이 일일이 소지품 검사를 했다. 그러다 한 경찰이 나의 미네이루 유니폼을 보더니, "당신 갈루(Galo·미네이루 구단의 별칭. 수탉이라는 뜻)야? 유니폼 태워버려"라고 말했다. 살벌한 표정이었는데, 이내 싱긋 웃더니 농담이란다. 이 경찰은 자신이 미네이루의 라이벌팀인 크루제이루 팬이라고 했다. 팬 페스트 안에서 나는 단연 눈길을 끌었다. 낯선 동양인이 자기네 클럽 유니폼을 입고 왔다고 여기 저기서 사진을 찍자고 요청을 했다. 미네이루 팬들이었다. 연예인이 된 느낌이었다.
크루제이루의 팬들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우~우~'거렸다. 그러면서 자기네끼리 모여 "크~루~제이루"를 연호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친근한 분위기였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축구 유니폼 하나로 대화했다. 평소 전시장으로 쓰인다는 엑스포미나스는 대형 클럽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홀에는 형형색색 조명이 어지러이 돌아다녔다. 130헤알(약 6만 원)을 내면 무제한으로 맥주와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있었다.
정신 없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네덜란드와 멕시코의 16강 경기가 홀 곳곳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중계되기 시작했다. 함께 웃고 떠들던 브라질 팬들은 진지하게 경기를 지켜봤다. 후반 3분 멕시코의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25·비야 레알)가 선제골을 넣자 팬 페스트를 찾은 멕시코 팬들이 열광했다. 바로 뒤에 있던 네덜란드 팬들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나 후반 43분 베슬레이 스네이더르(30·갈락타사라이)가 동점골을 넣고, 후반 추가시간에 클라스 얀 휜텔라르(31·샬케04)가 페널티킥으로 경기를 역전시키자 네덜란드 팬들이 난리가 났다.
브라질 팬들은 승리한 네덜란드 팬들에게 박수를 쳐줬다. 충돌에 대비해 경찰이 멕시코 팬과 네덜랜드 팬 사이에 자리 잡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서 브라질 내 인기밴드인 주앙 루카스&지오구의 공연이 펼쳐졌다. 벨루오리존치는 1980년대 세계적인 헤비메탈 밴드를 수없이 배출한 브라질 헤비메탈의 본고장이다. 세풀투라(Sepultura·포르투갈어로는 '세푸우투라'), 블랙메탈 밴드 '사르코파구(Sarcofago)' 등이 벨루오리존치 출신이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네덜란드 팬과 멕시코 팬은 하나가 돼 브라질 음악을 즐겼다. 팬 페스트는 밤 10시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