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등'은 제목부터 눈길이 간다. '은교'를 연출한 정지우 감독이 내놓는 4년 만의 신작 '4등'. 영화는 제목대로 간다는 속설(?)때문에 상업 영화로 제작됐다면 투자사·배급사 등의 등쌀에 기획단계부터 대번에 배제됐을 타이틀이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12번째 인권 영화라 '오히려' 자유롭게 제목을 정할 수 있었다. 스토리도 마찬가지. 정지우 감독은 그 어떤 작품 보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써내려갔고 연출했기에 즐거운 작업이었다며 미소 짓는다. 스포츠 선수의 도박과 폭력 등을 다루고 있지만, 외압도 전혀 없었다. 영화는 수영대회에서 만년 4등만 하는 아들 준호(유재상)가 1등에 집착하는 엄마(이항나)때문에 새로운 수영 코치 광수(정가람/박해준)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큰 틀에선 스포츠계 인권을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의 왜곡된 교육을 리얼하게 담아냈다. 아이와 부모가 영화를 함께 본 뒤 소통할 수 있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영화다. 그래서일까. 러닝타임은 116분이지만 영화의 묵직한 메시지는 꽤 오래간다.
-스포츠 인권위원회의 제안을 받고 만든 영화다. 스포츠 종목 중 수영을 선택한 이유는. "물 속 장면을 찍고 싶었다. 근거 없이 그냥 막연히 그 장면을 찍고 싶어서 수영을 택했다. 물 속 장면에 대한 이미지를 오래 전부터 그리고 있었다. 체육인을 취재 과정에서 수영을 택한 건 아니었다."
-어린 광수 역의 배우 정가람은 전혀 수영을 하지 못 했다고. "처음엔 수영선수 중에 캐스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기가 준비된 분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가람 군을 캐스팅한 후 수영선수 몸을 만들기로 했다. 얼핏 보면 수영선수에 가까운 몸을 만드는데는 성공했지만, 수영 실력이 불안했다. 익사할 뻔 했다. 수영 실력은 일반인들의 중급 정도 되는데 오랜 시간 수영하는 신을 찍다보니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자세가 엉망이 됐는데 그걸 영화에 담는건 내가 용서할 수 없었다. 취재하고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실제 수영선수들의 수영하는 모습도 보고 박태환 선수가 수영하는 모습도 봤기 때문에 정가람 군의 수영 실력은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영하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반면, 준호 역의 유재상은 수영선수 출신이라고. "준호 역은 처음부터 수영선수 출신 중에 뽑으려고 했다. 마침 유재상 군은 수영선수 출신이고 연기 경험도 있던 배우라 이 영화에 딱 적합한 배우였다."
-극 중 준호 아버지 직업을 기자로 설정한 이유는. "취재과정에서 선수들을 만났을 때 내게 90도로 인사하는 것에 좀 놀랐다. 이유를 물었더니 국가대표 선발 현장에 사복을 입고 제일 많이 오는 분이 기자거나 연맹 소속이라 무조건 낯선 사람을 보면 예의를 갖추고 인사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게 좀 신선하기도 했고, 기자라는 직업을 이율배반적인 입장으로 드러내고도 싶었다. 광수 코치가 선수시절 맞았을 땐 '네가 맞을 짓을 했으니깐 맞았겠지'라고 했던 기자가 나중에 자기 아들의 코치가 되서 때리는 걸 보고 '내 아들은 절대 때려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모순적인 내용을 그리고 싶었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이자, 뭔가 권력이 있는 직업을 그리고 싶어 기자로 택했다."
-공감이 가는 대사가 많다. "취재과정에서 주워담은 말들이다. 자녀가 수영선수인 어머님들을 만나면 '우리 아이가 물에 담근지 몇 년 됐다'라는 표현을 쓰더라. '초를 줄인다'라는 말도 그렇고 실제 수영 선수 부모들이 사용하는 말을 대사에 녹여냈다. 또 광수 코치가 (아이의 교육과 성적에 집착하는 엄마에 대해) '니네 엄마가 수영하면 잘 할거다' 등 던지는 말은 아이를 둔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거라고 생각한다. 현실감 있게 대사를 쓰려고 노력했다."
-스포츠계 폭력을 다루는데 외압은 없었나. "전혀. 인권위에 보여드렸을 때 폭력 보다는 오히려 담배나 도박 장면의 빈도가 많아서 불편하게 받아들일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전혀 문제 삼지 않더라. 영화 스토리나 장면에 대해 지적을 전혀 받지 않았다. 오히려 인권위 관계자들은 '이 영화, 흥행하겠는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4등'은 인권위가 제작한 12번째 영화다. 프로젝트가 10회 이상 이어지면서 내공도 쌓였고, 별별 감독들을 다 만나 작업했기 때문에 오히려 오픈마인드로 대해주더라."
-스타 캐스팅을 하지 않은 건 개런티 때문인가. "그런건 아니다. 프로젝트의 의의와 기획의도 등을 설명했을 때 개런티를 문제삼을 배우는 요즘 없다. 이해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객들이 딱 보면 알만한 배우들 중에 영화에 참여하고 싶은 분도 있었다. 문제는 개런티가 아니라 스케줄이었다. 저예산으로 찍다보니 정해진 일정에서 촬영을 해야했는데 스타들은 그 스케줄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또 개인적으로는 이번 영화는 스타 배우에 포커스를 맞추기 보다는 역할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를 뽑고 싶었다. 그런 배우가 이 영화를 위해서 100배 더 좋을 것이고, 훨씬 리얼하게 보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4등'을 찍으면서 스타 배우가 아닌 배우가 가진 장점을 더 많이 찾았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캐릭터에 더 집중해서 봐주고, 배우를 훨씬 가깝고 친근하게 대해주는 것 같더라."
-혼자 스스로 해야된다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나. "딱 한 마디로 정리를 하긴 힘들다. 어떤 일을 하는데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고, 좋아하는 걸 알아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기다리지 못 하고,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간섭을 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간섭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 준호가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봤는데 1등은 또 못 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게 뭔지 또박또박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 같았다. 억지로 하면 집중도 못 하고, 승부욕도 안 생기지만 좋아하는 걸 진심으로 하게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걸 최선을 다했을 땐 승부나 결과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스스로 좋아하는 걸 알게되는 과정이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끝을 4등에서 4등으로 끝낼 것이냐, 1등으로 끝낼 것이냐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때 내가 취한 건 '찜찜한 1등'이었다. '4등이 뭐가 어때. 행복하면 된거지'라는 마치 선의인 것 처럼 보이는 혹은 덕담을 던지는 판타지식 결말은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유쾌한 1등으로 끝내고 싶지도 않았다."
-저예산인데 수중촬영 비용은 어떻게 감당했나. "수중 촬영은 돈이 많이 드는데 일명 '구걸' 마케팅을 했다. 이 영화가 국가인권위가 제작하는 걸 알고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고가의 카메라도 빌려주시고, 도움을 많이 주셨다. 명분이 있고,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라 많은 분들이 배려를 많이 해줘서 수중 촬영을 할 수 있었다."
-홍보비가 거의 없다고 들었다. "아주 경미한 수준이다. 물론 버스 광고는 꿈도 못 꾼다. 독립영화를 많이 하는 감독의 어머님이 한 말 중 유명한 게 있다. '우리 아들이 버스에 광고를 하는 영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한 적이 있다고 한다. '4등'은 버스 광고는 못 하는 저예산 영화지만, 많은 분들이 칭찬해주시고, 영화계 관계자분들이 먼저 좋은 평해주시고 알아봐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따뜻한 반응에 매일 감사하다."
-언론시사회 때 상업영화를 할 때 보다 자유롭게 작업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다시 묻는 분들이 많았다.(웃음) 뭔가 실수한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하하. 그 말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만약 이 작품이 상업영화였다면 먼저 '4등'을 제목으로 쓰지 말라는 의견이 있었을 수 있다. 또 수영코치는 몸짱 한류배우가 해야된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고, 마지막에 한류배우가 멋지게 마무리하는 장면을 넣으라는 의견이 있었을 수도 있다. 준호가 1등을 하고, 준호를 향해 달려오는 엄마의 모습이 엔딩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 수영대회를 TV중계로 보는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장면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웃음) 하지만 이 영화엔 그런 대중적인 감성을 녹인 뻔한 장면은 없지 않나."
-영화 '은교'를 연출한 감독이 스포츠계 인권을 그린 영화를 했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롭다. "'은교'나 '4등'이나 캐릭터 내면의 감성을 자세히 다루려고 했다는 건 공통점이다. 악당 한 명을 만들어 놓고 쉽게 결론을 내는 게 아닌 각각 등장하는 인물들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이나 성취를 담아내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딱 한 마디로 영화에 대해 한 줄 정리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관객들에게 풍성함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작품은. "용필름과 작업하고 있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단계고, 초가을이나 늦여름에 촬영에 들어가는 게 목표다. 휴먼 드라마고 '침묵의 목격자'라는 중국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앞으로는 노골적인 정치 드라마나 진한 멜로도 해보고 싶다. 이제 멜로를 하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연지 기자 kim.yeonji@joins.com 사진=박세완 기자, 영화 '4등' 스틸컷